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35 수정 : 2014.05.02 15:41

나는 혼자 산다. 사는 곳은 도심이다. 큰 도로와 조금 떨어진 도심의 아침은 조용하다. 이곳은 대개 아침에 사람들이 도착하는 곳이지 출발하는 곳이 아니다. 건물들 사이에서 뜨는 해는 유리벽에 반사돼 눈을 어지럽힌다. 전보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집을 나서 조금만 가면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과 약간 밀린다 싶게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가 기다린다. 아침 준비가 길어졌다면 버스를 타겠지만 계획대로라면 1시간 조금 못 되는 거리를 걸어서 출근한다. 도보 출퇴근은 오랜 꿈이었지만,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게 된 뒤 도심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느닷없는 모습을 하고 등장해 과거와 이름만 똑같다는 하천의 정체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직장까지 이어진 청계천변 산책로는 더없이 좋은 길이다. 도로에서 1층 높이로 내려앉은 산책로에는 계절마다 다른 그림자와 눈부심이 있다. 산책로 주변을 감싸는 육중한 돌 사이로(물론 얇게 저민 돌을 콘크리트 옹벽에 붙인 거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때로는 옹기종기 심어진 각종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다. 청계천이 복개를 뜯고 도로 한가운데로 돌아온 덕에 차가 마음껏 다니기에는 좁아터진 청계로는 차가 가득 차도 그다지 번잡스럽지 않다. 내가 걷는 1층 아래의 산책로에선 말이다.

사람과 외곽 동네서 나는 ‘밥 비린내’

도심에서는 밥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타인과 타인이 만나는 곳, 누구나 혼자인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뭐든 1인분이 기본이다. 식품의 단위가격은 비싸지만, 못 먹고 버리는 음식이 줄어드니 오히려 싼 편이다. 그런데 가족을 배경으로 한 밥 비린내가 없으면 다른 냄새는 있는 걸까.한겨레 박승화
낭만에 치우친 감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간단히 돈으로 환산해 말할 수도 있다.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하니 차비가 줄어든다. 한 달에 적어도 3만~4만원은 아낄 수 있다. 물론 이보다 많은 돈이 월세로 나간다. 도심의 임대용 주택엔 보증금이 적다. 빚이 적은 집주인들이 월세를 받아서 먹고산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월세를 내줄 세입자를 구한다. 애당초 다른 곳보다 월세가 10만원 이상 비싸다. 그러나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다. 대신 운동이 가능하다.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 틈에 치이면서 팟캐스트를 듣거나 뉴스를 검색하면서 40~50분을 버티며 출근하는 대신 그 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산책을 겸해 걸어서 출근한다. 나는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위치와 혼자만의 시간을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사실 운동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얼마를 더 낼 수 있겠는가? 부수적인 절약 포인트도 있다. 도심에 살기 때문에 심야 택시비가 적게 들거나 거의 들지 않는다. 대체로 모임을 집 근처에서 한다.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까지 이어지는 모임을 할 때마다 2만원이 굳는 기분이 든다. 오히려 서울 외곽 주거지에서의 낭만이야말로 과장된 것이다. 이 낭만의 정체는 타인도 아닌 사람들, 바로 가족이다.

나는 전에 살던 서울 동북쪽, 아파트가 가득한 동네의 낭만을 한마디로 요약할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밥 비린내’다. 이 가족의 냄새는 이 동네의 기후와 같은 것이다. 밥 비린내의 습격은 아침부터 시작된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기 전부터 옆집에서 짓는 밥 냄새가 난다. 집을 나선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 동네에는 어디서든지 밥 비린내가 난다. 나도 가끔 밥을 한다. 밥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밥을 가끔 하는 것은 지어놓은 밥이 늘 남기 때문이다. 물론 2인용 밥솥이란 물건이 존재한다. 나도 하나 가지고 있다. 가끔 하는 밥은 이걸로 한다. 이 밥과 조심스럽게 양을 조절한 된장찌개와 간단한 달걀 요리를 반찬으로 집에서 먹는다. 여기에 그날 퇴근할 때 기분에 따라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작게 포장된 식재료 중 한두 가지가 더 밥상에 오른다. 저녁에 집에 들어올 수 있는 날이면 말이다. 내가 밥 냄새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밥 비린내라는 것은 밥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다. 사람과 동네에서 나는 냄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겠다. 단란한 가족이 함께 사는 동네는 그 동네만의 냄새가 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집에 남은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출근하는 남자 혹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그날 아침에 먹은 밥 냄새를 풍기며 나와 함께 지하철 혹은 버스에 탄다. 나는 그 사람들 틈에 끼어 그들의 아침 메뉴를 생각해낸다. 내 옆에 탄 남자와 내 뒤에 선 남자의 집의 김치 맛은 미묘하게 다르다. 그들의 김치에는 각각 새우젓이나 까나리액젓이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의 옷에는 그날 아침에 끓인 쇠고깃국의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다. 나는 미세하게 풍기는 그 냄새 사이에 서서 그들의 가족을 떠올리고는 미묘한 긴장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 냄새는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말해준다. 나에게는 나지 않는 냄새. 이 냄새의 표면에는 각종 음식이 붙어 있지만 그 배후에는 그들의 집과 주방, 냉장고에 들어 있는 각종 음식, 집집마다 하나씩 놓여 있을 김치냉장고, 철마다 김장을 하거나 부모 집에서 김치를 얻어 오는 가족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것이다.

