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2:05 수정 : 2014.07.03 11:16

합계출산율 6명에 육박하는 196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이 시대의 어머니들은 당신의 인생보다 가족의 인생을 위해 헌신해왔다. 베이비붐 세대는 동기간의 차별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장남은 학교로, 딸은 공장으로 가는 엇갈리는 경로는 그 시절 흔한 풍경이었다. 한겨레 자료, 인물과사상사 제공
이 글은 같은 주제로 여러 사람을 인터뷰해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는 각 인터뷰이마다 따로 진행했으나 편의상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재구성했다. 대화는 발화자의 구분 없이 번호로 표기했다. 자칫 민감한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 어머니, 동생들 키운 누나

1. 오늘은 불우함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계획한 날이다. 먼저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다. 여러분은 ‘에코 세대’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통계청에 따르면, 에코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 세대로 1979∼92년에 출생한 연령인구집단을 가리킨다. 이 기준은 통계청이 1955∼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를 어머니로 둔 인구집단을 추출해 설정한 것이다.

2. 들어본 적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에코 세대의 첫째들에 가까운 세대인가(1979~81년생의 인터뷰이를 모았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자.

3. 할아버지의 부인이 2명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 사이에서 5남매가 태어났다. 첫째아들, 그러니까 내 큰아버지가 일찍 일을 시작해 동생들을 키웠다. 할아버지는 결혼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한량도 부인을 2명 두는 시대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찬다. 전쟁 전에는 서울에서 그래도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는 것 같다. 전쟁통에 형제들을 잃고 가세가 기우니 큰아들을 겨우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자식들 사정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셋째였는데 국민학교만 나와 일을 시작했다. 배운 게 없으니 첫 일자리는 날품팔이였다. 돈을 좀 모아서 가게를 차리고 싶어도 별다른 기술이 없다보니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고 한다.

4. 나도 할아버지가 부인을 여럿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경우가 꽤나 흔한 것인가? 우리 할아버지도 별다른 직업이 없는 한량이었는데 자식을 많이 둔 덕에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었다고 한다. 잘 이해가 안 돼 기껏 떠올린 것이 할아버지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자원을 모으는 일꾼을 생산하는 것처럼 자녀들을 낳았나 하는 정도였다. 지금으로선 말도 안 되는 발상 아닌가.

5. 시골이라 그랬겠지. 농사짓고 살려면 일손이 필요하잖아.

6. 글쎄. 아무튼 당시 출산율은 거의 자연출산율에 가까웠다고 한다. 1960년 합계출산율이 6명이었다. 그렇게 출산율이 높았던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베이비붐 세대다. 부연하자면 에코 세대의 ‘에코’는 메아리라는 뜻이다. 우리는 합계출산율이 2명 안팎인 시대에 태어났는데도 부모 세대가 많다보니 인구가 많다. 인구로 보면 우리는 부모의 메아리 같은 것이다.

7. 우리 부모들은 동기간이 많은 것에 데어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은 걸까. 조부모들은 자녀를 많이 낳았지만 자녀 교육에는 무관심했다. 무관심이라기보다 역부족이었을까.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와 서울의 상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8. 어머니 형제자매는 여섯이었다. 딸 둘에 아들이 넷이라 두 딸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국민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장에 들어가거나 동네 가게에서 일했다. 그래도 남자 형제들은 교육을 시킨 모양이다. 장남은 대학을 나와 고시에 도전했다 실패했지만 대기업에 들어가 지금은 부장이 되어 잘살고 있다. 둘째는 공부에 뜻이 없어 고등학교를 마친 뒤 지금은 운수업을 한다. 막내는 군대에 말뚝을 박았다.

