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24 수정 : 2014.01.07 10:52

투자를 망설이다 놓친 기회를 손해로 환산하는 일은 오지 않은 불행을 미리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개발 당시 고층 아파트와 옛 주거지가 공존하던 서울 목동의 옛 모습.
1997년 11월21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7년은 시작부터 위기의 징조로 가득했다. 1월에는 한보철강이 부도났다. 회장의 갖가지 비리와 주요 결정을 역술인에게 의지했다는 소식을 신문과 방송이 전했다. 두 달 뒤 3월에는 삼미그룹이 무너졌다. 바로 다음달에는 진로그룹이 부도났다. 그리고 6월에는 한신공영그룹 차례였다. 그때는 이 일들이 큰 변화의 시작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사주의 착복, 정치인과의 유착, 비리를 성토하는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벌 받을 이들에게 돌아갈 응보가 마침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는 변화의 서막이었다. 나는 미처 알 수 없던 원인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신호였던 것이다. 변화는 언제나 알기 전에 일어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돌아보니 우리 가족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겪은 변화는 하나하나 이유가 있었고,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1997년 3월에는 초등학교 교과목에 영어가 추가됐다. 몇 년 뒤 나는 취업에서 영어 성적이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상고를 졸업한 아버지의 선배들은 전교에서 10등 이내에 들어야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졸업할 때는 무려 100명이나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늘 전교 5등 이내였던 아버지는 친구 100여 명과 은행에 취직했다. 이런 변화가 갖는 의미는 1990년대가 되어야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가른 집안의 경제권

아버지가 다니던 은행이 사라졌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한빛은행이 되었다가 평화·광주·경남은행과 함께 우리금융지주회사로 묶여 우리은행이 되었다. 국민은행과 대동은행이 국민은행으로 합병하더니 곧 장기신용은행까지 국민은행이 되었다. 이후 동남은행을 합병한 주택은행 역시 국민은행이 되었다.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 한 학교에서 10명만 은행에 취직하던 시절의 선배들은 지점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대에 이르자 승진에는 또 다른 적성이 필요했다. 90명의 경쟁자가 늘어난 탓이었다. 아버지는 차장을 마지막으로 직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경제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하는 일 없는 한량이었다고 한다. 오빠들이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그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형제가 여덟이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나가 일을 시작해야 했다. 뒤늦게 고등학교까지 학업을 마친 어머니는 가난을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회상한다. 1958년생 어머니가 1950년생 아버지를 만나 결혼한 이유에도 이런 현실의 문제가 없지 않았다. 당시 은행원은 일등 신랑감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쓰는 돈보다 저축하는 돈이 늘 많았다. 아끼고 아끼는 생활이 계속됐다. 저축은 적금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학창 시절 이렇다 할 문화생활을 누리거나 취미를 가지지 않은 것, 남들처럼 학원이나 과외로 돈을 많이 쓰지 않은 것은 이런 검약 생활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가계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었지만 당장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동안 저축으로 모아온 돈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1999년,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던 때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 전까지의 이사 경력을 먼저 짚어봐야겠다. 지금에야 과거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때의 경험이 아버지 실직 뒤 어머니를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1980년 초 결혼 직후 어머니가 처음으로 산 집은 인천의 주공아파트 13평형(43m²)이었다. 이 아파트의 당시 가격은 860만원이었다. 분양을 받고 다달이 상환금을 갚아나갔다. 아버지 직장 주택조합으로 분양받은 것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새집에서의 생활도 잠시, 그해 11월께 아버지는 승진과 함께 지방 발령이 났다. 어머니는 이 집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이사했다. 지방의 작은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았다. 지방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듬해가 되자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82년, 첫 집이던 주공아파트를 550만원을 받고 팔았다. 살 때보다 300만원이나 떨어진 가격에 판 것이다. 어머니는 이때 큰 손해를 보았노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판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가지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서울로 집을 옮기는 것, 그리고 단독주택을 사서 세를 놓는 것이었다. 인천에 첫 집을 마련하고 잠시 지방에 내려가 살면서도 어머니는 서울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천의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어머니의 등을 떠민 격이 되었다. 약간의 조바심을 더해주었다.