그 냄새는 그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면, 그들의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갈 노란 승합차에서도 난다. 대개 아이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이의 혈육이 아니라 맞벌이를 하는 부부 대신 아이를 돌보는 이모님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 앞에서 혹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골목 입구에서 차를 기다린다. 노란 승합차는 아이들을 삼키고 어머니와 할머니와 이모님들은 총총히 집으로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아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하얀색 버스를 보기도 한다. 그 버스에는 ○○학원의 로고가 크게 새겨져 있고 내신, 수능, 수행평가 등 내게는 이제 낯선 학생들의 과제가 적혀 있다.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그 버스에 가득하다. 그 아이들은 내게 타인이 만들어낸 가족의 증거다. 이 동네의 일상 곳곳에서는 버스가 아이들을 데려가고 데려다준다. 나는 본의 아니게 낯선 그들을 혼자 배웅하고 있다.

가끔이지만 근처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다. 내게 혼자 밥 먹는 일은 전혀 어색한 행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직장인에게 시간은 혼자 있는 거의 유일한 여가다. 점심시간이 되면 옆자리의 김 대리, 다른 팀에서 안면이 좀 있는 이 과장, 그리고 종종 내 직속 상사 박 부장, 심지어 부사장까지 자신의 식사에 나를 초대한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으면 사내 메신저에 11시45분에 출발하는 행렬의 목적지를 조율하는 협상으로 분주하다. 내가 이 행사에 빠지게 된 것은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대신 나는 가벼운 메뉴를 골라 혼자 조용히 식사를 한다. 아침의 긴장과 오후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운동과 혼자만의 식사 시간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나만의 절차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까지 작은 마찰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집 근처에서는 이런 나의 자세가 무척 어색하기 그지없다. 아마 어색함은 1인분만 먹겠다는 내 잘못일 것이다. 전골이든 고기든 무엇이든 이 동네 메뉴의 ‘소’자는 2~3인분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어디서 만들어온 것인지 모를 패키지에 담겨 있다가 강한 불에 한소끔 데워져 나오는 빽빽한 메뉴판을 자랑하는 어느 식당의 1인분이거나, 학원 버스의 아버지·어머니들이 아침에 급할 때 이용하는 1500원짜리 김밥이나 분식이다. 이마저도 간식을 먹으러 나오는 아이들에게 치이다보면 마음 편히 밥 먹을 곳이 없다. 요컨대 이 동네의 식당은 아이들 간식을 파는 작은 가게이거나 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마룻바닥에 테이블이 줄줄이 이어진 홀, 둘 중 하나다.

요즘에는 변두리 주택가에서도 얼마든지 카페를 발견할 수 있다. 밥 비린내는 이 동네의 카페에서 소리로 변한다. 어쩌다 평일 오전에 한가롭게 앉아 있으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온 어머님들이 카페를 채우고 수다를 시작한다. 주말에는 교회에 다녀온 오후에 이 자리를 채운다. 나는 혼자 앉아 그들이 하는 학교 선생님 이야기, 아이들 성적 이야기, 남편의 벌이 이야기 그리고 차마 옮기지 못할 이야기를 다 듣는다. 안 듣고 싶어도 들리는 그 이야기들은 때때로 참을 수 없다. 나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내 사정을 하나둘 끼워 맞춰본다. 지금까지 나의 저축, 연인이 모아두었을까 싶은 저축, 가족 계획,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알려준 혼수며 예단이며 결혼식 비용 같은 것들로 머리를 채우기도 한다. 그 고비를 모두 넘기면 언젠가는 나도 저들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내가 타인을 무조건 불편해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완전한 오해다. 내가 느끼는 것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동네의 정취, 내가 밥 비린내라고 표현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각이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고립되기 일쑤다. 그들은 서넛이 한 조를 이뤄 동네를 다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혼자일 때조차 가족의 흔적을 달고 다닌다. 내가 들어가기 주저하는 이 동네의 거의 모든 장소는 그 가족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 동네에 전혀 불만이 없다. 단지 내가 있을 곳은 따로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채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매연이 가득하고 혼잡의 대명사인 사대문 안으로 돌아왔다.

