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7:33 수정 : 2014.02.07 13:56

성공한 벤처 1세대이자 1천억원대 자산가인 권도균(50) 프라이머 대표는 자신의 경험과 자본을 활용해 초기 벤처기업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지원하는 벤처기업을 선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창업가의 삶과 사업모델이 얼마나 일치하는가’이다.프라이머 제공
2013년 3월 네이버가 패션과 관련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는 벤처기업 ‘스타일쉐어’가 만든 사업 분야에 대기업이 진입한다는 소식이기도 했다. 당시 권도균(50) 프라이머(Primer)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소리를 쏟아냈다.

“장사 좀 될 것 같은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의 (사업)모델들을 줄줄이 베낄 거란 소문이 파다하다. 다시 막 싹이 트려고 하는 벤처 생태계가 뿌리째 말라버리고 황폐화될 거다. 누가 스타트업을 하겠나? 누가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나? (시가총액이) 13조원이 넘는 회사가 대학생이 만들고 키워놓은 시장에 베껴서 들어오나? 부끄럽지도 않은가?”

자신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인용되며 화제가 되자, 권 대표는 자신의 입장을 좀더 정리된 글로 대중에 알렸다. 그는 ‘스타일쉐어와 네이버원더에 관한 4가지 변명’이란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프라이머는 초기 벤처기업에 도움을 주는 기업으로 스타일쉐어에 투자한 금액이 아주 소액이고, 설사 큰돈을 투자했다고 해도 이해관계 때문에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다. 대기업을 두려워하며 내지른 신음 소리도 아니고, 시장경제의 원리를 부정하는 발언도 아니다. 오히려 대기업은 자신들이 뿌리내린 산업이 지속 가능하도록 그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네이버는 권 대표를 비롯한 벤처 1세대들과 각계의 비판이 빗발치자 결국 스타일쉐어와 ‘신규 비즈니스모델 공동개발 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미 출시한 패션 앱인 ‘워너비’도 9월 중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벤처 1세대인 권도균 대표가 국내 최대 인터넷 기업인 네이버에 날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그가 벤처 분야의 현안에 목소리를 낸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벤처 현안에 대한 의견이나 기업을 운영하는 데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이 게시글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타트업 벤처 돕는 벤처 1세대

“대기업이 준 용역의 단가가 괜찮다면 받는 게 좋습니다. 만일 대기업 담당자가 투자, 제휴, 공동사업, 전략적 관계, 그룹 전체 구매 같은 용어를 쓰면 ‘나쁜 냄새가 나는데?’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많은 경우 잘한 결정 중 하나는 ‘안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죠.”

“투자를 받았으면 지혜롭게 아껴쓰세요. 그렇다고 사업을 동면 상태로 만들지는 말고 투자를 하세요. 흠…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 나올 만해요. 맞아요. 그게 바로 사업이지요.”

사업을 하면서 궁금증이 생기거나 어려움을 겪는 초기 벤처기업가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권 대표에게 상담을 받기도 한다. 한 창업자가 “투자를 받기로 했는데 지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창업자의 자본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받으면 최대주주가 바뀌는 것이냐”며 “몇 년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동안 물어볼 곳이 없었다”고 적었다. 권 대표는 이 글에 “투자 시점에 따라 같은 금액을 투자해도 지분이 달라진다”고 답변을 달며 자세한 설명을 추가했다.

SNS를 통한 권 대표의 활동은 업무의 연장선에 있다. 그가 운영하는 프라이머는 초기 벤처기업가들이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프라이머는 여느 기업과 달리 수익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실제 권 대표는 2010년 1월 프라이머를 설립해 지금까지 26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그가 말하는 프라이머의 목적은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다.

권 대표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벤처기업 5개를 성공적으로 창업한 벤처 1세대다. 창업 10년 만인 2007년 회사 운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UC버클리 대학에서 방문연구자(Visiting Scholar)로 있으면서 경영학을 공부했으나, 한편으론 2008년에 직접 창업하고 경영했던 회사들의 지분을 모두 정리했다. 그가 창업한 이니텍, 이니시스 등은 코스닥 증권시장에서 지분평가액이 1천억원을 웃돌았다.

