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1:19 수정 : 2013.02.15 14:05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연예기자들. 포털 사이트 내에서 클릭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자들의 노동강도도 극심해져 간다. 한겨레 박승화

‘연예 우라깡’.

 김경희(35·가명)씨도 그 일에 진저리를 치던 시절이 있었다. ‘우라깡’(혹은 우라까이)은 기자들끼리 쓰는 일본식 은어다. 남의 기사를 살짝 바꿔 자기 기사로 만드는 걸 말한다. 주로 베껴 쓴 기사를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연예 우라깡’은 그보다 한 수 아래로 친다. 어쩌다 한번 베껴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내 남의 기사를 베껴야 한다.

 기자 생활 7년차를 맞은 2010년의 일이다. 김경희씨는 어느 경제지 온라인뉴스부에 경력 기자로 입사했다. 데스크가 그에게 주문한 일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실검’(실시간 인기 검색어) 기사 따라잡기였다. 연예부 근무 경험이 없는 기자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는 대뜸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설명했다.

 “여기 이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 ‘이동욱 하차’(연예인 이동욱씨가 SBS TV 프로그램 <강심장>에서 하차한다는 소식)라고 떠 있잖아요. 그러면 이 단어를 집어넣은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죠. 보이죠? 잘 모르는 내용이더라도 상관없어요. 이미 나온 기사들을 죽 읽어보고 우라까이하면 되니까. 대개 조금씩 살을 붙이거나 단어를 바꾸는 식으로 해요. 그러고 나서 제목을 눈에 잘 띄게 달고.”

 처음엔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현장으로 취재를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검색어를 보면서 기사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검색어 기사는 연예 매체마다 중요하게 다루는 핵심 콘텐츠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포털 이용자들을 자사 사이트로 불러오는 길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간혹 연예 기획사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를 받아서 쓰기도 했지만, 쉴새없이 쏟아지는 검색어 기사를 만들기에도 바빴다. 이런 일을 하는 연예 매체 기자들을 ‘앉은뱅이’라고 부른다는 말도 들었다. 노트북만 있으면 굳이 취재 나가지 않아도 기사를 만들어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수치심이 일었다.

 ‘앉은뱅이’ 기자의 비애

 이른바 ‘실검 기사’에 몰두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클릭 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기사 조회 수가 많을수록 배너광고의 수익도 많아지는 구조였다. 예컨대 하루 평균 방문자가 10만 명이면 한 달 1천만 원의 광고 매출을 내는 식이다.

 데스크의 요구도 있었지만 그도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비슷비슷한 기사들이 워낙 많다보니 기왕이면 자신이 쓴 기사가 돋보이기 바랐다. 클릭 수가 10만을 넘어가니 이 욕망은 한층 커졌다. ‘제목을 12자 이내로 써야 검색이 잘 걸린다’, ‘문장의 육하원칙을 따지기보다는 검색어를 앞세워라’…. 어느새 누리꾼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비법을 연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만일 ‘○○○ 열애설’이라고 검색어가 떴는데 그 순서대로 안 하고 ‘열애설 ○○○’이라고 쓰면 안 돼요. 그러면 포털 검색에서 밀려요. 기사와 사진설명에 검색어를 최대한 많이 넣는 것도 유리하더라고요. 워낙 많은 매체가 동시에 기사를 써대니 그런 것 같아요.” 그는 포털에 기사를 내보내는 타이밍은 아직도 풀기 어려운 퍼즐 같다고 했다. 너무 일찍 기사를 보내면 묻혀버리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 검색어가 떠 있는 동안 최적의 시간에 올려야 하는데, 그건 순전히 ‘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나마 여기선 하루 20개 정도밖에 안 썼어요. 속보 경쟁을 심하게 하는 데는 한 사람당 40~50개씩 쓴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사 할당량이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일은 ‘눈치껏’ 해야 했다. 유명 연예인들이 패션 화보라도 찍으면 기사 꼭지 수가 확 늘어났다. 사진을 여러 장 받아서 컷마다 적당한 제목을 붙여 기사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마약에 손을 댄 것처럼 클릭 수에 집착하고 있다 보면 문득문득 자괴감이 몰려왔다. 누리꾼들을 자극하는 기사를 줄줄이 써야 할 때는 특히 그랬다.

