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9 02:07 수정 : 2013.01.22 18:37

장백관 유로자전거나라 대표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어느 날, 스무 명 남짓 관광객들이 이탈리아 로마의 포로로마노(로마 공회장) 입구 계단에 둘러앉았다. 모두 귀에는 이어폰이, 목에는 수신기가 걸려 있다. 유로자전거나라의 김민주 지식가이드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자, 모두 시선을 고정시킨다. “줄리어스 시저가 20대 초반 변호사를 하던 시절 바로 저 건물에서 일했어요. 그때 그가 다룬 소송이 뭐냐면….” 60대 할아버지부터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숨 죽인 채 그녀가 들려주는 로마 이야기에 빠져든다.

 ‘지식가이드’는 유럽 여행을 직접 준비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낯선 개념의 투어 가이드다. 자신이 직접 항공과 숙박을 정하는 개별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한다.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하루 종일 핵심 유적지와 박물관 등을 돌며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는 식이다. 비용은 입장권과 교통비 등 실비를 제외하면 5만~6만 원 수준으로 저렴하다. ‘수박 겉핥기’식 설명에 억지로 쇼핑센터를 들러야 하는 패키지 투어에 질린 여행자일수록 만족도가 높다.

 포로로마노는 2000년 3월 장백관(48) 유로자전거나라 대표가 지식가이드를 만들게 한 장소다. 무려 1천 년 동안 고대 로마의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던 역사의 현장이다. 장 대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돌 무더기가 뭔지도 모르고 사진만 찍고 가는 여행자들이 안타까워 지식가이드를 시작했다. 지금은 유럽 7개국 주요 도시로 확대됐다. 장 대표 혼자던 가이드 수도 47명으로 늘었다.

 지난 11월 1일 서울 마포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사업으로 구상하기까지 그의 인생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했다. 지난여름 로마에서 만난 김민주 가이드의 시저 이야기보다 조금 더.

 #인생 1막, 지도만 봐도 두근두근하던 시절 

 “어릴 때부터 역마살이 있었던 거 같아요.” 장 대표는 자신을 이렇게 말했다. 여행으로 밥벌이할 기질이 다분했다. 지도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사회 시간에 각국의 수도 이름을 죄다 외워 선생님에게 사탕을 받은 기억도 있다.

 그는 굴곡 많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털어놨다. ‘나 이런 사람’이라는 걸 먼저 보여주려는 건가 싶었다.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처럼 자랐다. 당시 유명 가수들의 밴드마스터였던 아버지는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고, 양어머니와는 한 번도 살갑게 정을 나눈 적이 없었다. 집을 나와 길거리를 전전하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결국 그는 고아들이 머무는 시설로 보내졌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좁은 방에서 40명이 칼잠을 잤다. 군대에서 많이 하는 PT(체력훈련)체조를 그때 배웠다. 늘 배가 고팠다. 이 사회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별별 추억이 다 있다. 하루는 미군부대에서 크리스마스라고 위문품을 보내왔다. 빨간 게 잼 같아서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콜게이트 치약이었다. 그걸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너무 고생했기에 잊을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11살 되던 해에 장 대표는 미국 알로이시오 슈워츠 신부가 개원한 ‘서울 소년의 집’(현 서울시 꿈나무마을)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를 제대로 다닌 것도 그때부터다. 소년의 집은 자체 교육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종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소년의 집에서도 가끔 여행을 하고 싶어서 가출을 감행했다. 일단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몰래 타고 의자 사이로 쏙 들어가 있으면 무임승차가 가능했다. “붙임성이 좋아서 식당에 들어가 배고프다고 하면 다들 차려주더라고요. 정 급하면 노점하는 아주머니들한테 배고프다고 하소연했고요.”

 이런 식으로 틈틈이 지방 도시를 돌아다녔다. 섬만 빼고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보았다. 문제는 여행을 마치고 소년의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원장 수녀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눈에 선했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까지 여행이 좋은 이유는 뭘까. “떠나보면 모든 게 새롭더라고요. 온전하게 느낀 자유로움이랄까.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좋았어요. 도시마다 억양이 다른 사투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죠.”