이재웅·이택경·장병규 등과 의기투합

2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창업에서 매각까지 경험하고, 유학 가서 공부한 경영학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 때마침 한국에서 아이폰이 출시됐고, 모바일 벤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벤처 1세대들의 흥망성쇠를 경험한 그는 같은 시행착오를 젊은 기업인들이 반복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 2010년 1월에 설립한 프라이머였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도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인 이재웅·이택경, 이머신즈 설립 멤버인 송영길, 네오위즈 창업자인 장병규 등과 의기투합했다. 이들을 설득해 프라이머의 공동창업자이자, 벤처기업들의 멘토가 되어줄 것을 약속받은 것이다.

“프라이머의 두 가지 축은 프라이머클럽과 엔턴십(Enternship) 과정이에요. 프라이머클럽은 우리가 2천만~5천만원을 투자한 초기 벤처기업들로 구성되고, 멘토들이 사업모델서부터 마케팅·조직관리·회계 등 세세한 내용까지 알려줘요. 경험이 없는 창업자들이 사업 초반에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그리고 예비창업자들을 위한 창업 교육과정인 엔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1년엔 두 차례, 각 회차당 약 500명씩 교육해요. 무료로 운영되는 이 과정에 한 해 수천만원이 들어가지만, 창업에 필수적인 내용을 알려준다는 생각에 유지하고 있죠. 내년부턴 몇몇 교수들과 엔턴십 과정을 대학 수업에 접목시키는 것을 논의하고 있어요.”

그가 투자하고 신경 써서 도움을 준 기업들은 벌써 26개에 달한다. 패션 아이템을 공유하는 ‘스타일쉐어’를 비롯해 창업한 지 3년 만에 국내 4년제 대학의 3분의 1가량인 70여 곳의 대학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드투페이퍼’도 프라이머를 거쳐간 기업이다. 애드투페이퍼는 대학생들의 출력 용지 여백에 광고를 넣어 무료 출력 복사 서비스를 시작했고, 지금은 광고를 모바일로 확장시켰다. 지금까지 누적된 무료 출력 용지가 1천만 장을 넘어섰다. 온라인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공지하는 ‘온오프믹스’, 모바일 중고장터인 ‘번개장터’ 등도 프라이머클럽의 회원사다.

“다양한 경로로 벤처기업을 만나고 있습니다. 스타일쉐어의 윤자영 대표의 경우 연세대에 특강을 가서 만났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한 학생이 찾아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사업을 얘기했고, 전 괜찮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사업기획서를 프라이머에 제출해보라고 권했어요. 그런데 몇 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거예요. 다시 전화해서 왜 사업기획서를 안 내냐고 물으니 ‘대표님은 젊은이들을 만나 항상 그렇게 얘기하는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지 않다.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니까 기획서를 내보라’고 재차 권했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에요. 애드투페이퍼는 다른 벤처캐피털 업체에 먼저 찾아갔지만, 너무 사업 초기라 우리를 소개받았어요. 번개장터나 모비틀, 핀포스터 등은 엔턴십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프라이머클럽으로 들어왔죠.”

인문학과 음악에 관심 많던 전산학도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하고, 발 벗고 벤처기업을 도와주는 권 대표는 처음부터 타고난 사업가였을까. 그는 학창 시절의 자신을 ‘존재감이 별로 없는 아이’라고 묘사했다.

“워낙 내성적이었어요.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수재는 아니었고요. 경북 안동에 살던 중학교 시절엔 아버지가 택시회사를 운영해 좀 유복한 편이었는데, 고등학교 땐 사업이 망해 가세가 기울었어요. 친구는 많지 않았지만, 책과 음악을 유독 좋아했죠. 특히 고등학교 땐 파스칼의 <팡세>에 빠져 있었어요. 그 책을 읽고 인간 이성에 대해 끊임없는 회의에 빠지곤 했습니다. 관심사는 인문학과 음악이었지만, 집안이 어려워 대학 전공은 전산학과를 택했어요. 제가 다닌 경북대가 집에서 멀지 않았거든요. 점심 사 먹을 돈이 없어 아침에 학교 갔다가,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서 공부했어요. 컴퓨터공학도 막상 공부해보니 잘 맞았어요. 좋아하던 논리학과 철학이 컴퓨터공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알고리즘을 짜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죠.”