 “스타 열애설이 나잖아요. 그러면 끊임없이 관련 기사를 만들어내야 해요. 열애 상대가 누구인지에서 시작해 주변 연예인들 반응까지 무궁무진하게 기사를 만들어내야 하죠. 이렇게까지 계속 써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열애설 기사보다 더 어려운 게 자살 기사예요. 한동안 연예인 자살이 많았잖아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누리꾼들 반응이나 살피면서 기사 늘리기를 하는 기자들이 많았어요. 못할 짓이죠.”

 종종 회사 안에서도 모멸감을 느꼈다. “가끔 사회부에서 쓸 기사를 떠맡기도 했어요. 한참 비가 많이 올 때는 왜 비가 많이 오는지 쓰라고 하더라고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는다 싶어 보이면 이것저것 일을 시키는 식인 거죠. 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어디 어디 출입처 기자라고 타이틀이 있는데, 나는 온라인에서 낚시질이나 하는 기자로 취급받아요. 악플보다 회사 내부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클 때도 있었어요. 나도 기자인데, 기자한테 무시당하니까 당연히 싫죠.”

 이미 지나간 일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선 아직도 억울함이 묻어났다. 처음 기자가 되어 품은 설렘은 온데간데 없다. 후배들에게 검색어 기사만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검색어로 기사를 쓰다보면 사람이 참 단순해져요. 자기 생각이 없어지는 거죠. 실제로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정작 나중에 자기 글을 쓸 때가 오면 ‘어라? 기사를 어떻게 쓰는 거더라’ 하게 되더라고요. 나 기자 맞나? 이런 생각 하는 기자들 많을 거예요.”

 기사에 달린 ‘댓글’은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었다. ‘기자는 아무나 하냐’, ‘너 같은 게 기자면 나도 하겠다’는 식의 악플에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사진기자의 꿈

 대학 다닐 때는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면 어떨까’ 했다. 차은택 감독이 만든 이효리의 ‘유고걸’이나 빅뱅의 ‘거짓말’ 등이 한창 뜰 때였다.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했지만 틈틈이 동영상도 배웠다. 막연한 꿈이었다.

 그러다 한 신문사가 내는 월간지에서 인턴기자로 일하게 됐다. 대학 졸업 하기 전의 일이다. 현장을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일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진기자로 진로를 수정했다.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인턴 끝내고 선배들이 그러더라고요. 취업할 데 마땅치 않을 테니까 인턴이나 더 하라고. 그때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섭섭하게 들렸나 몰라요. 나는 어디 가서든 잘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인지 과감하게 그만뒀죠.”

 첫 직장은 청소년 연예 잡지였다. 신문사 등에서 사진기자 채용이 많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연예기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도 또래여서 팀워크도 잘 맞았다. 하지만 경영자가 사업을 너무 무리하게 확장해 잡지가 폐간되고 말았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월급도 3개월치나 밀린 상태였다.

 운이 좋게도 백수 생활이 길진 않았다. 막 창간한 어느 무가지에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메트로> 등 지하철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무가지들가 인기를 끌던 때였다. 김경희씨는 자신이 입사한 무가지에서 채용한 첫 사진기자였다. 정치·사회·경제 등의 지면에는 통신사 사진을 받아 썼다. 그는 연예면에 들어갈 사진만 찍으면 됐다. 회사 쪽이 연예면을 강화하기로 한 데 따른 조처였다.

 독자들의 눈요깃거리가 될 만한 기사의 비중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진과 취재를 병행하고 있었다. 취재기자가 가지 못하는 행사가 있으면 사진취재는 물론 기사도 써야 했다. 내친 김에 고정 섹션을 맡기도 했다. 연예 기사만으론 광고 수익을 올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화장품 등 뷰티 정보를 묶은 기획 기사를 쓰는 것도 그의 몫이 됐다.

