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9 02:45 수정 : 2012.12.29 02:49

가족의 탄생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동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는 동안 혼자서 나를 낳은 설움에 대해 종종 토로했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혼자서라도, 이 아이를 잘 키워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어머니에게 생겼던 것은. 서울 공릉동 시집에서 계속 부대끼느니 이혼을 불사하겠다는 편지를 보낸 뒤, 결국 분가해 어린 두 딸을 혼자 키운 어머니는, 알뜰한 ‘아내’ 역할과 현명한 ‘어머니’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 아버지에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써서 알렸다. ‘여보 이번 달 월급은 얼마 적금통장에 넣었고, 얼마는 이렇게 처리했어요. 그리고 아이가 벌써 말을 해요.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해요.’

 아버지가 중동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나름 괜찮아서 공릉동의 한 빌라를 살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원조 ‘기러기 아빠’들은 집을 사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가끔 신문 지상에는 남편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춤바람으로 날려버리는 부인들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월급을 알뜰히 모은 어머니 덕에 신혼이었음에도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아주 좁은 마당과 방 두 칸이 있는 집에서 방 하나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이 쓰고, 작은방 하나는 세를 내주었다.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자식을 잘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교육열은 각별했다. 없는 살림에 피아노, 미술, 수영까지 가르쳤으니. 내가 5살 무렵 아버지는 중동에서 돌아왔고 경상도로 발령을 받았다. 어머니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를 따라 지방행을 선택했다. 처음 의령에 가서 살 집을 구하면서 잠시 머무른 여인숙에서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쉰내 나는 이불을 덮고 누런 벽지를 멀뚱히 쳐다보던 나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낯설 뿐이었다. 이후 서울 집은 관리하기도 어렵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팔아버렸는데, 나중에 집값이 굉장히 올라 아버지가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언제나 한 발씩 뒤늦은 것이 부모님의 재테크 역사였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강유가람 다큐멘터리영화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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