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9:05 수정 : 2014.01.07 10:42

투자를 위해 빚을 낸 가난한 사람들은 빚의 부메랑을 맞기 일쑤다. 카드빚과 사채빚을 갚기 위해 생애 최초로 마련한 내 집을 팔 수밖에 없다.한겨레 자료
서울 아파트 가격이 최고점을 찍은 2007년 즈음, 우리 집의 밀린 카드빚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몇 장을 만들었는지 다 세어보지도 못할 만큼 만든 카드의 의미가 명확해졌다. 하나의 카드로 빌린 돈을 다른 카드로 갚아나가던 아슬아슬한 곡예에 한계가 온 것이다.

2000년대 초, 신용 상황을 제대로 묻지도 않고 발행해준 카드로 만든 빚이 한꺼번에 터졌다. 현금 1만원을 쥐어주면서까지 신용카드를 만들어주던 때였다. 2002년에 이르자 발급된 신용카드는 1억 장을 돌파했다. 외환위기로 위축된 소비를 진작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신용카드에 대한 자질구레한 규제가 사라지자 빚으로 만들어낸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카드는 빚을 만들었고 이 빚이 터진 것이 2003년의 카드 사태다.

우리 집의 위기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 뒤에야 찾아왔다. 꽤나 오래 버텨낸 것이다. 어머니는 1997년 초,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에 경매를 통해 마련한 집만큼은 팔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재건축 예정이었다. 장래 분양권을 주는 그 집에서 기다리다 아파트에 입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갚을 길이 막막한 빚을 매일같이 독촉당해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언덕길 꼭대기에 놓인 15평(49.6m²)짜리 다세대주택의 한구석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가져본 집을 어머니는 결국 팔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로부터, 그리고 처음 집을 마련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는 우리 집에 한 번의 기회를 주었던 반면 계속되는 위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기회는 다른 집에 닥친 불행의 반대 면이었다. 빚을 갚기 힘든 사람이 늘어나자 담보로 잡힌 집이 경매로 나오기 시작했다. 눈이 밝은 어머니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의 셋방살이를 끝내게 해준 첫 집을 6천만원에 살 수 있었다. 방 3개, 부엌 겸 거실이 조그맣게 자리하고 욕실이 하나 딸린 조촐한 집이었다. 게다가 머잖아 재건축조합이 생겨 아파트가 될 예정이기도 했다. 방 하나는 외풍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거실로 쓸 수 있는 미닫이문이 달린 방을 내가 썼다. 문에는 흐릿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지만 문을 닫아도 나만의 방 같은 아늑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서울 변두리를 돌고 돌아 겨우 마련한 첫 집이자 절호의 기회였다. 이 집을 팔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동작·마포 단칸방 돌아 두칸방으로

기독교 집안의 오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어머니는 위로 언니를 두고 아래로 3명의 남동생을 두었다. 외조부님 내외에게도 아들은 절실한 문제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기대했던 순서에 딸로 태어나 스치듯 겪곤 했던 설움을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뒤로는 줄줄이 아들이 태어났다.

그 탓에 어머니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공장에 취직해 남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삼촌 중 둘이 대학을 나와 그럭저럭 사는 것이 다 그 덕이다. 시골에서 일찍 서울로 올라온 외조부 때문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달동네 출신이던 어머니에게 가족은 굴레나 다름없었다. 당사자 두 사람 외에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던 아버지와의 결혼은 탈출의 방편이었다.

결혼식을 생략한 채 사글세 단칸방에서 시작한 어머니의 신혼은 나를 임신한 때와 같이했다. 어머니는 혼수랄 것도 없고 냉장고를 마련하지 못해 선물로 받은 수박을 밤새 다 먹어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4살 무렵 금천구 독산동 시절부터다. 형편은 고만고만했던 모양이다. 동작구 달동네로 옮기고 마포구 언덕 위의 집으로 옮겨다녔지만 방은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은평구 구파발 근처의 외진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방이 2개인 집에 살게 되었다. 근처 초등학교에 보내기 싫었던 어머니는 초등학교 배정을 위해 위장 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학을 위해 버스를 타야 하는 내가 지각이 잦은 탓에 구설에 올랐다. 결국 초등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하게 되었다. 도랑 치고 가재를 잡을 수도 있었던 외진 곳에서 변두리 주택가로 건너오기 위해선 다시 방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원래 가게 자리인 상가 1층의 한 칸을 얻어 점포 뒤에 붙은 단칸방에 의지해 살았다. 지각은 사라졌다. 1년 뒤 다시 근처로 이사를 했다. 드디어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으로 집을 사기 1년 전의 일이다.