서울 도봉구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 뒤에 지은 단독주택이 많았다. 어머니는 이곳의 한 단독주택을 2700만원에 샀다. 주공아파트를 판 돈 550만원에 저축을 보태 700만원을 마련하고 나머지 2천만원은 대출을 받았다. 당시 이렇게 큰돈을 대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은행에 다니는 아버지 덕이었다. 마당이 있고 2층으로 올린 단독주택에서 우리 가족은 2층에 살았다. 1층은 몇 개 방을 나누어 세를 주었다. 어머니는 세를 받아 대출금을 갚아나갔고 나머지는 저축을 했다. 이 집에서 7년을 살았다. 나는 어려서 이 집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지만 단독주택은 어머니를 어지간히 번거롭게 만들었나보다. 크고 작은 하자가 끊이지 않았다. 1층은 세를 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고치느라 신경 써야 했다. 여름에 큰비가 내리면 집 안에 비가 새거나 겨울에 수도관이 얼어 터지는 일을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치렀다. 자주 바뀌는 세입자를 관리하는 일도 번거롭기만 했다. 어머니는 다시 아파트로 이사할 결심을 했다.

2700만원에 산 집이 어느새 1억원에서 조금 모자란 9800만원이 돼 있었다. 1986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연평균 10%가 넘는 고성장과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의 결실은 그대로 집값에 반영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른 뒤 급하게 오르기 시작한 서울의 집값은 1989년 16.6%, 1990년엔 24.2%가 올랐다. 이에 힘입어 우리 집 가격도 7년 만에 3배 넘게 오른 것이다.

1989년에 토지공개념이 도입됐고,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에 신도시를 조성해 주택 20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특단의 대책이 동시에 발표됐다. 1기 신도시들의 입주가 시작되던 1991년, 마침 어머니는 서울 금천구에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분양 공고를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에게 강남이란 별다른 인상을 주는 곳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변에서 언뜻 보기에 강남이라 해서 그리 유별날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저 서울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었다. 주택채권 1천만원가량을 포함해 5600만원에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어머니는 앞으로 여기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목동에 일찌감치 눈뜬 어머니

1994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코스트코 코리아가 첫 점포 ‘프라이스클럽’을 열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던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주말이면 이곳을 이용하는 유행이 일었다. 단지 내에서 좀 산다 싶은 집은 주말마다 차를 가지고 가서 동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식료품이나 가정용품 등을 차에 가득 싣고 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프라이스클럽과 가까웠지만 그때까지도 미완성의 신도시였던 목동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일기 시작했다. 금천구 아파트에서 평생 살겠다던 어머니도 목동으로 움직일 마음이 들었다. 1991년 5600만원에 분양을 받은 아파트의 가격은 어느덧 1억원을 훌쩍 넘었다. 토지공개념과 1기 신도시 입주로 5년 내내 집값은 횡보하거나 조금 떨어지기까지 했지만, 분양가는 토지가격과 건설원가에 연동된 것으로 애당초 주변 시세보다 반 이상 싼 가격이었다.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만으로도 돈을 버는 셈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목동 아파트 가격도 2억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때까지 살던 집에서 저축한 돈을 조금만 보태면 옮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머니는 저층으로 조성된 목동 1단지 아파트를 둘러보고는 옮길 결심을 굳혔다.