9. 당시에는 딸을 낳아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고 곧장 공장이나 가게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는 경우가 흔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195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어머니가 일할 수 있는 나이쯤 되던 1968년에 구로공단이 생겼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서울과 경인 지역의 주요 경공업 지대에 낮은 학력의 베이비붐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10.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도 악명 높았지만 그나마 돈을 모으려고 해도 형제자매가 많아 어려웠던 모양이다. 어머니도 돈을 벌어 집에 가져가면 생활비와 남동생 학비에 들어가곤 했다고 말씀하신다. 남동생은 대학을 나와 잘살고 있는데 어려울 때 전화 한 통 없다며 서운해하셨다. 돈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학벌은 아니다. 동생이 대학을 나왔다고 어머니에게 좋은 게 뭐 하나 없다. 그때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자기 앞으로 저축했다면 인생의 경로가 달라졌을 것이다.

11. 그렇다. 당시 대학을 나왔다는 건 대단한 이점을 가진 것이었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대학 나온 아버지를 둔 친구들은 나와 생활수준이 전혀 달랐다. 나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는데 친구 어머니에게 그림을 배운다며 종종 친구집에 가곤 했다. 친구네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는데 거실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빨간색 엑셀 승용차가 있었고, 그 차를 얻어타고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친구 아버지는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다.

12. 어머니는 고등학교 동창 대여섯 명과 지금도 친구로 지내시는데 그중 2명이 대학교수라고 한다. 친구들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이 반이니 대학생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친구들이 모여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데도 대학교수 2명은 자기가 먹은 음식값도 내지 않는다며 혀를 내두르시더라.

13. 워낙 대접받는 데 익숙해서 그런가보다. 앞으로 어머니께 그 친구들 만날 때는 싼 것 드시라고 말씀드려라.

14. 2010년 인구총조사를 바탕으로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2012년 8월2일치) 가운데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 정도별 현황을 보면 고졸이 44.7%로 가장 많고, 중졸 17.3%, 대졸(4년제) 15.8% 순이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남성 비율도 높아진다. 4년제 대학을 나온 베이비붐 세대 남성은 70만9천 명인 데 비해 여성은 38만6천 명이다. 석사는 남자 16만8천 명, 여자 6만3천 명이다. 반면 중졸은 남자가 46만1천 명, 여자가 73만9천 명이고 고졸은 남자 148만9천 명, 여자 161만7천 명이다.

15. 어머니는 국민학교만 마치고 돈을 버느라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어 늦게나마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아마 저 통계에는 고졸로 잡히지 않았을까.

16.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가 주목받고 있지만 과연 양극화가 새로운 현상인지 의심스럽다. 우리 부모 세대를 보면, 어려서 가정 형편이 어려우면 동기간에도 교육과 소득의 양극화가 흔했던 것 같다. 도식적으로 보면, 6남매 중에 대학에 진학한 1명과 나머지의 처지가 극명하게 갈린다. 더구나 이 대학생 1명을 배출하는 데 다른 동기간의 도움이 있었다면 격차는 시작 단계부터 더욱 벌어진다. 가정이라는 공동운명체가 과연 우리 조부모들의 생각과 같이 작동했을까. 이같은 가정 내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가족 단위 구조조정으로 실행된 측면이 있다.

다자녀 간 차별화의 종식, 가족계획

17. 그로 인해 우리 부모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즈음에는 삶에서 두 가지 정도 교훈을 얻고 실천했던 것이 아닐까. 첫째, 자녀는 적당히 낳아야 한다. 둘째, 자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차별적으로 분배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 사회 시스템을 ‘자식 농사’라는 알레고리로 파악한 것이 아닐까. 자녀를 대여섯 명씩 낳던 시절에는 모두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꾼이지만 이제는 자식을 잘 길러 수확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18. 1961년 군사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가족계획사업을 첫 번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할 것을 의결했다. 가족계획사업이란 산아제한정책을 의미한다. 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이 1964년이니 베이비붐 세대는 전후 가족계획사업 사이에 태어난 세대다.

19.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같은 구호가 떠오른다.

20. 그것은 1970년대에 나온 것이다. 1960년대의 구호는 더욱 노골적인데, 유명한 것으로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가 있다. 보릿고개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니 어떻게서든 인구 증가를 막고 싶었던 것이다. ‘3, 3, 35운동’이라는 것도 있다.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살 이전에 단산하자는 운동이었다.