집을 살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사업이 결정적이었다. 아버지는 육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요리와 술을 좋아하시고 제때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다고 한다. 내가 철이 들 즈음 집안에 선산을 제외하곤 남은 것이 없고 별다른 왕래도 없어 아버지 집안의 정확한 내력은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떼어와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도깨비장사로 돈벌이를 시작해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다.

대신 아버지에게는 손재주가 있었다. 결혼 직후에는 간판집을 하기도 했다. 백화점 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취직한 아버지는 곧 독립해 자신의 사업체를 차렸다. 내가 6살이 되는 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기도 고양시에 공장을 두고 경기가 좋았을 때는 10여 명의 직원을 두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부족함 없이 다 쓰고도 1년에 1억원을 모을 수 있던 때였다. 1990년대 초·중반의 호황, 서울에 있는 백화점들이 계절마다 매장 내부를 고치고는 했다. 아버지 회사의 거래처도 여럿이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것을 끝냈다. 백화점들이 쓰러지자 백화점에서 공사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나기 시작했다. 경방필, 애경, 쁘렝땅백화점 등 아버지가 거래하던 백화점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결국 아버지도 사업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새 일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친척과 함께 꽃 도매시장의 새벽 장사에 끼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밤낮이 뒤바뀐 생활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 친구를 만나 무대조명을 설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업에 잔뼈가 굵고 손재주가 좋은 아버지를 눈여겨본 친구는 아버지의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자금과 새 빚을 끌어들여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흔한 친구와의 동업 이야기의 흐름처럼 친구에게 배신당한 아버지는 빚과 함께 혼자 남게 되었다. 친구는 돈을 들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악전고투가 시작됐다. 무대조명은 단지 손재주만 좋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익숙한 일은 인테리어 목공 분야였다. 무대조명은 각종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을 새로 익혀야 했다. 직원을 따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급여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다. 2년을 유지하다 이 사업도 접었다.

무대조명을 한 인연을 바탕으로 무대설치 사업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분야만큼은 아버지의 특기를 살릴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은 변수가 너무 많았다. 주로 서울시 행사가 있으면 행사 주관 업체를 통해 일을 발주받곤 했는데 그 사이에 원청업체가 하나 더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이것저것 떼어가고 나면 남는 게 그다지 없었다. 게다가 외부 행사는 날씨가 중요하다. 야외 활동을 하기 좋은 봄과 가을에 일이 많았다. 그러나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졌다. 비가 오면 공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이런 행사들은 경기에 민감했다. 지역 축제처럼 지방정부의 돈이 풀릴 때는 그나마 조금 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줄어들었고 경쟁이 심해졌다. 굴곡이 심한 사업으로 생계의 방편을 삼으니 일이 없는 달에는 카드로 버텼다.

‘위기와 기회’ 외환위기… 경매로 집 마련

어머니는 이런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집을 사기 전부터 촉각을 곤두세웠던 모양이다. 아버지와의 결혼은 가족의 굴레를 어머니와 동생들에서 아버지와 나로 바꾼 것에 불과했지만 무엇이든 주도적으로 해보려 노력했다. 집을 사자마자 젊어서 배우지 못한 것을 만회하고자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고 컴퓨터도 배우기 시작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가진 것을 나누기 좋아하는 어머니는 사는 곳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장 노릇을 했다. 공장에 다니던 시절에는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 집에 찾아가 돈을 줄 때까지 누워 일어나지 않아 기필코 돈을 받아낸 일도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컴퓨터 학원에서 구청 녹지과 공무원을 남편으로 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경매를 통해 집을 마련한 어머니는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집이 재건축 지역으로 선정되자 가격이 올라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게다가 집을 사자마자 사기를 당해 꽤 큰돈을 날린 사건도 있었다. 어머니는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구청 공무원 남편을 둔 아주머니는 마침 동네의 부동산 투자 고수였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예전에 땅투기로 재미를 많이 보았고 한창 많이 벌 때는 집 안에 굴러다니는 돈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과장이 섞인 말이었지만 남편이 일반인보다 빠르게 개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자리의 담당 공무원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씀씀이가 크고 호방한 성격의 아주머니였다. 어머니는 지방 토지에 투자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마침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급격히 오르던 2003~2004년 즈음이었다. 어머니는 기획부동산을 통해 강원도 태백과 제주도에 각각 5천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땅을 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바심에 따르기보다는 차분히 기다려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두 곳 모두 실패한 투자로 드러났다. 부동산을 잘 안다던 그 아주머니는 우리를 호구로 본 사기꾼이었는지, 이미 토지 투기의 시기는 그 아주머니의 호황으로 끝난 것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강원도에 사둔 땅은 도로 부지로 결정돼 보상금이 산정되자 제대로 된 가격이 드러났다. 제주도의 땅은 아예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 지금 제주도 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는데도 말이다. 투자하기 위해 저축을 줄이고 빚까지 끌어쓴데다 아버지 사업의 수입이 들쑥날쑥하자 빚은 점점 늘어갔다. 이런 상태로 2007년 그날까지 버틴 것이다. 경황이 없어 어머니의 검정고시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빚 청산 위해 생애 첫 집 포기

