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3:53 수정 : 2014.01.07 10:37

구태언 변호사는 최신 수사·소송 기법에도 밝은 편이다. 국내에서 ‘디지털 포렌식’을 처음 수사에 접목한 검사였고, 최근에는 컴퓨터·모바일 등에 담긴 데이터를 증거로 활용하는 ‘전자증거개시’(e-Discovery)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로 악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다. 2008년의 일이다. 정부와 여당은 악플을 규제하기 위한 ‘인터넷 실명제’(정식 명칭은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법이 만들어졌고, 2009년 1월부터 일일 방문자 10만 명 이상의 누리집에서 댓글을 달려면 의무적으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됐다.

명예훼손,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한 선거법 위반, 근거 없는 욕설 등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악플은 골칫거리였다. 2007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디스커스’(Disqus)라는 벤처업체는 누리꾼이 블로그나 뉴스 등 자신이 인터넷에서 쓴 모든 댓글을 한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이 서비스의 수요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곧 페이스북·트위터라는 무섭게 확장하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만났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아이디로 로그인해 어디에서든 댓글을 달 수 있었고, 그 댓글은 해당 게시글의 댓글로도 달리고, 자신의 SNS 타임라인에도 실렸다. 이 서비스는 ‘소셜댓글’이라고 불렸다.

기술에 빠삭한 변호사… 공대 출신이세요?

2011년 4월 기자는 국내에 도입된 소셜댓글 서비스에 대해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가 나간 뒤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대형 로펌 김앤장에 근무하고 그 전에는 서울중앙지검 검사였던 구태언 변호사였다. 구 변호사는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실시해도 악성 댓글은 안 없어지고, 오히려 인터넷의 가능성을 죽이고 있다. 한국 정부가 못한 일을 미국 벤처기업이 기술로서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기사에 대한 소회를 전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

당시 기사는 악성 댓글을 제거하는 소셜댓글이 오히려 제한적 본인확인제 때문에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이 ‘본인 확인’을 요구하지만, 소셜댓글은 SNS의 ‘로그인’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본인 확인이 필수인 누리집에서 소셜댓글 서비스만 사용하면 불법이 되는 셈이었다. 구 변호사는 “인터넷의 자정작용 가능성 자체를 없애는 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번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기사에 공감을 표시하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의 블로그가 등장했다. 몇 개의 글을 검색했다.

“한국은 정보통신 강국이라기보단, ‘정보쇄국’에 가깝다. 구한말 쇄국정책을 펼치는 모습과 유사하다. 정보통신 관련 규제로 인해 자유로운 창의성과 기술발전을 어렵게 한다.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한국의 금융 보안은 이미 공인인증서가 지키고 있지 않다. 오히려 공인인증서 사용으로 인해 보안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기업들이 스스로 보안을 강화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 공인인증서는 대표적인 후진적 규제다.”

그의 블로그에는 정보통신 관련 규제을 비판하는 내용이 상당수였다. 아이폰의 신기능,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를 소개하기도 했다. ‘무슨 변호사가 이리 기술에 관심이 많을까’가 구 변호사를 접한 첫인상이었다.

1년여가 지난 2012년 9월, 구 변호사는 ‘테크앤로’(Tek&Law)라는 기술 분야 전문 로펌을 설립했다. 2명이 시작한 로펌은 1년 만에 7명으로 늘어났다. 본인을 제외하곤 모두 공대 출신 변호사였다. 구 변호사는 “발전하는 기술 환경에 대응하는 법률 서비스가 절실한 상황이다. 특히 정보통신 기술 쪽을 이해하는 법조인이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 기업들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법률시장이 개방되면 외국 로펌들이 해당 분야를 장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테크앤로는 지난 1년간 보안, 지적재산권, 개인정보 보호 같은 분야에서 자문 등의 업무를 맡아왔다. 지난해 테크앤로를 창업하기 직전엔 변호사 8명이 소속된 ‘행복마루’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간의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 유출’ 사건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구 변호사가 소속된 행복마루를 변호인으로 선임했고, LG전자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을 택했다. 구 변호사는 테크앤로에서도 기술 관련 분쟁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계획이다. 10월 중순께 서울 강남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구 변호사를 만났다.