1986년 경북대 전산학과를 졸업한 그는 1년간 기아자동차 전산실에 근무했고, 정보통신업체인 데이콤으로 회사를 옮겼다. “컴퓨터가 부속품이 아닌, 주업종인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데이콤에서 행정전산망 사업팀을 거쳐 1990년대 초·중반 천리안 멀티미디어 서비스팀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그는 인터넷의 가능성을 눈여겨봤고, 막 피어오르는 인터넷 쇼핑사업을 위해 인터넷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을 하면서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디지털 공증 서비스’였다.

“인터넷 시대가 태동할 무렵, 오프라인의 많은 것들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려면 공식적인 증명 절차인 공증 서비스가 필수적이라고 봤어요. 디지털은 복제품과 원본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는데요. 이를 구분할 수 있는 공증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주민등록, 자동차등록, 부동산대장 등의 모든 업무가 온라인화될 수 있다고 봤죠. 결국 이 서비스는 제대로 상용화되지 못했지만, 이를 준비하기 위한 보안 서비스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니텍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1997년 보안업체 이니텍을 설립한 그는 1년여간 여러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용역 업무를 숱하게 수행했다. 특히 그가 데이콤에서 수행했던 전자지급과 관련된 용역이 많이 주어졌다. 국내 첫 인터넷 쇼핑몰인 강원도청의 쇼핑몰 누리집 결제 서비스도 그가 만든 것이다. 그는 아침에 다른 업체에 가서 저녁까지 용역 업무를 수행하다가, 저녁에 자기 회사로 퇴근해 야근하기를 반복했다. 이듬해 그는 아예 전자지급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를 설립했다. 용역을 받아 그때그때 서비스를 만들기보다는 표준화된 제품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1998년 이니시스를 설립했다. 이니텍과 이니시스는 당시 인터넷 대중화의 흐름 속에서 견조하게 성장해 각각 2001년, 2002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됐다.

“기업은 창업자나 경영진과 분리된 독립 인격체”

그가 사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다고 꼽은 것은 ‘관계’였다.

“제가 관계에 서툰 사람이어서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초보 사장이 흔히 하는 실수도 답습했죠. 한번은 저녁 8시에 업무가 잘못 수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밤 9시에 모든 임원과 직원을 호출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뒤 3∼4개월간 후폭풍을 겪었죠. 아무리 따질 게 있더라도 사람을 배려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사람이 감정의 동물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실수였습니다. 또 서로 헐뜯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내 정치가 어디에나 있어요. 처음엔 그런 것에도 휘둘렸지만, 나중엔 팩트(사실)에 집중하고, 아직 팩트로 나오지 않은 사안이면 없는 것으로 하자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세웠어요. 제가 워낙 사람을 다루는 데 서툴러서 초창기에 저를 겪은 직원들은 무진장 고생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잘못한 행동으로부터 더 이상 직원들이 영향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의사결정이에요.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인격이나 체면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잘못을 옹호하고 자기를 지나치게 방어하는 것이 더 문제죠. 사업이 잘된다고 강조하고 숫자나 사례를 과장하는 경영자보다는, 자신의 잘못이나 예상치 않은 발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회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해요. 프라이머가 지원할 벤처기업을 선정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죠.”

그는 여느 창업가들과 달리 기업을 창업자나 경영진과 분리된 독립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이니텍·이니시스 등의 기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겼고, 최대주주 지위마저 포기하고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그는 기업이 어느 시점 이상 지나면 자식을 출가시키듯 놓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사는 독립된 인격체라고 상법에도 나와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회사를 독립된 존재로 여겼고, 저와 관계없이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식이 내 소유물이 아니듯, 회사도 마찬가지인 거죠. 한국 사회에선 많은 회사의 오너이자 회장들이 비서와 기사를 업무와 상관없이 부리며 황제경영을 해요. 그런 특권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죠. 저는 ‘오너’라는 용어도 부적절하다고 봐요. 회사의 소유주가 아닌 주식을 많이 가진 대주주인 거죠. 회삿돈으로 기부하면서 좋은 일을 한다고 생색내는 경영자들도 잘못이에요. 정말 기부를 하고 싶으면 급여나 배당을 받은 개인돈으로 해야 합니다. 회사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지위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해요. 실제 자신이 만든 회사를 완전히 매각하면 새롭게 열리는 시야가 있어요. 제가 어떤 이해관계에 엮이지 않고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일에 뛰어든 것도 기업의 설립부터 매각이라는 전 과정을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글 윤형중 <한겨레> 토요판팀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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