등록 : 2013.02.05 03:11 수정 : 2013.02.14 22:07

개성의 아파트 / 한겨레 자료
 남북을 통틀어 겨울철 공통 음식은 김장일 것이다. 북에서 김장은 이듬해 나물이 돋기 전까지 먹어야 하는 먹거리로, ‘반 년 식량’이라고 불릴 만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방의 겨울은 일찍 찾아오고 늦게 물러간다. 그 때문에 김장도 남한보다 좀더 일찍 준비한다. 김장에 필요한 배추와 무는 과거 배급제 시절에는 국가에서 집집마다 공급해주고, 필요한 양념(고춧가루, 마늘 등)은 알아서 준비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아마 배추와 무도 자체 준비하지 않을까 싶다. 김장 김치 담그는 방법은 남북한 간에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잘 다듬은 배추를 굵은 소금에 초절이하고, 소금물에 절여 간이 배면 꺼내어 깨끗이 헹궈서 물기를 잘 뺀다. 그런 다음 준비한 배춧속 양념을 꼼꼼히 잘 발라서 움이나 땅속에 묻어놓은 독에 차곡차곡 넣은 뒤, 잘 씻은 누름돌로 눌러놓고 입구를 봉하면 된다. 김장할 때는 품앗이처럼 동네 아주머니들이 몇 명씩 조를 짜서 함께 한다. 이때 공장, 기업소에서 며칠 휴가를 내준다. 김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에는 떡국 아니라 송편 

 간혹 북한에도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이 남아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반세기 넘게 갈라놓긴 했어도,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북한에도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계절이 겨울이니만치 겨울 세시풍속으로는 뭐가 있을까? 얼핏 떠오르는 몇 가지만 적어보자. 꽁꽁 얼어든 몸을 삽시간에 녹여주던 뜨끈한 동지팥죽과 새해 날이 밝자마자 넙죽 엎드려 어른들에게 드리는 세배, 동산 마루에 두둥실 떠오르는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던 정월 대보름, 그리고 추운 줄도 모르고 얼음판에서 하던 팽이치기와 제기차기, 윷놀이 등이 아닐까 싶다.

 동지팥죽- 북한에서도 해마다 동지가 돌아오면 팥죽을 만들어 먹는다.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새알심을 수수가루나 쌀가루로 만든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하루 종일 떨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먹던 팥죽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1990년대 초반까지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그 후에는 워낙 살림 형편이 어려워 세시풍속을 지켜가면서 때에 따른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세배- 설날에는 어른들에게 세배를 한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음력설보다는 양력설을 더 크게 쇤다. 보통 음력설은 하루를 쉬지만 양력설은 이틀 연속 공휴일이다. 나이가 지긋한 집안의 어르신들과 동네 분들에게 오래오래 건강하라는 새해 설 인사를 공손히 드린다. 그러면 어른들도 덕담 한마디씩 해주며 세뱃돈을 주신다.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남한처럼 설날에는 무조건 떡국을 먹는 풍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송편을 빚어 먹는다.

 정월대보름- 이날이 되면 어머니는 고사리나 고비, 참나물 등 말린 나물로 반찬을 해주셨다. 이때 마시는 술은 ‘귀밝이술’이라고 부른다. 고향에서는 정월대보름이면 명태 한 마리씩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꼭 명태를 통째로 쪄서 먹어야 하는데, 척추가 든든해진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바닷가 근처이다 보니 이런 풍속이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되었건 민족 고유의 전통 풍속이 북녘에도 부분적이나마 이어오고 있음을 이런 기회를 통해 전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식량보다 중요한 땔감 