사법연수원서 드러난 기술 본능

구 변호사는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곳에서 민주화 항쟁이 발생했다. 그는 “총소리가 들려서 어른들이 외출을 못하게 했고, 어머니가 유리창을 솜이불로 막았던 것이 기억난다. 총알이 솜을 뚫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1980년 가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시기는 서대문중학교 2학년 때인 1982년이었다. 당시 세운상가에선 애플에서 출시한 개인용 컴퓨터 ‘애플투’의 복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땐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된 애플컴퓨터가 없었다. 복제품이어도 가격은 상당했다.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합쳐 25만원이었다.

“25만원은 평범한 공무원인 아버지의 몇달치 월급이었어요. 하도 조르니까 부모님이 큰맘 먹고 사주셨죠. 그때 애플투를 보고 컴퓨터에 대해 처음 감을 익혔어요. 프로그래밍을 해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테이프에 담기도 했고,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서 테이프에 담긴 게임을 사기도 했죠.”

구 변호사는 경기고, 고려대 법대 등 대표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그는 “평준화 세대로 경기고 근처에 살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반 당시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3개월만 살고 영동고등학교 인근 주택의 반지하 셋방으로 다시 이사를 갔다.

“공무원 분양에 당첨돼 주공아파트로 이사 갔지만, 잔금이 없어 바로 나왔죠. 그 좁은 방에 네 식구가 함께 살았고, 원래 공대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갔죠.”

대학에서 그는 평범한 법대생이었다. 고시 공부에 전념해 1992년에 합격했다. 하지만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 다시 본래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는 PC통신 시대였다. 그는 하이텔의 젊은 법조인들 모임인 ‘법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이 너무 재밌더군요.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을 오프라인에서 다시 만나고, 만남 후기를 글로 남기고, 채팅방에선 24시간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너무 신기했죠. 저는 그때부터 네트워킹이 가져올 혁명적인 변화를 직감했어요. 여러 새로운 법률적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도 느꼈어요. 이미 법촌에서도 공동구매로 돈을 떼먹는다든지, 서로 안 좋은 말을 해서 갈등이 생기는 문제가 있었거든요. 정보통신 관련 법이 전혀 없던 시절 나중에 발생할 문제들을 미리 겪었죠.”

구 변호사는 1992년부터 회원 3500명인 법촌의 대표(시솝)를 맡았다. 그가 공익법무관을 3년 내내 서울중앙지검에서 했던 것도 이유가 있다. 당시 법무부의 과제는 국가송무의 전산화였다. 당시만 해도 사건을 접수하고 배당하는 것이 수기로 이뤄졌다. 대검찰청의 정보통신과장이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기 위해 공익법무관 2명을 골랐고, 그 가운데 한 명이 구 변호사였다. 3년간 국가송무의 전산화를 담당하며 검찰청 안에서 직원 간에 프린터, 파일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작업했고, 검찰청 내에서 조립 PC를 구매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며 부품을 구해 조립해줬다. 1995년엔 법무관 출신으론 유일하게 한국정보법학회 창립멤버로도 참여했다. 학회의 총무로 누리집을 만드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해킹 사건 때 기업 변론하는 이유

1998년 검사로 임관한 그는 한동안 컴퓨터와 관련 없는 일에 매진했다. 그렇지만 곧 상황이 바뀌었다. 2002년 서울중앙지검으로 발령받아 당시 처음 생긴 컴퓨터범죄수사부에 합류했다.

“1990년대에는 컴퓨터 관련 범죄가 대부분 불법 복제였어요. 1996년 형사6부에 생긴 정보범죄수사센터가 그 업무를 담당했죠. 하지만 인터넷 시대가 열리자 지적재산권 분쟁과 디지털 증거 분석 등 다양한 문제가 생겼죠. 이에 대응해 생긴 것이 컴퓨터범죄수사부예요.”

컴퓨터범죄수사부(첨단범죄수사부)에 합류한 그는 피의자의 PC에서 삭제된 파일을 복원해 증거로 제시하는 ‘디지털 포렌식’ 수사기법을 처음으로 활용한 검사가 됐다. 2004년엔 한게임의 게임머니 180억원어치가 위조된 사건을 수사해 피의자를 모두 검거하기도 했다. 그 뒤 컴퓨터범죄수사부가 주도해 대검찰청에 ‘디지털포렌식센터’를 설치했다. 지금까지도 이 센터는 여러 사건의 증거물 분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줄곧 첨단범죄수사부에 머물렀던 그는 2005년 8월 유전개발 특검에 참여했다. 검사로서 그의 마지막 경력이다.

