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5:49 수정 : 2013.10.07 15:49

내 집 마련의 가정사와 주택 건설의 역사는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높은 성장률과 높은 금리 그리고 기업이 많은 빚을 지던 이전 시기와, 낮은 성장률과 낮은 금리 그리고 가계가 많은 빚을 지는 이후 시기다.
나는 이 글을 내 소유의 서울 마포구 신공덕동 아파트에서 쓰고 있으며, 인생의 절반 정도를 아파트에서 살았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경기도 수원에서 지냈으며, 인생의 나머지 절반은 아파트 아닌 곳에서 지냈다. 그러니 이 글은 마포구에 대한 이야기나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가 수원에서 태어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당시 수원은 아주 작은 도시였고, 번화가는 수원 화성 4대문 안쪽에 한정돼 있었다. 그 중심은 ‘남문’ 주변의 시장과 중앙극장, 그 뒤편의 일명 ‘로데오거리’였다. 4대문 안쪽에는 남문시장·거북시장과, (요즘은 통닭으로 유명해진) 매산시장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장안문(북문) 거북시장 근방 북수동이었다. 작은 집에서 조부모님·부모님·고모님이 모여 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서울 종로 쪽으로 출퇴근을 했다. 지금이야 수많은 노선버스와 지하철이 연결돼 있지만, 예전에는 북문 쪽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타는 시외버스가 다닐 정도로 서울과의 연결성이 좋지 않았다. 대강 복기해보니 당시 아버지의 출퇴근길은 편도로 2시간 넘게 걸렸다. 야근과 회식도 잦은 편이어서, 내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와 저녁을 같이 먹은 기억이 많지 않았다.

집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두 번째 집에서 시작된다. 수원 정자동에 있는 방 4개짜리 단독주택이었다. 나와 남동생은 조부모님과 함께 안방에서 생활했고, 부모님은 건너편 방을 썼다. 화장실 옆 안쪽 방은 고모가 쓰다가 결혼 뒤 창고로 바꾸었고, 나머지 방 하나는 서재로 썼다. 연탄보일러를 때던 집이라 새벽에는 누군가 연탄을 갈아야 했다. 늦가을 때쯤 연탄이 수북이 실려 들어와 지하실 창고에 쌓였는데, 그걸 본 기억이 몇 번 안 되는 것으로 보아 기름보일러로 교체했던 것 같다. 현관문 위에는 철제 셔터가 달려 있었지만 실제로 내린 걸 본 기억은 몇 번 없었다. 열쇠를 집 앞 화분에 두고 다녀도 막상 도둑이 드는 일은 드물던 시절이었다.

수원 권선구 공터 “여기가 우리 땅”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는 도보로 약 30분 거리에 있었다. 등굣길에 시멘트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낡은 집, 집 주변의 텃밭, 공터를 많이 지나쳐야 했다. 학교는 ‘노송지대’라고 불리는 길고 좁은 도로 입구에 있었고, 학교 맞은편에는 칠성사이다 마크가 있는 큰 탑이 서 있었다. 노송지대를 통해 안양 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SKC 수원 공장이, 계속 가다보면 고급 갈빗집들이 나타났으며, 나중에는 서울로 향하는 1번 국도와 이어졌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2년 정도 지난 뒤, 아버지가 어느 공터로 가족을 데리고 가서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말했다. 권선구 쪽인데 그 땅을 취득한 연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1989년께 아버지는 친척 아저씨와 함께 그 땅의 반에 이층집을 지었고, 할머니는 나머지 반의 땅에 텃밭을 일궜다. 나중에 차를 사면서 그 공터의 4분의 1은 땅을 파내고 시멘트를 부어 차고로 만들었다.