 남북이 모두 겨울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한 해 마무리를 잘 갈음하고 새해를 기원하는 바람에서 하는 송년회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송년회라 부르지 않고 ‘망년회’라고 한다. (남한에서는 망년회라 부르다 언어 순화 차원에서 송년회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대개 학교는 학급 단위로, 공장이나 기업소, 협동농장은 작업반 등 행정 단위로 나눠서 망년회를 준비한다. 규모가 제법 되는 농장이나 큰 직장 같은 데서는 돼지를 잡아서 고기를 골고루 나누어주고, 내장으로는 쌀과 채소를 잘 다져 넣어 순대를 만들어서 망년회 때 쓰기도 한다. 북한에는 남한처럼 단체모임을 할 수 있는 음식점이나 식당이 없다 보니 망년회도 대개 집에서 준비한다. 학생들은 개개인에게 일정량의 쌀과 돈을 거둔 다음, 널찍한 집에 사는 학생이 음식을 준비한다. 학생 조직 간부의 어머니 두어 명이 모여서 떡과 반찬 등 음식을 준비하면 학생들이 몰려 가서 배불리 먹고 노래도 부르고 시도 읊고 춤도 추면서 흥겹게 보낸다. 나름 가지고 있는 끼를 보여주기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 그렇게 놀다가 자정이 가까워오면 다가오는 새해에도 열심히 노력하여 학습과 조직생활에서 모범을 보이자는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망년회가 끝난다.

 원래 한반도는 춘하추동,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요즘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번 겨울만 해도 지난해 12월부터 혹한이 몰아치더니, 가장 추운 때인 1월 중순 넘어서는 눈 대신 비가 오기도 했다. 철모르던 어릴 때에는 겨울이면 마냥 신이 났다. 친구들과 나지막한 야산에서 썰매를 타고, 두껍게 얼어붙은 강 위에서 얼음지치기도 하고, 나보다 더 크게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또래 친구들끼리 편을 나누어 신나게 눈싸움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하지만 점점 철이 들어가면서부터 어김없이 다가오는 겨울이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내가 철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북쪽의 삶이 휘청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부족한 것으로 가장 먼저 식량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힘들긴 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대로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은 가뜩이나 생활난(식량, 땔감 부족 등)을 겪고 있는 대다수 빈곤한 주민들에겐 참으로 시름겨운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 김장 못지않게, 어쩌면 김장보다 더 중요한 겨울 준비 품목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땔감이다.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오면 수요가 급증하는 것이 바로 땔감이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북한만큼 생활 환경이 열악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구들장에 미지근한 온기라도 감돌게 하려면 나무를 구하러 족히 몇십 리를 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멀리 나무 하러 갈 힘이 없는 노인들은 어쩌다 자식들이 쌀을 가져다주어도 되팔아서 나무를 사야 하는 희비극도 종종 생긴다. 배고픈 건 참아도 추운 건 도저히 못 참는다는 말이 실감 난다. 기억컨대 1990년대 중반 즈음부터 시장에 나무 장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무를 팔다니…’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나무 장사는 별다른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어 의외로 인기 있었다. 장작 중에도 일품으로 쳐주는 것은 참나무 장작이다. 소나무처럼 연기가 많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화력이 좋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도 아궁이에 불 땐다 