목동으로 옮길 즈음에 막간극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목동 이주에 생각보다 큰돈이 들지 않자 남은 여유자금으로 경기도 광명시에 땅을 조금 사둘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생각에 그쳤다. 나중에 그 땅에는 광명역이 들어서게 된다. 이 막간극은 2000년 이후 어머니의 투자 행보에 서막과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경제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한 것은 1999년이다. 매일매일 1면 오른쪽 끝에서 시작해 마지막 면 왼쪽 끝까지 한번에 다 읽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신문을 꾸준히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흐름이 보인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구태여 뭘 배우러 다니거나 부동산을 잘 아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다만 혼자 꾸준히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그 보이는 흐름에 따라 그동안 모아온 저축을 굴릴 생각을 했다. 당신은 꾸준하게 신문을 읽은 덕분이라 말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결혼 뒤 첫 집을 마련하고 이사를 다니는 동안, 직접 발로 뛰고 귀로 듣고 사는 동네와 그 주변과 서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하나하나 결정을 내리는 동안 어머니는 비록 글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익힌 것 같다. 매일 정독한 신문은 그 경험을 하나하나 지식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은행에서 보내고 외환위기를 맞아 차장으로 명예퇴직한 아버지는 달랐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배움이 낯설지 않았던 아버지는 서울의 유명한 상고로 진학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 직장을 그만두는 날까지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성실한 아버지와 검소한 어머니의 콤비는 고성장·고금리 시기를 함께 살면서 성공적으로 가계를 꾸려왔다. 저축으로 집을 늘려나가며 다시 저축하는 것으로 외환위기 직전에 목동의 27평형(89m²) 아파트를 빚 하나 없이 가질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 가정을 꾸려왔지만 계산법은 달랐다. 아버지는 매달 그리고 매년 성실하게 월급을 가져다주었다. 쳇바퀴 같은 일상이 주는 열매를 믿었다. 그 열매란 곧 저축이었다. 그리고 저축은 100%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약과 저축만이 비결이 아니었음을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저축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저축을 통해 집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을 가지고 있다는 이점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집을 가지고 있기에 더 많이 저축할 수 있었다. 빚을 지더라도 세를 받아 메울 수 있었다. 게다가 집은 가격이 오르는 것이었다. 저축은 집을, 집은 시세 차익으로 돈을 불려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이러한 경험 차이가 1999년 이후 우리 집의 운명을 결정했다.

저축의 시대 산 아버지와 충돌

1996년 11월 대우전자 대표 배순훈 회장은 목동에 국내 최대 규모가 될 기술연구소인 ‘테크타워’ 건립 기공식을 열었다. 3천여억원의 자금을 투입해 4천여 명이 입주할 이 건물은 2000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를 맡았다. 그러나 대우전자의 운명은 아버지와 같았다. 사는 방식은 완전히 딴판이었음에도 말이다. 외환위기와 함께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고, 테크타워 부지는 동양건설에 매각됐다. 서울 서부 지역의 중심업무지구를 조성하려던 목동의 계획도 함께 날아갔다. 대신 이곳은 주상복합 전성 시대의 최전선이 되었다. 목동중심업무지구에는 주상복합 동양파라곤, 현대 하이페리온 1·2차, 트라펠리스, 삼성 쉐르빌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업이 있어야 했던 자리에 주택이 가득 들어서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 흐름에 주목했다.

마지막 남은 목동 아파트는 노후용

어머니는 아버지 퇴직 뒤 그동안 모아둔 저축과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혼자 증권회사에 드나들며 투자에 나섰다. 당시 벤처 열풍을 타고 적지 않은 수익을 내며 생활비를 버셨다. 그리고 이때도 목동 주변 집값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2억원대 중·후반을 호가하던 목동 27평 아파트 가격이 잠시 주춤하기 시작했다. 2001년 즈음, 벤처 열풍과 코스닥 거품이 꺼지자 주식 투자에 실패한 사람들이 내놓은 급매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때야말로 집을 살 적기라 판단했다. 우선 임대사업자로 등록하고 목동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마침 적당한 급매물이 있어 2억원 정도의 아파트 두 채를 계약하기로 약정했다. 도장을 준비하고 계약하러 가던 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의사를 물었다. 아버지는 계약이 임박하자 급히 반대했다. 1997년의 경험, 회사가 사라지는가 하면 심지어 은행과 대기업이 무너지고, 덕분에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는 목동의 중심부를 보아온 아버지는 도무지 낙관적 전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의사를 따라 계약을 포기했다. 2008년 가을 이 아파트는 13억원을 호가했다.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 들어서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노렸다. 임대를 목적으로 26평형(86m²) 두 채를 각각 1억6천만원에 분양받았다. 당시 청약 경쟁이 꽤나 치열했기 때문에 당첨에 행운이 따랐다. 그러나 여기에도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아직도 허허벌판인 목동 한가운데에 짓는다는 오피스텔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상복합 같은 고층 주거용 건물이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타워팰리스의 성공이 가시화되기 전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의견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다. 외환위기의 충격은 어느 정도 극복해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거품은 주식 폭락과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새로운 흐름을 알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한 번 꼬꾸라진 목동 아파트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주상복합 같은 고층 주거시설이 서울 전역에 건설되거나 건설을 준비 중이었다. 정부 역시 주택 관련 규제를 대폭 철폐했다. 아파트를 사기로 하고 오피스텔을 분양받으려고 한 어머니의 결심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확신은 저축의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준공을 얼마 남겨두고 분양권 프리미엄을 조금 얹은 가격으로 두 채 모두 팔아버렸다.