그나마 집값이 처음 샀을 때보다 두 배 정도 올랐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6천만원에 산 집을 1억2천만원에 팔 수 있었다. 집을 팔아 카드빚과 사채빚 등을 갚고 나자 4천만원이 수중에 남았다. 남은 것을 추슬러 작은 집 전세로라도 갈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의 절정기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일까. 남은 돈을 가지고 1억5천만원짜리 빌라를 샀다. 물론 1억1천만원 전세를 끼고 산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은 근처 반지하 월세방으로 이사했다. 빌라 가격이 오를 때까지 버티는 참호 같은 집이었다. 이 집이 그로부터 5년 동안 우리 집의 최전선이 되었다. 2012년이 지나자 오랜 대치 상태는 어느 정도 결말이 드러났다. 집값은 오르지 않았고 집은 팔리지도 않았다. 5년간 모은 돈으로 반지하 방을 벗어날 수는 있게 되었다. 낡고 습하고 작은 반지하 참호 생활이 끝났다. 이제는 여름 햇볕을 그대로 받는 빌라 꼭대기층 월세방이다.

나는 학교에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했다. 위장 전입으로 들어간 초등학교부터 문제가 있었다. 집이 멀어 지각을 밥 먹듯 하자 내 실거주가 들통 났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가 모토였던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게 퇴학을 종용했다. 이듬해 학교 근처로 이사 오긴 했지만 학교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초등학교 성적은 꽤 준수한 편이었다. 4학년 때 시험에서 31개를 틀린 반장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담임이 27개를 틀린 내 성적은 의심했다. 담임이 그렇게 나오자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 대신 게임에 열중했다. 방과후 나머지 시간은 보습학원에 가거나 태권도를 배웠다.

아버지 회사 직원이 회삿돈을 가지고 도망가자 그 직원 숙소의 게임기가 내 차지가 되었다. 삼성 겜보이로 시노비나 소닉 같은 오락을 하고 놀았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처음으로 펜티엄 컴퓨터가 생겼다. 처음 집을 산 뒤 집 안의 가전제품을 모두 바꾸면서 함께 산 것이다. 제대로 신혼을 시작하지 못한 어머니는 처음 집을 사면서 신혼 때 못한 살림 장만을 하게 된 것이다. 전화 모뎀을 쓰던 시절 PC통신 아이디가 없던 나는 01411로 접속하거나 친구의 아이디를 빌려서 게임을 구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엿보는 일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게임잡지를 매달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게임잡지를 사면 ‘발더스 케이트’ 같은 유명 게임 정품을 함께 끼워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게임 개발자의 꿈을 조금씩 꾸기 시작했다. 2000년을 한 해 앞둔 시절, 벤처 열풍이 불던 때이기도 하다. ‘스카이 러브’ 같은 채팅 사이트에서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누나를 따라 성당에 나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애당초 동네 친구 같은 부류에 정을 붙이지 못한 나는 복장이나 두발 같은 낡은 교칙을 고수하는 근처 학교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는 서대문구에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공통학군 고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입학과 동시에 게임 개발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알아보았다. 처음 간 곳은 신촌에 새로 생긴 ‘○○○게임아카데미’였다. 총과정을 이수하는 비용이 당시 40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문제가 많았다. 급조된 커리큘럼도 문제였지만 애당초 게임 개발과 그다지 관계없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함께 다니던 원생들과 소송을 불사해 학원비를 돌려받고 동작구 사당동에 자리한 다른 학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옮긴 학원이었지만 무사히 마치지는 못했다. 졸업을 앞두고 당시 유행하던 홍역에 걸리고 만 것이다. 졸업 작품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다음해 내가 배우고 싶던 게임 기획 과정이 비로소 생겼으나 혼자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과거는 살았던 곳에서 본 풍경 반영