내가 있을 곳은 ‘1인분 생활지’

도심의 냄새는 완전히 다르다. 도심에선 밥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을 기다리는 식당에서 찐쌀로 밥을 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밥이야 이곳에서 단번에 더 많은 양을 집중적으로 한다. 진부한 결론이지만 이곳은 타인과 타인이 만나는 곳, 누구나 혼자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속에 혼자 있는 나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밥 비린내 나는 변두리의 정겨운 아파트 단지로 향하겠지만, 그들도 여기서는 타인을 상대하기에 급급한 나와 같은 동료로 느껴진다. 아마 사대문 권역을 벗어나면서 그들의 몸이 다른 모드로 전환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것은 감각의 영역이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볼 때 학원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에게 느꼈던 것처럼 배웅하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 예의를 지키며 도심을 나눠 쓰는 동료가 되기를 다짐하는 것이다.

여기는 1인분이 기본인 곳이다. 어디서나 1인분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사람들은 식성에 따라 공기밥 하나 정도는 서비스해주는 식당을 고를 수야 있겠지만, 이미 1인분 문제는 양의 영역이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하물며 식당의 문제도 아니다. 1인분은 이 동네를 뒤덮은 가장 작은 단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나 혼자 의사결정을 하고 소화하는 하나의 단위로 내 삶을 조직할 수 있다는 감각, 1인분이 갖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곳에서 나와 동료들은 각각 짜장면과 짬뽕과 볶음밥을 시키고 조금씩 돈을 모아 탕수육 한 그릇을 추가한다. 물론 중국요리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 여기는 전혀 다른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다른 곳이다.

청년 1인 가구, 평생 월세 인생?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1인 가구에 대한 전수조사 자료를 따로 추려 발표했다. 2000년과 2005년 조사는 10% 표본을 추출해 발표했다. 1995년 이전의 조사는 1인 가구를 특별히 따로 분류해 발표하지 않았다.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1인 가구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데 따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1인 가구는 총 414만2165가구이며 일반 가구 대비 비율은 23.9%로, 10년 전인 2000년의 15.5%에 비해 8.4%포인트 증가했다. 이 중에서 서울의 1인 가구는 85만4606가구다. 서울에는 전체 가구의 20.2%가, 1인 가구의 20.6%가 모여 있다.

1인 가구의 특성을 연령별로 살펴보면, 전국 1인 가구 중 20~34살 가구는 118만9820가구로 28.7%를 차지한다. 이 중 34만817가구가 서울에 산다. 청년 1인 가구의 28.6%가 서울에 사는 것이다. 이를 성별로 살펴보면, 전국의 청년 1인 가구 중 남자 가구는 68만1849가구, 여자 가구는 50만7971가구다. 서울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분포를 보인다. 서울의 청년 남자 1인 가구는 17만3402가구, 여자 가구는 16만7415가구로 전국 분포보다 여자 1인 가구의 비중이 높다.

연령대를 높여 고령 1인 가구를 살펴보면 어떨까. 전국의 65살 이상 고령 1인 가구는 106만6365가구로, 전체 1인 가구의 25.7%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 남자 1인 가구는 21만6181가구, 여자 1인 가구는 85만184가구로 여자 1인 가구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를 점유 형태로 살펴보면, 고령 1인 가구 중 남자는 12만0537가구, 여자는 55만5907가구가 자가 거주 가구다. 고령 1인 가구의 절반 이상이 자기 집에 살고 있다. 나머지는 전세나 월세 등의 형태다. 서울의 고령 1인 가구는 13만8825가구로 이 중 남자 3만2593가구, 여자는 10만6232가구다. 남자는 1만737가구가, 여자는 4만2597가구가 자기 집에서 산다. 서울의 고령 1인 가구의 세입자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 청년 1인 가구의 경우 10만2617가구, 8.6%가 자가 거주한다. 서울의 경우 1만9147가구가 자기 집에서 살고 있다. 5.6%만이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이다.