어머니는 우리는 큰돈을 벌 운명이 아니라면서 스스로 입장을 정리하셨다. 가난이 무서워 가난의 반대편으로 열심히 달렸으나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가난에 붙들리지도 않았다. 검소하게 살고 꾸준히 저축해 이뤄낸 삶에는 빚의 그림자가 없었다. 여전히 나의 부모님에게는 아파트 한 채가 온전히 남아 있고 저축도 있다.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던 기회를 여러 차례 놓치고 나자 그동안 기회를 날리는 바람에 잃은 돈이 얼마인지 세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지 않을 불행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부질없듯이 놓쳐버린 행운을 손해로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때 우리가 그 기회를 잡았다면 어땠을까’ 같은 아쉬움은 ‘2007년의 정점에서 족한 줄 알고 정리할 수 있었을까’ 같은 질문과 함께 던져져야 할 것이다. 물론 저축으로 투자하고 빚지는 일에 극히 조심스러웠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우스푸어가 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이제 두 분은 조촐한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목동 생활을 정리할까 생각 중이다. 이제는 내가 내 미래의 빚이 얼마가 될 것인지만 걱정하면 된다.

구술 김동현·정리 박재현

부모의 노후, 불안한 자녀들

최근 통계청과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이 공동 작성한 ‘2013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2013년 3월 기준으로 가계의 경제 상황을 포괄적으로 조사한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 보유 자산은 3억2557만원, 부채는 5818만원으로 평균 순자산은 2억6728만원이다. 2012년에 비해 자산은 0.7% 증가했으나 부채는 6.8% 늘어나 순자산은 0.5% 줄어들었다. 전체 가구 중에서 3억원 이하의 순자산 구간에 69.7%가 분포하고 있으며 10억원 이상은 4%를 차지한다.

한 경제연구소는 2인 가구가 기초생활비 150만원을 20년간 쓴다는 가정하에 노후준비자금의 현재 가치를 약 3억6천만원으로 제시했다. 이를 가계금융복지조사의 순자산 구간을 기준으로 대입해본다면 대다수 가구가 은퇴와 노후를 대비하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후 문제는 은퇴를 앞둔 50∼60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자녀가 결혼하고 독립하는 데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부모의 노후가 준비돼 있지 않다면 자녀는 독립이나 결혼을 미루게 된다. 국민연금의 역할도 제한적이다. 50∼60대의 낮은 가입률도 문제지만, 받을 수 있더라도 수령액이 적어 장래의 생활자금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게다가 생활자금만 대비해서 끝나는 문제도 아니다. 노후에 닥치게 될 국민건강보험 사각지대의 각종 질병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노인 대상의 치아 및 암 보험 광고는 최근 방송광고의 가장 큰 부분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2011년 기준 48.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12.4%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통계에 따르면 노인 단독 가구의 빈곤율은 70.9%로, 자녀와 동거하는 노인가구의 빈곤율 18.7%보다 월등히 높다. 복지 및 소득 기반이 약한 노인가구의 특성은 65~69살 고용률에서도 나타난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2011년 기준 41%로, OECD 회원국 평균(18.5%)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그럼에도 고용의 질은 낮아서 51.3%가 월임금 51만~100만원을 받는다. 노인가구의 평균소득은 전체 가구 평균소득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자녀가 소득이 있다고 하여 별다른 대책 없이 독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현재 노인 빈곤 문제가 잘 보여준다.

올해 공개된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주요국의 주택가격 비교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말 현재 우리나라 가계가 보유한 부동산 가치는 약 5조달러(2012년 평균 원-달러 환율 1070원 기준 약 5350조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436%에 이른다. 그리고 전체 가계 자산 중에서 부동산 등 비금융 자산이 75.1%를 차지한다. 물론 가계 부동산 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택이다. 주택가격은 그만큼 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반면 가계금융복지조사와 노인 빈곤율을 통해 보면, 주택을 통한 가계의 자산 축적 과정이 공동체 전반의 복지 향상에 적합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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