21. 가족계획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8년에는 합계출산율이 4.2명으로 떨어지더니 1970년에는 3.9명, 1984년에는 2.1명이 되었다. 이때가 인구를 현상 유지할 수 있다는 인구대체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한 분기점이다. 1990년에는 1.6명으로 떨어지고 지난해에는 1.19명이었다. 우리 세대가 대개 두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평균 자녀 수가 2.04명이니 우리 부모들이야말로 핵가족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자녀 2명이 63.9%, 1명이 15.5%, 3명이 15.2%를 차지한다.

22. 아, 저출산 고령화!

23. 베이비붐 세대는 합계출산율 3명 이상에서 태어난 세대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는 1955∼74년에 태어난 세대다. 만으로 40대 이상이다.

24. 선거 때마다 인용될 만한 수다.

25. 우리는 동기간에 구조조정을 경험했던 세대가 자발적으로 출산을 조정해 생긴 세대다. 그리고 자녀들 간의 차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자 자기 자녀를 다른 집 자녀와 차별화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다.

부모님 교육열에 경쟁 내몰린 에코 세대

26. 대학 교육을 차별화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에코 세대는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이 50%에 육박한다. 2년제까지 합치면 75.5%가 대학을 나왔다.) 대학은 나와야 사람 취급 받는다는 생각이 굳어진 것도 우리 세대에 이르러서 아닌가. 차별화라면 서울대를 필두로 하는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유학을 다녀오는 것에 더 가까울 듯하다.

27. 서울의 고등학교는 대부분 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자리 싸움은 대학입시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과거의 명문고 대신 특목고 입시라는 게 생겼다. 경기도는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기 때문에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가 많았다. 일산의 백석고나 분당 서현고 같은 곳은 모의고사 때마다 들어서 알고 있다.

28. 모의고사 하니까 생각나는데, 교실 게시판에 다른 학교의 모의고사 평균점수를 붙여두었다. 강남에 있는 단대부고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준화 지역인 서울이라 하더라도 강남 8학군은 유명했다.

29. 나는 강북에서 상위권이었는데 대학 때 만난 강남 출신 친구들은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애들이었다. 격차라는 게 진짜 있구나 실감했다. 대치동 학원을 다녀본 사람은 여기에 없나? 학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중학교 때 잠깐 과학고 입시를 준비한 적이 있다. 강북의 작은 학원에서 준비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베껴와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이라는 문제지를 풀었다. 그런데 정작 시험문제는 <수학의 정석>에서 그대로 나왔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처음 <수학의 정석>을 보고 안 사실이다. 선행학습이란 게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30. 나는 8학군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치동은 멀기도 해서 주로 과외를 받았다. 영어와 수학 2개를 했다.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니 자연스럽게 과외 선생이 되었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과외가 들어왔다. 좀 벅찰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

31. 나는 과외 자리를 구하려고 꽤나 노력했는데 과외비가 쌀뿐더러 애초 수요가 별로 없었다. 내가 강북에 살아서 그런가.

32. 그런 게 차이라는 거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학벌의 자리 다툼도 있지만 서울 안에서 지역이라는 자리 다툼의 영향도 크다. 집값부터 다르지 않나. 학벌과 지역의 서열에 민감하게 된 것도 역시 우리 부모 세대의 특징일까.