 장 대표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길게 들려준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상상도 못 해볼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철들고 나서 웬만한 일은 고생스럽다고 여기지 않게 됐다는 거죠. (웃음)”

 #인생 2막, 이태원 DJ, 지식가이드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소년의 집을 나온 장 대표는 부산 동아대에 입학했다. 대학마다 운동 잘하는 학생을 뽑기 위해 소년의 집으로 찾아오던 시절이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좋아한 그도 대학 농구팀의 선수가 됐다.

 농구 선수는 오래 하지 못했다. 소질도 없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중퇴한 뒤로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은 클럽 DJ 할 때다. 서울 이태원의 한 클럽을 다녔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DJ들이 연예인급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기획사도 잘 만난 편이었다. 당시에는 레코드판을 많이 갖고 있어야 좋은 DJ가 될 수 있었는데, 기획사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 양반, ‘판전쟁’이라고 들어봤어요? 미국 빌보드차트 인기곡을 누가 먼저 틀어주느냐가 관건이었죠. DJ들이 판을 수백 장씩 들고 다니던 때라서….”

 1980년대가 지나고 나니 음악계 판도가 확 바뀌고 있었다. DJ들이 유명 가수의 매니저로 나서는가 하면 아예 기획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주변 DJ들은 변화 흐름에 동참해갔지만 장 대표는 오히려 일을 그만뒀다.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금융 회사에 입사했다. 서른 셋이 되던 해였다. 카드영업을 했다. 남들보다 잘했다. 어릴 때부터 붙임성이 좋았기 때문에 누구한테든 말을 잘 걸었기 때문이다. 도시만 기웃거리지 않았다. 지방도시의 공단 같은 곳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형님” 하면서 고객을 늘렸다. 실적이 좋으니까 승진도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승진은 이른바 지점장 라인에 줄을 선 사람들이 먼저 됐다. “어느모로 보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탈락하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지점장을 찾아가서 왜 그렇게 된 건지 물었는데 안 좋은 소리만 듣고 나왔어요. 말다툼 좀 벌이다 그냥 사표 썼어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여행’은 필수코스였다. 지금 묶여 있는 데서 해방되는구나 싶으면 여행부터 떠났다. 지금까지 그는 50여 개국을 다녔다. 10대에 국내 주요 도시를 돌아다닌 데 이어, 20대엔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 국가를 섭렵했다. 30대를 거치면서 여행지는 유럽과 북미 대륙, 중남미 등으로 넓혔다.

 1995년 첫 유럽 배낭여행에선 어설픈 초보 가이드가 돼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프랑스에서 투어 가이드로 변신한 모습을 보게 됐다. 나도 한번해보자 싶었다. 선배가 일을 나간 동안 무작정 샤를드골공항 입국장으로 나갔다. 한국 여권이 보이는 사람들이 나오면 무턱대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다른 수고비 필요 없이 식사만 제공해주면 유명 관광지를 안내해드리겠다고 했죠. 말 그대로 길만 안내했어요. 에펠탑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고, 시내 한식당은 어디가 좋은지 소개하는 식으로. 하루 벌어 하루 여행비를 모으는 식으로 얼마간 했는데, 참 재밌더라고요.”

 마지막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서 떠난 여행이 장 대표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됐다. 꿈을 펼치기로 작정한 곳은 이탈리아 로마였다. “로마에 세 번 정도 갔는데, 갈 때마다 아쉬움이 들더라고요. 얼핏 보면 돌 무더기밖에 없는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알 길이 없고. 박정희 정권 때는 <로마사>가 금서였다고 해요. 로마사를 알면 정치가 보인다고 금지했다죠. 아무튼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또 가고 싶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유일한 낙이자 꿈이던 여행은 결국 장 대표의 직업이 됐다. 2000년 3월 유로자전거나라를 만들기까지 그는 1년 이상 로마만 파고들었다. 역사와 미술사, 종교사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정리했다. 저렴한 한인 민박에 숙소를 잡고 현지 교민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패키지 투어가이드들을 쫓아다니면서 질문을 던졌다. 궁금증을 온전히 채우려면 더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가이드하면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었다.