집이 커지면서 나만의 공간도 생겼다. 조부모님과 한방에서 생활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공부방이라는 명목하에 1층에 책상 2개가 들어가는 꽤 넓은 방이 하나 생겼다. 2층은 부모님의 생활 공간이었다. 마루에는 구형 전축이 놓여 있었고, 서재가 따로 있었으며, 부모님 방에는 비디오가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진 않았기 때문에 낮에는 (공중파를 녹화해 재방송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유선방송을 보거나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2층 부모님 방에서 봤다. 서재에서 낡은 책을 뒤적거리며 놀거나 전축으로 음악을 듣기도 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중학교 배정을 (어린 마음엔) 꽤 먼 곳으로 받았다는 점이다. 학교는 수원과 용인의 경계 근처 남부경찰서 뒤편이었다(나중에 박정근 덕분에 유명세를 탄 그곳). 그 학교를 다니려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도보 30분+버스 30분’이라는 미묘한 거리라 동네 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봉고차’를 탔다. 그 상황이 바뀐 것은 1994년 생애 첫 아파트로 이사한 다음이었다.

당시 큰아버지는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면서 예전 살던 정자동 집 2층을 수리해 살고 있었는데, 조부모님이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전 가족이 다시 1층으로 옮겼다. 우리 가족은 공군기지 근처에 있는 동아건설의 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갔다. 꽤 대규모의 단지였는데도 부지가 워낙 넓어 아파트와 도로 사이에 너른 공터가 있었다(지금 그 공터는 고속버스터미널과 이마트가 차지하고 있다). 아파트는 40평이 넘었다. 40평 넘는 집에 4인 가족이 들어앉으니 집이 꽤나 넓게 느껴졌다. 동생과 내가 같은 침실을 썼고, 둘이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책방이 따로 생겼다. 게다가 집 주위에는 (공터가 아닌) 공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집에 대한 기억은 거의 주말에 한정된다. 학교에서 특목고 대비반에 편입되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었고, 특목고에 입학한 뒤에는 아예 기숙사 생활을 하며 토요일 오후에 집에 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귀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거라면 비디오를 참 많이 봤다는 점인데, 당시 동네 비디오 가게의 정책 때문이었다. 최신 프로는 2천원이었지만, 최신 프로를 당일 반납하면 구프로 하나를 더 빌려줬다. 최신 프로를 빌려다 두 번을 연거푸 보고 구프로를 하나 더 빌려온 다음 일요일에 마저 보는 방식으로 일주일에 6~7시간 영화를 봤다.

외환위기 큰 타격 없었지만 전세로

그러던 생활은 내가 고3이 되던 무렵에 끝난다. 주말에도 기숙사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집에는 1~2개월에 한 번씩 돌아갔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졌고, 그 아쉬움은 심야방송을 들으며 메꿨다. 전영혁 DJ가 읊어주는 시를 적어두었다가 학교 앞 서점에서 구해다 읽으며 소설책도 가끔 사다 봤다. 그러다보니 서점 아저씨와 친해졌는데, 아저씨가 수원 문학 동인에 속해 있었는지 <수원문학>이나 수원 출신 시인들의 시집을 몇 권 주곤 했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왔다. 아버지는 실직한 뒤 재취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집은 수원역 앞 대한방직 자리에 새로 지어진 대우아파트 전세로 옮겨졌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을 대준 걸 보면 아주 큰 타격을 입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마포와 첫 인연을 맺(을 뻔하)게 되는데, 부모님이 마포에 오피스텔 몇 채를 구매할 계획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흑자부도의 시대를 맞아 깡통이 된 오피스텔이 여럿 있어, 몇천만원이면 목 좋은 곳에 있는 오피스텔을 살 만한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숙사에 입사했기 때문에 실제로 오피스텔을 사진 않았는데, 노무현 정권 끝 무렵 마포의 지가를 생각해보면, 그때 그 오피스텔을 샀으면 인생이 꽤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기숙사에 살다보니 주중에는 학교에 있다가 주말에 집에 돌아가서 음악 듣고 책 읽고 비디오를 보는,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이 이어졌다. 2학년 때 기숙사에서 쫓겨난 뒤 집에서 학교를 1년6개월 정도 다니다 입대했고, 제대 뒤에는 신림동 대학가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자취를 하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 자신의 생활 능력을 믿을 수 없었기에 하숙집을 고집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월 40만원 안쪽의 돈에서 전기와 물을 마음대로 쓰고 밥과 빨래까지 다 해주는 조건은 참 좋았던 것 같다.