33. 글쎄, 잘 모르겠다. 강남 집값이야 우리에겐 2000년대 중반에 뒤늦게 깨달았던, 좀 느닷없기도 하고 속절없기도 한 현실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우리 부모님은 철마다 집세에 맞춰 이사를 다니느라 정신없었는데 집값이나 부동산 투자에 대해 달리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관심을 가지려면 그 동네에 살거나 최소한 자기 집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34. 우리 부모님은 관심이 있었지만 헛다리 짚은 경우다. 서울에서 살 집을 알아보는데 앞으로 유망한 아파트를 뒤로하고 산이 가깝고 공기 좋은 곳의 빌라를 사셨다. 초연한 듯하시지만, 당시엔 그렇게까지 격차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35. 회사에 들어가 장래 계획을 세울 즈음에는 이미 아파트 가격이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울 만큼 뛰었다. 그래도 2004년 무렵에는 청약통장을 만들고 분양 소식에 관심을 가져보려고도 했지만, 대세는 펀드였지. 정기예금 금리가 너무 낮으니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우리 부모들처럼 재형저축이 있었다면 당연히 저축했을 것이다.

36. 아, 그 반토막 난 펀드? 고성장·고금리 시대에나 20~ 30% 금리의 저축상품이 나오지 저성장·저금리 상황에서는 주식 같은 자산 가격이 오르는 것 아니겠나.

37. 펀드와 변액보험 같은 상품은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정도로 흔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퇴직 선배라는 분이 찾아와서 변액보험 가입을 권유했다. 나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양했는데 당시 다른 선배들은 꽤 가입했다. 그때 보험 팔러 온 선배를 보면서 이 직장의 비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했는데…. 뭐, 그때 알았더라도 별수 있었을까 싶긴 하다.

38. 그러니까 말이야. 이과로 대학에 갔다면 삼성전자를 노렸어야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천지 차이라는 걸 몰랐나.

39. 막연히는 알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았는데 좀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는 뭔지 모를 낙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나. 그래도 대학 나오고 기술이 있으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부자는 아니더라도 부모님보다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그때는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직업보다 창조적이고 폼나는 직업을 꿈꾸기도 했다.

40.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1990년대였다. 사실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TV 속의 세상이었는데, 우린 그 환상을 참고해 학창 시절을 보낸 거지. 1990년대의 10년 동안 대학 정원은 2배가 되고 외환위기로 아버지들이 잘리거나 사업이 망해갔는데도 아뿔싸, 이게 아니구나 깨닫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41. 우리는 그렇다 쳐도 부모님도 전국 대학을 소개하는 입시안내 책자가 이렇게 두꺼워도 되는지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점수에 맞춰 들어갈 수 있는 대학과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대학을 알아보기에 바빴지. 에코 세대의 첫째인 1979년생이 98학번이니까 1990년대의 대학 정원 확대는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된 덫 같다는 생각이 든다.

42. 대졸자가 흔해지니 값이 싸지는 건 당연했다. 내 주변에서 가정을 꾸리고 가장 목표치에 근접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군인이다. 부모님이 집을 마련해줄 형편이 되지 않더라도 군인은 사택이 나오니까 일단 집 걱정을 더는 것이다. 벌써 자녀가 셋이다.

43. 삼성전자 커플이 보너스를 몇 년 모아 경기도 수원의 아파트를 장만했다는 이야기 다음으로 감동적이다. 사실 내 주변에도 공무원끼리 만나 결혼하는 경우가 다른 고소득 전문직이나 부모가 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장 안정적으로 보였다.

가족 간 차별, 사회적 차별로 재현

44. 대학에서 대기업으로 가지 못하면 본전 뽑기가 힘들다. 얼마 전 뉴스에도 나왔지만, 실업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고 취업준비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45. 실업률 통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졸업을 연기하기도 한다. (농담이다.)

46. 재학생이어야 공채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겠지만, 우리 회사에 몇 달 왔다가 가는 파견사원들을 보니까 취업 준비에 목매는 게 이해된다. 그 사람들은 계약이 끝나면 바로 다른 일이 생기기는 하나.

47. 파견직 같은 비정규직을 꼭 나쁘게만 봐야 하나. 물론 우리가 파견직을 쓰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덕분에 고용이 늘어나는 효과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회사에서 출산휴가나 휴직에 대비해 더 많은 인원을 고용할 수는 없다. 그것보다는 주먹구구로 운영되는 파견회사가 정상화돼야 한다. 인력 관리는 제대로 하는지, 교육 프로그램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저 우리의 클레임이 있을 때만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이다. 그러면서 수수료를 20%나 떼간다.