 가이드는 장 대표 한 명뿐이었지만 일반 투어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프로그램을 짰다. ‘지식가이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에게 1인당 1만5천 원씩만 받고, 하루 종일 로마를 안내했다. 콜로세움만 해도 1시간 이상 머물면서 여행객들이 마치 고대 로마에 온 것처럼 설명해줬다. 건축 배경과 건축 기법, 당시 시대상황, 검투사들의 생활상 등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처음엔 자전거 20대를 사서 투어를 신청한 여행객들에게 제공했다. ‘자전거나라’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시작은 좋았지만 자전거를 계속 도둑맞았다. 유적지에 갔다 오는 사이에, 투어가 끝난 밤 시간대에 자전거가 하나둘씩 없어졌다. 6개월 동안 자전거값을 계속 대느라 돈은 하나도 벌지 못했다. 어느 날 튼튼한 자물쇠를 톱으로 잘라서 들고 간 걸 보고 더 이상 자전거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지금도 간혹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 투어를 신청해도 되느냐”는 문의를 받지만 회사명은 그대로 뒀다. “그때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여행객을 모았는데, 한번은 한국에서 ‘정모’(오프라인 정식 모임)를 했어요. 자전거 때문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대신 사람을 얻었구나 싶더라고요. 그때 모인 분들이 비록 자전거가 없어도 회사 이름을 바꾸지 말라고 했어요.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새로운 여행의 길을 개척하라는 의미에서요.”

 ‘지식가이드하면서 1천 명과 인연을 맺자’는 목표를 세운 것도 이 무렵이다. 여기서 ‘인연’은 자신의 장례식에 와서 슬퍼해줄 수 있는 정도로 정했다. 장 대표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인생의 동반자도 투어에서 만났다.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비행 온 김에 투어를 신청한 아내는 장 대표의 열정적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장백관 유로자전거나라 대표

 #인생 3막, 로마 경찰에 33번 끌려 간 이후 

인터넷 카페를 통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투어 신청자가 폭주했다. 이듬해 2001년부터는 직원을 늘려야 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항공권과 체제비 등을 모두 제공했는데, 한두 달 일하다 그만두는 가이드들이 많았다. 오래도록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축적된 정보와 경험 등을 두루 갖춰야 하는 지식가이드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항공권과 체제비 등을 자비로 하고 만 1년간 일한 시점에서 비용을 모두 보상해주기로 했다.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니 이 일을 꼭 원하는 사람들만 찾아왔다. “초창기 뽑은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웬만하면 환갑 때까지 같이 일하자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가장 큰 난관은 관광업에 대한 현지 국가들의 엄격한 규제였다. 프랑스 등 유럽국에서는 관광가이드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다. 자국 산업 보호 차원에서 외국인에게는 가이드 자격을 주지 않으려는데다 법인을 내는 데 필요한 조건도 까다롭다. 유로자전거나라는 7년여 만에 이탈리아와 체코, 스페인에 법인을 둘 수 있었고, 나머지 나라에는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장 대표는 “패키지 투어 가이드들이 버스 안에서 설명을 많이 하는 것도 불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장 대표 또한 가이드를 전담 감시하는 관광경찰에게 여러 번 끌려갔다. 2000년 처음 지식가이드를 시작할 때 로마 관광경찰서만 무려 33번이나 잡혀갔을 정도다. “내가 하도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니까 하루는 서장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로마를 한국 사람들한테 많이 알려주고 싶다. 도와달라’고 했죠. 여러 차례 나를 지켜보던 서장이 유적지에서 이탈리아 로컬가이드를 대동하면 허락해주겠다고 했어요. 근데 비용이 너무 비싼 거예요. 반나절에 200유로였으니까. 내가 하도 난감해하니 이번에는 은퇴한 관광가이드를 소개해주더라고요. 30유로만 주면 될 거라고 했어요. 5개 국어를 하는 박사급 할아버지 가이드였는데, 어찌나 아는 게 많은지, 이분한테 많이 배웠어요.”