평생 아파트와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잠시 그 언저리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힙합 동아리 활동을 활발히 했다. 힙합은 랩을 통해, 동아리 활동은 연애와 함께했다. 당시 여자친구는 송파구의 올림픽선수촌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한번은 여자친구의 학교 축제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도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여자친구의 학교는 시설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그 학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기악 실기를 의무적으로 하는데 피아노와 리코더는 제외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누구나 배우는 피아노는 아예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리코더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당시 여자친구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니 학교 축제의 규모와 질이 달랐다. 내게는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어느 날 여자친구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미대를 준비하느라 학업과 실기 연습에 바쁘니 대학에 가서 다시 만나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게임 개발을 준비하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느냐, 그래도 수능시험 정도는 보느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여자친구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살던 곳의 풍경이 아직도 기억날 뿐이다. 나와 내 가족의 과거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본 풍경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도 위기도 한발씩 늦게 보내준 내 주변의 풍경. 내 주변의 풍경은 파도의 큰 너울이 해변에 부딪혀 부서지고 난 작은 물결같이 늦게 오는 잔상 같은 게 아니었을까. 여자친구가 보는 풍경이야말로 그 큰 너울의 일부분은 아니었을까. 그녀와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운 좋게 각자에게 동시에 닿았던 전파를 통해 전해진 풍경 때문은 아니었을까.

구술 C·정리 박재현

투기의 끝자락 호구로 가는 길

1990년대는 유난히 좋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발생하기 전까지 연평균 7%가 넘는 성장 속에서도 주택가격은 오히려 조금씩 떨어졌다. 올림픽 이후 급등하던 주택가격은 주택 200만 호 건설의 일환이던 1기 수도권 신도시 개발과 토지 공개념 도입으로 1991년부터 급격하게 안정됐다. 대신 호황의 영향은 소비에서 나타났다. 건설회사들은 성장하는 유통업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한신공영은 1988년 한신코아백화점을, 같은 해 화성산업은 을지로 장교빌딩에 쁘렝땅백화점을 개점했다. 다음해 삼풍건설산업은 자사가 지은 아파트 단지에 삼풍백화점을 열었다. 1990년에 전국 46개 점포, 매출 3조6천억원이던 백화점 산업은 1997년에는 124개 점포에 매출 12조6천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영업점을 확대하고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규모를 키우던 백화점들은 외환위기가 닥치자 경영난과 자금난에 몰려 폐점하거나 인수·합병으로 정리됐다. 급성장하던 뉴코아백화점이 무너져 롯데에 인수됐고, 한신코아백화점은 법정관리를 거쳐 세이브존에 매각됐다. 쁘렝땅백화점은 부도 처리돼 폐업했다.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투자에 제동이 걸리자 규모를 유지하는 임무는 가계로 넘어갔다. 신용카드 발급은 2000년 48%, 2001년 54% 성장해 2002년에는 1억 건을 돌파했다. 여기에 현금서비스 한도가 자율화됐다. 외환위기 직후 10조원대의 신용카드 대출액은 2002년 말이 되자 60조원을 넘어섰다. 그리고 한계는 빠르게 찾아왔다.

새로운 산업의 기회는 정보통신 기술에 있었다. 2000년 벤처 거품의 혼란이 있었지만 인터넷과 단말기 시장은 제조업은 물론 각종 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자극했다. 게임산업도 매년 10% 이상 성장해 곧 10조원대 진입을 앞두고 있다. 서울의 경제활동별 지역내총생산 통계를 보면 더욱 극적이다. 1988년부터 2011년까지 실질가격을 기준으로 성장세를 살펴보면 제조업 규모가 20% 이상 줄어든 반면, 정보통신업은 8배 넘게 성장해 제조업 규모의 3배 가까운 25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36조원대의 금융·보험 업종이 같은 기간 4배 정도 성장한 것을 감안하면 정보통신 분야의 성장 속도는 단연 두드러진다.

전파가 도시의 공기를 채워가는 동안 땅 위에는 각종 개발사업이 시행됐다. 외환위기 극복 방편으로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가 있었다. 1998년 급락한 주택가격은 이듬해 반전하더니 월드컵에 열광하던 2002년부터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개발 소문이 곧 가격에 반영됐다. 이 흐름에 기획 부동산 사기도 기승을 부렸다. 개발 호재를 홍보하며 지방의 쓸모없는 땅을 잘게 분할해 한 번도 땅을 보지 못한 고객에게 전화를 통해 팔았다. 2000∼2006년 전국의 토지 거래량과 거래 면적이 크게 증가했다.

몰락의 여파와 마찬가지로 성장의 여파도 도시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가계도 기민하게 대처해야 했다. 기회를 알아차리고 붙잡는 순서가 열매를 수확하는 순서이기도 했다. 몰락과 성장의 쌍곡선이 눈앞에서 교차하자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개별 가계가 자신의 위치와 순서를 파악하고 대처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 기회인 줄 알고 붙잡았지만 마지막 호구가 될 수도 있었다.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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