생애주기의 관점에서 청년 1인 가구의 주거 현황은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다. 사회 진출 초기에 월세를 전전하더라도 저축하고 가정을 꾸리는 가운데 계속 늘어나는 소득으로 집을 마련하고 노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청년 1인 가구도 자신의 삶을 잠정적 형태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고령 1인 가구, 특히 고령의 여자 1인 가구의 삶을 돌보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령 1인 가구의 현재 상황을 생애사 차원에서 살펴보자. 현재 고령 1인 가구의 높은 자가 거주 비율은 그들이 생애에 걸쳐 집을 마련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출가시킨 결과다. 현재 청년 1인 가구는 이같은 생애를 반복할 수 있을까? 지금의 상황이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고착돼가는 중이라면, 소득이 늘어나는 것을 바랄 수 없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2015년의 인구주택총조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1인분이 통용되지 않는 곳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식품 유통이다. 나는 종종 근처 재래시장에 간다. 도심에는 마트가 없다. 도심에는 마트의 소비자가 되어줄 대량의 가족들이 없다. 주택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 업무용·상업용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대형마트는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된 서울 외곽 지역과 서울을 둘러싼 신도시에 많다. 대신 도심에는 편의점과 드러그스토어 체인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 맥주에 곁들일 안줏거리를 살 수 있을지언정 밥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이곳에도 가족의 그림자가 짙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시장의 인심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덤이다. 인상 좋은 할머니는 콩나물을 한 움큼 더 쥐어주시고 봄나물이 좋다며 또 한 움큼 담아주신다. 몇천원을 내고 나면 새까만 비닐봉지에 다 먹지도 못할 풀이 가득하다. 두부 한 모를 다 먹을 수 없다. 김치 한 포기를 다 먹을 수 없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 아주머니는 인자하게 말씀하신다. 두부는 구워 먹고 남으면 찌개에 넣으면 된다. 김치는 먹고 남으면 찌개를 끓이면 된다. 두고 먹지 못할 게 무어냐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르겠느냐마는, 이런 식으로 살게 되면 계속 커져야 하는 물건이 있다. 가족이 없어 먹는 입이 적으니 냉장고라도 커져야 한다. 혼자 살게 되면서 가장 싼 조그만 냉장고를 골랐던 내가 원망스럽다. 이제 와서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를 마련한들 그 안의 음식을 누가 다 먹는단 말인가. 혼자 살면서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 여름에 수박이 먹고 싶다. 서울 중구 입정동의 한 오래된 평양냉면집에서는 혼자 온 손님을 위해 편육 반접시와 소주 반병을 주문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런 이유로 나는 백화점 식품 코너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걸어서 퇴근하는 길에 청계1가에서 을지로로 방향을 틀어 백화점으로 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별 포장된 아보카도나 샐러드용 채소, 허브를 산다. 반개로 포장된 양배추도 유용하다. 그 밖에 와인 비니거나 동남아산 소스도 가끔 사서 주방에 비치한다. 채소를 입속으로 처리하는 데 유익한 물건이다. 통조림에 든 콩도 산다. 중요한 것은 용량이다. 백화점 식품관에는 적은 용량으로 쪼개 파는 물건이 많다. 용량을 기준으로 가격을 매긴다면 시장은 물론이고 마트보다 더 비싸다. 그러나 못 먹고 상해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싸게 대량으로 사는 것이 더 비싸다. 음식 쓰레기는 공짜로 버릴 수 있나. 그 많은 남은 음식을 위해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사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형 유통업이 음식이 최종 소비되기까지의 저장 부담을 각 가정에 놓인 대형 냉장고에 지우는 방식이라면, 나는 냉장고를 늘려 이 부담을 지는 대신 애당초 작게 포장된 비싼 물건을 사는 셈이다.

아직은 생활의 조직이 엉성한

그래도 음식은 나눠 먹는 수라도 있다. 하지만 도심에서든 외곽 주택가에서든 혼자 사는 생활을 잘 운용하려면 사람들로 이뤄진 기반이 탄탄해야 버틸 수 있다. 가족이 함께 해오던 많은 일을 혼자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손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라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두 장소에 동시에 있기 어렵다는 점이다. 보일러가 고장나도 집에서 수리를 기다릴 수 없다. 택배를 받자고 회사에서 집까지 갈 수도 없다. 집에 혼자 있어도 문제다. 늘 오던 택배 기사님은 안면이 익어 믿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일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일러, 인터넷, TV와 냉장고, 수도관 등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집 안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다. 그때마다 겪는 불안에 대처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혼자 살면서 동네의 이웃 간에 두터운 신뢰를 쌓기도 어렵다. 2년 계약을 하고 셋방을 전전하는 신세에 동네 정을 붙여본들 이듬해를 기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내게 혹은 우리에게 밥 비린내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밑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린 생활의 조직이 아직은 엉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방식도 나름의 냄새를 가질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구술 김윤정·정리 박재현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