 이 무렵만 해도 온라인보다는 지면에 싣는 기사 위주로 일했다. 다른 연예 매체들이 포털 사이트에 기사를 내보내기 위한 과열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일로 치부했다. “왜 저런 기사를 계속 써대면서 속보 경쟁을 하나 싶었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죠.” 2009년 경제위기로 광고시장이 침체되면서 그가 다니던 무가지가 폐간됐다. 몇몇 직장을 전전하다 옮긴 데가 바로 ‘연예 우라깡’에 시달려야 했던 그곳이다.

연예 매체의 클릭 경쟁은 누리꾼들의 기사 소비 행태와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정수성 의원(새누리당)이 지난 1월10일 오전 국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김황식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동안 인터넷으로 연예뉴스를 살펴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스카우트할 땐 다를 거라 했지만…  

 기자 생활에 회의가 들 때쯤,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언론계 선배의 소개로 다른 매체로 옮겼다. 취재팀장으로 오라고 했다.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책상에 앉아서 실시간 검색어 쓰는 거 말고 기획 기사도 많이 쓸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인터뷰도 많이 나가고. 정말 그런 줄 알았죠.”

 막상 옮기고보니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갓 문을 연 온라인 연예 매체였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 검색조차 되지 않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신생 매체의 최대 현안은 뉴스 검색 제휴 심사에 통과하는 일이다. 광고 수익과 직결되는 클릭 경쟁에 진입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셈이다. 이 회사도 그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어떤 매체는 ‘네이버’에 검색되기 위해 5년째 심사만 받고 있더라고요. 보통 1년에 한 번 검색 제휴 심사를 하는데 조건이 까다롭거든요. 특화된 콘텐츠가 있어야 하고, 기사 수도 많아야 해요. 그래서 네이버에 검색되기 어려운 매체들은 ‘다음’이나 ‘네이트’를 먼저 뚫으라는 말도 있어요.”

 정작 뉴스를 채울 기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취재팀장인 그 말고는 인턴기자 2명과 사진기자 1명이 전부였다. 연예 매체에서 인턴기자들을 싼 값에 돌려 쓴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온 터였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현장에서 당장 취재가 가능한 사람은 팀장 한 명뿐인 셈이다. ‘실검’ 기사를 우라까이하는 업무가 다시 반복됐다. 기사 수를 늘리려면 어쩔 수 없는데다 포털에서 뉴스 검색이 될 때를 대비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기자 출신이 아닌 경영관리직으로 입사한 직원이 정치·경제 분야의 통신사 기사를 우라까이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김경희씨는 종합 일간지 출신인 편집국장과 일하는 내내 부딪혔다. 신문 지면에서만 기사를 써온 국장은 검색어 기사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디 가야 실시간 검색어를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양반이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검색어 기사에선 육하원칙을 딱딱 맞춰 쓰지 않거든요. 예를 들면 <런닝맨>에서 어떤 연예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바로 기사를 써야 하는데 쓰는 방식이 다른 거죠. 국장은 방송사 이름과 프로그램 전체 이름을 먼저 써야 한다고 하고, 나는 검색어에 나온 단어 먼저 써야 한다고 하고. 우리는 첫 리드 문장이 중요하거든요.”

 하루는 가수 한혜진 결혼 건으로 다툼이 있었다. 배우 한혜진과 동명이인이었다. 다른 연예 매체에서 흔히 쓰는 수법대로 김경희씨는 ‘한혜진 결혼’으로 기사를 올리자고 했다. 배우 한혜진이 결혼하는 줄 알고 클릭하는 누리꾼들을 노린 속셈이었다. 일종의 ‘낚시질’이다. 하지만 국장은 ‘가수’라는 말을 이름 앞에 반드시 붙이자고 했다. 머릿속으론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만 답답했다.