 처음 남한에 와서 감탄한 것은 주택가 근처 야산에도 제법 무성하게 우거진 녹지였다. 땔감이 워낙 부족한 북한에는 주택가 야산이 이미 벌거숭이가 된 지 오래인 터라 필요한 화목(火木·땔나무)을 구하려면 10여 리 정도는 족히 가야 한다. 보통 북쪽의 저녁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마치 희뿌연 안개처럼 마을 언저리를 감도는데, 이 모습을 남쪽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농촌에도 보일러를 놓은 까닭에 굳이 예전처럼 아궁이에 불을 때는 집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작은 지방도시 아파트들은 일반 주택이나 다름없이 구들로 되어 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구들도 덥히고 밥도 짓는다. 남한 뉴스에서 툭 하면 나오는 층간 소음 분쟁 같은 것을 북한에서는 들어볼 수 없다. 아파트 층과 층 사이가 그만큼 두꺼운 것이다. 지방도시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수 없는 것은 아마 층마다 구들을 깔아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양이나 함흥 등 대도시 같은 경우 남한처럼 온수난방으로 지어 10층, 20층 이상의 고층아파트가 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난방을 거의 가동하지 않아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말을 북한 떠나기 전에 들은 적이 있다. 그곳 주민들은 “차라리 아궁이가 있었더라면 무엇이건 불을 지펴서 구들을 덥혔을 텐데”라며 겨울만 되면 무용지물인 온수난방을 무척이나 원망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굴뚝과 관련된 작은 기억을 떠올려본다. 나름 분주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버릇처럼 항상 굴뚝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 굴뚝에서 하얀 혹은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신바람이 났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어머니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셨고, 저녁밥을 짓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어머니의 부재가 느껴져 어린 마음에 대뜸 시무룩해지곤 했다. 요즘도 굴뚝에 대한 추억이 가끔씩 잔잔한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추운 겨울을 나는 데 더없이 중요한 땔감도 북한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내세우는 ‘자력갱생 간고분투’ 구호에 걸맞게 거의 자체 힘으로 해결한다. 학생들은 대개 10월에 들어서면 보름 정도씩 의무적으로 ‘가을걷이 전투’에 동원된다. 가을걷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학급별로 조를 지어 ‘화목 동원’을 진행한다. 솔방울, 가랑잎, 솔잎(‘검불’이라고도 한다), 삭정이, 나뭇가지, 심지어 옥수수 뿌리까지 캐내어 말려서 화목 대용으로 쓴다. 북-중 국경지대인 두만강 너머에서 건너다보이는 북한 지역의 산이 대부분 벌거숭이인 이유는, 곡식을 심으려고 화전을 일궈서이기도 하지만 부족한 땔감을 해결하기 위해 베낸 것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북한에는 사유재산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산림도 나라 것이다. 산마다 산림보호원이 있어서 월동 준비에 들어갈 즈음이면 골짜기마다 버티고 서서 단속한다. 통나무를 벌목해서 내려오다 운 나쁘게 걸리면 벌금도 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나무를 벌목한 사람들은 작정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산을 내려온다. 그때까지 골짜기 아래 길목에 버티고 서 있는 단속원은 없기 때문이다. 한밤중까지 열을 올려 단속한다고 해서 뭐가 더 차례지는(‘일정한 차례나 기준에 따라 몫으로 배당된다’는 뜻의 북한 말)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살던 지역은 갈탄 매장량이 풍부한 곳이라 땔감으로 주로 갈탄을 사용한다. 하지만 급속도로 어려워진 전력 사정 탓에 석탄 채굴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가격은 자고 나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겨울을 앞두면 가격 폭등이 더욱 심해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해마다 땔감 걱정까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 바로 북녘 주민들이 처한 형편이다.

29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서부전선 최전방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의 선전마을인 개성시 기정동 마을 앞 논에서 북쪽 주민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파주/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북녘 어린이들만 모르는 산타 할아버지 

 남한에서는 겨울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하늘 가득 울려 퍼지는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일까? 1월 1일 새벽, 동해의 아스라한 수평선 너머로 힘차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바라보며 간절히 비는 새해 소원일까? 친구 혹은 가족들과 한번쯤 꼭 가려고 마음먹는 스키장일까? 어느 것이 딱히 계절을 대표한다고 짚을 수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이 겨울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커다란 선물자루를 둘러멘, 은백색 폭포 같은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인자한 미소의 산타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만큼 내게 낯설기 때문이다. 북한 어린이들은 온 세상 어린이가 아는 산타 할아버지를 모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할 리 만무하다.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지만 대외 선전용으로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데에 불과하다. 당연히 산타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캄캄한 밤, 아무도 모르게 굴뚝을 타고 내려와 아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양말 속에 집어넣고선 미소를 날리며 사라진다’는 전설의 산타 할아버지가 언제쯤 북녘 어린이들에게 동경의 존재로 다가가게 될까? 그건 산타 할아버지만 알 것 같다.

동명숙 / 북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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