 창업 첫해 1천 명(연인원 기준)에 그치던 투어 참가자 수는 지난해 7만2500명으로 늘었다. 로마에서만 하던 투어도 유럽 주요국의 고대와 중세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 등으로 늘렸다. “처음엔 박물관을 하루 종일 투어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근데 내 생각은 달랐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육열이 대단하고 지적 욕구도 높거든요.”

 개인 여행자들의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투어도 갈수록 세분됐다. 한 예로 스페인에선 ‘가우디 투어’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가우디의 대표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 공원, 카사밀라와 카사바트요 등을 죽 둘러본다. 100년 전 보수적인 시대에 활동한 가우디가 어쩌다 시대를 앞서가는 충격적 건축물들을 남기게 된 건지, 완공까지 아직 120년이 남았다는 미스터리한 건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었다.

 지식가이드가 인기를 끌자, 대형 여행사들이 유사 모델을 론칭하는 등 비슷한 방식의 투어들이 생겨났다. 유로자전거나라를 아예 50억 원에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있었다. 장 대표는 “제대로 된 경쟁 업체가 두 곳 이상은 나와야 여행업계 전체에도 의미가 있을 텐데 다들 오래 못 버티더라”고 말했다. 엄청난 양의 책읽기와 교육을 거친 양질의 가이드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이드에 대한 대우도 각별하다. 최고참 가이드의 연봉이 1억천만 원 수준이다.

 각별한 대우를 받는 만큼 지식가이드가 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까다로운 전형을 거쳐 가이드로 선발되면 일단 서울에서 두 달간 집중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역사와 미술에 대해 대학원 수업 방식으로 한다. 과제를 내주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식이다. 현지에 투입돼서는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여섯 달에 걸쳐 각 지역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 교육이 끝나면 현장에서 한동안 보조 가이드나 부분 가이드 생활을 한 뒤에야 정식 가이드가 된다.

 유로자전거나라는 내년 3월 주식회사 전환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각국 가이드들이 축적해온 지식과 정보를 한군데 모아서 오픈할 계획도 있다. 그러면 투어 신청이 줄어들지 않을까? “바티칸시티에 최초로 한국어 오디오 서비스가 시작됐을 때 제가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기계가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거라고. 결과도 그렇더라고요. 결국 여행자들은 사람에게 설명을 듣기 원하거든요.”

 요즘도 장 대표는 가이드 여행을 떠난다. 유명 여행사에서 VIP 고객의 개인 투어를 의뢰하거나 장 대표에게 가이드 받은 적이 있는 이들이 특별히 부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도 단골 손님이 있거든요. 아주 친해져서 가이드로 동행하기보다 같이 놀러 가는 거죠. 다니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웃음).”

 몇 해 전에는 한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족이 가이드를 의뢰했다. 열흘 동안 이탈리아 일주였다. 이 CEO는 한식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한식당이 없는 지역에선 밥을 굶어야 할 정도였다. 나머지 가족들이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 동안 장 대표는 ‘뽀글이’(봉지 라면)를 끓였다. CEO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아주 좋아하기에 비빔면을 하나 더 만들어드렸고 호텔에 가서는 전기쿠커에다 밥도 해드렸죠. 정말 맛있게 드시더군요. 여행을 마친 뒤 이분의 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주방에서 뽀글이를 만들고 계신다는 거예요. 추억을 하나 만들어드린 거죠.”

 역마살로 점철된 그의 삶에서 제대로 남긴 건 돈이 아니라 사람과 추억이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