48. 그렇더라도 같은 업무를 하는 정규직과 최소한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파는 것은 노동력이지 우리의 신분은 아니다. 같은 상품에 같은 가격을 매기는 것이 시장질서라고 한다면 그게 합리적인 것 아닐까. 오히려 유동적으로 일하는 위험을 고려하면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안정적이지만 더 낮은 임금과 불안정하지만 더 높은 임금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제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분제다.

49. 같은 가방이라도 누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그걸 브랜드 가치라고도 한다. 우리가 그동안 노력하고 획득한 성적과 학교, 입사시험 등이 모두 이를 위해서다. 자신이 노력한 결과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부모가 진행한 차별화 전략이 의미하는 것이다.

50. 사실 파견직도 199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신분에 가깝다.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파견노동을 합법화하기 위해 애써왔다. 노동부는 처음에 회의적이었지만 1993년 일본 법안을 그대로 참고한 ‘근로자 파견 사업의 적정한 운영 및 파견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파견직 합법화를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1998년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신분이다. 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비정규직이 정규직 규모를 넘어섰다. 이같은 신분제가 계속되면 집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취업 준비 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51. 대학에서 뜯기고 비정규직 확대로 장래성이 없고 외환위기로 부모가 망하고…. 우린 그 좋았다는 1990년대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웃음)

52. 집안 사정은 괜찮은가. 베이비붐 세대의 절반 이상(57%)이 경상소득 3천만원 미만의 저소득층이고, 이들은 교육 수준이 낮아 임금도 낮은 산업에 종사한다는 금융연구원의 조사가 있다. 게다가 자영업 비중까지 높다. 이제 은퇴가 본격화하면 자영업 유입이 더 늘어나 그나마의 소득도 줄어들 여지가 크다.

53.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우리 세대가 제대로 취직하지 않고 버티면서 값싼 아르바이트 인력을 대규모로 공급한다는 사실이다.

54. 베이비붐 세대가 자영업을 하고 에코 세대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면 자영업은 누가 먹여살리나.

55. 이러니 그 자녀들인 우리가 제대로 된 직장이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다. 부모의 운명은 급속도로 내리막길인데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못한다면 가계의 앞날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부모의 재산과 능력이 충분하다면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 위해 취업을 유예할 여력이 더욱 커지는 점도 있다.

56. 2013년 가계금융복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노후 대비 여력을 판단할 수 있는 순자산 규모는 평균 3억4천만원 수준이지만, 중앙값은 2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2인 가구 평균생활비의 80% 선에서 추정한 노후대비자금 3억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70% 가까운 베이비붐 세대 가구가 이에 미달한다. 게다가 보유 자산 중 70%가 부동산이고 이 중 대부분이 주택이다. 그나마 주택이 없는 경우도 4분의 1이나 된다.

57. 거기에다 에코 세대의 80% 이상이 미혼 상태이니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줄줄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부모가 퇴직하면 저 자산을 담보로 자기들이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할 것 아닌가.

58. 결혼은 무슨…. 결혼하면 불행해진다. 부모님과 함께 오손도손 살면서 힘든 세상을 잘 버텨보자. 어차피 부모님들은 젊었을 때의 경험을 근거로, 제대로 된 직장을 갖고 전세금이라도 마련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자녀의 결혼에 회의적일 것 아닌가. 빈곤이 결혼을 막아준다지만 이미 우리는 온 가족이 가난한 결혼에 저항하고 있다.

59.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많은 형제를 둔 가계의 부작용을 체험한 베이비붐 세대는 적극적인 가족계획을 통해 핵가족 형태를 확립하고 자녀 교육만큼은 제대로 시키고자 했는데, 다자녀 가계의 차별이 에코 세대에 이르러 사회적 차원의 차별로 재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60. 그래서 우리의 결혼 거부는 제2차 가족계획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지.

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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