“이광재 전 의원을 잡기 위해 당시 야당(한나라당)이 만든 특검이었죠. 그때 저는 특검에서 최초로 디지털 포렌식 수사를 했어요. 당시 확보한 컴퓨터를 분석해 여러 증거를 찾아냈죠.”

이 전 의원은 당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05년 12월 그가 검찰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버지의 병환이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부친의 병원비를 검사의 급여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대형 로펌 김앤장의 문을 두드렸고, 그의 기술 소양은 수사가 아닌 변론과 자문에 활용됐다. 그때부터 그는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들을 맡기 시작했다. 엔씨소프트 명의도용(2006년), 옥션 고객정보 1800만 명 해킹(2008년), 현대캐피탈 고객정보 75만 명 해킹(2011년), 네이트 고객정보 3500만 명 유출(2011년) 등 대표적인 개인정보 관련 사건들을 수임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어떤 쪽의 변론을 맡았을까. 대부분 개인정보 유출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유출 사고가 일어난 기업 쪽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떻게 얘기할까.

“해킹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는 해커입니다. 그렇다면 해킹을 막지 못한 기업들은 어느 정도 과실이 있을까요. 그건 법률상 주의의무를 다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해커가 정보를 훔쳤다고 무조건 기업의 책임이 되진 않습니다. 기업에 과도한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사고 발생 자체를 은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건들도 기업들의 자발적인 신고였고, 실제 신고하지 않은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또한 인터넷 업체와 금융업체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이전에 한국의 인터넷 환경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이 기업들이 개인정보를 수집하지 않으면 정부의 규제를 받았고, 공인인증서 환경에서 금융 보안이 더 취약해진 측면도 있습니다.”

공인인증서를 사용하려면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액티브엑스만을 사용해야 하고 각종 백신을 내려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 서비스에 대한 종속성이 강해지고 백신을 내려받는 습관은 무분별한 바이러스, 악성코드 감염을 유발한다. 해킹 사건에서 기업에만 책임을 묻는 것은 근시안적 조처라는 것이 구 변호사의 주장이다.

구 변호사는 벤처업체들의 신규 서비스들에도 관심이 많다. 최근 구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중국산 게임 ‘커피러브’가 한국 게임 ‘아이러브커피’를 표절했다는 의혹이다. 이 사건에서 한국 쪽 변호를 맡은 구 변호사는 결국 애플스토어에서 중국 게임을 몰아냈다.

“기술 분야는 소송을 해도 실익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아요. 승소 가능성을 신속히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아이디어를 특허로 등록해 권리로 보호받는 것도 중요하고요. 게임은 일부분이 유사하다고 표절이 되진 않아요. 다만 커피러브는 표절에 가까운 유사성을 서면으로 잘 정리했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해 당국을 설득했어요. 이처럼 기술 분야의 벤처업체들도 법적 분쟁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과 법률 모두 말할 수 있는 법조인 필요

그는 인터넷의 자정작용과 가능성을 믿는 편이다. 이에 대해선 약간 엉뚱한 얘기를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 기술 혁명과 관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준법 혁명’이라고 말했다.

“젊은 날 법대를 다니며 법은 정의라고 배웠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에 절망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재벌들이 사법 처벌을 받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죠. 모바일 시대의 소통 혁명으로 인해 사회적 이슈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도덕적인 공분도 정서적으로 확대되잖아요. 더 이상 재벌이라고 특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기술의 발전이 준법 혁명을 이끌었다고 봐요.”

구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어떤 전형을 만들려는 걸까. 그는 ‘기술’과 ‘법률’이라는 다른 언어를 모두 말할 수 있는 법조인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국제법률기술협회 회의가 열렸어요. 그 회의에선 입는 기술(구글글라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기술과 법이 융합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졌죠. 국내에는 기술을 이해하는 법조인이 태부족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 법체계와 부딪혀 모순이 발생하는 현상도 잘 해결되지 않죠. 향후 기술 환경을 위해서도 기술변호사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글 윤형중 <한겨레> 토요판팀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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