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8 18:36 수정 : 2013.01.08 18:36

헝가리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 소설 <운명>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중략)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일은 나의 상처이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것을 통해 나는 영감을 얻는다.”

이 말은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내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면서 배운 모든 것(지식이나 기술)은 첨단기술이 넘쳐나는 남한의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아무 쓸모없을뿐더러 오히려 편견을 갖게 한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남들에게 가벼이 스쳐 지나갈 남북 간의 미묘한 문제들도 눈여겨 살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된다.

“태어나 보니 북한이었습니다.”

가끔 북한 사회나 북향민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하는 말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어쩌면 여러분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보다시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은 이렇게 엇갈렸습니다. 태어나보니 북한, 또는 남한이었던 거지요.”

“태어나 보니 북한이었습니다, 어쩌라고요”

‘분단의 사생아=북향민’이라는 등식이 자신의 처지일 수도 있다는 이 짧은 가정 앞에서 듣는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 않았을 테니까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부모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워낙 개방된 국제화 시대이다 보니 이중국적도 가능한 세상이지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명숙 북향민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