 연예인들이 패션 화보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장은 왜 비슷한 사진을 그리 많이 올려야 하느냐며 제동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국장과 다투는 동안 인턴기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연예 뉴스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장이 답답했다. 김경희씨는 ‘아! 나는 이미 이 바닥에서 닳을 만큼 닳았구나’ 싶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인턴기자에 밀린 취재팀장  

 시간이 지날수록 사장의 횡포는 심해졌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 검색 제휴 심사에서 탈락한 게 도화선이 됐다. 회사 분위기는 금세 냉랭해졌다. 우선 사장은 국장을 거치지도 않고 기사 수를 늘릴 것을 강요했다. 기자 한 사람당 하루 30개 이상씩 기사를 올리지 않으면 퇴근을 못 하게 했다. 조기 출근해서 기사를 막아야 하는 당직도 신설됐다. 오전 7시에 출근해서 검색어 기사를 만들었다. 야근은 밥 먹듯이 계속됐다. 직장인들이 퇴근해 연예 뉴스를 클릭하는 그 시간을 준비하기 위해 밤늦도록 기사를 썼다. 저녁 시간엔 당번제도 없이 모두 남는 경우가 많았다.

 “사장이 귀가 얇았어요. 다른 매체에서 뭐 한다고 하면 우리도 하자고 해요. 점점 똑같아지려고 하더라고요.” TV 프로그램 리뷰 기사를 쓰도록 한 게 대표적이다. 처음 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갈 때는 그런 식의 기사는 쓰지 말자고 했던 게 사장이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나와서 한마디할 때마다 기사가 쏟아진다.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사장은 김경희씨의 사적 공간인 페이스북까지 관리했다. “포털에서 검색이 안 되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동원해서라도 홍보하라”는 다그침이었다. 그날그날 쓴 기사의 링크를 페이스북에 올려야 했다. 조금만 게을리하면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장이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뒤에야 사장의 의도를 간파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김경희씨를 그만두게 하고 그 자리를 인턴기자로 채우려는 심보였다. 인턴기자에게는 정부 지원금이 한 달에 60만 원가량 나왔다. 인턴기자의 한 달 급여는 120만 원쯤 된다. 결국 회사는 한 달에 60만 원만 주고 기자 한 명을 쓰는 셈이었다. 인턴이라고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싼 값에 검색어 기사를 만들어내는 데 동원한다.

 “제가 한 달에 220만 원쯤 받았는데 사장이 볼 때는 고액(?) 연봉이었던 거죠. 취재·교통비나 밥값도 안 나오기 때문에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취재팀장이 연예인들이랑 ‘언니 오빠’ 하면서 지내지 못한다는 뒷담화까지 하고 다니더라고요. 기가 막혔어요. 그 매체를 처음 만들 때 내 연예기획사 인맥과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서 안착시켰는데, 나중에 그런 식으로 버려지더라고요.”

 지난해 8월, 그곳을 나오면서 그의 기자 생활도 끝났다. 사실상 권고사직처럼 회사를 나온 뒤에 보니 이미 사장은 그의 국민연금을 두 달 전부터 내지 않고 있었다. “다들 너무 쉽게 온라인 매체에 뛰어드는 것 같아요. 네티즌들만 잘 낚으면 쉽게 돈 번다고 생각하는 건지. 처음엔 그래도 뭔가 다르게 시작하지만 결국엔 다 똑같아지는 거고요.”

 지난 1월 9일 강남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김경희씨. 언론과 무관한 다른 업계의 회사원이 됐지만 일은 여전히 고단하다. 퇴근이 늦어 밤 9시가 다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아직 못했고, 입술은 부르터서 안쓰러워 보였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며 그는 말했다. “피곤하지만 연예기자할 때보다 훨씬 나아요. 나는… 다신 기자 안 하고 싶다고 좀 써주세요. 혹시 <씨네21> 사진기자가 됐으면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요?”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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