당시 나의 생활은 완전히 집에 의존하고 있었다. 등록금과 월 35만원의 생활비가 주어졌고 하숙비까지 부담해주셨다. 월 35만원이면 살짝 쪼들린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밥 먹고 술 마시고 책 사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돈을 더 벌기보다는 가진 돈에 필요를 맞추는 습관이 들어 있기도 했고, 하숙집 밥을 워낙 잘 챙겨 먹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돈은 사실 부담되는 금액이다. 하지만 당시는 부모님도 자신감을 가지실 만한 시기였던 것 같다. 전세로 살던 집을 빼고 집을 사서 옮기고 나자 수원의 역세권이 폭발했다. 수원이 종점이던 지하철은 병점까지 연장되고, 천안을 넘어 신창까지 연결됐고, 애경백화점이 지은 민자역사가 들어섰다. 이 노선이 기존의 ‘시외버스 타고 들어오던’ 경기도 인구를 대거 흡수하고, 수원과 오산 사이에 자리잡은 대학들이 ‘강남에서 30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학생들을 대거 모집하자 그 사람들이 술 먹고 즐길 중간 기착지인 역전의 상권이 커졌다. 거기에 부동산 열풍이 더해졌다.

그러나 집의 가치가 아무리 상승해봤자, 부동산이 돈이 되려면 그걸 팔고 다른 떠오르는 지역에 투자를 해야 한다. 종로로 출근하시는 아버지에게 ‘수원역 도보 10분’이라는 입지 조건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2007년 말에 취직하며 “결혼하기 전에 잠깐 같이 살자”는 부모님의 제의를 받아들여 수원 아파트로 돌아간 상황이라, 교통 요충지인 수원역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어쨌든 총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으로 서서히 돌아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빚을 얻어 집을 살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치솟는 지가를 다루는 소식을 볼 때마다 ‘투자하여 불린다’는 생각보다는 ‘집 사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생산력이 확 떨어진 경제가 이 지가를 버틸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붕괴에 희망을 걸고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이 커졌고, 붕괴가 올 것을 대비해 수익률이 잘 나온다는 펀드도 들지 않고, 적금만 부어 정기예금으로 옮겨 담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

‘총알’ 모으는 손쉬운 방법 ‘캥거루족’ 되기

이런 방식으로 총알을 모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님께 빌붙어 사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살며 부모님의 눈치를 보다보면 돈이 모인다. 통근 거리가 멀다보니 밤 9시까지만 야근을 해도 집에 가면 11시가 넘었다. 택시비가 아무래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늦게까지 술을 먹는 일도 줄었다. 회사-집 셔틀을 돌다보니 씀씀이는 오히려 줄었고, 주말에는 서울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집에서 빈둥댔다.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밥과 생필품도 다 집에 있는데다 부모님이 요구하신 돈은 월 40만원이 전부였으니, 결국 2012년께는 그럭저럭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집값은 계속 하락 중이었다. 통장에 돈도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서울에 집을 구한다는 건,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1~2년 더 모아 대출을 받아도 현재 사는 집보다 (크기 문제가 아니라 접근성이나 집의 상태 면에서) 수준을 낮춰야 했다. 어딜 가든 수원 집보다 큰 이점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돈이 나중에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게 되기 시작했다. 돈이 얼마 없으면 집 욕심도 안 날 텐데, 이 돈으로 집을 구하려면 모은 돈을 다 쓰고 빚까지 꽤 져야 하니 말이다. 당시에는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했기 때문에 집(빚)이 족쇄가 되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붕괴만을 기다리며 ‘연착륙론’이나 ‘하우스푸어’ 등의 담론을 볼 때마다 짜증 섞인 조소를 보내던 중 동생이 결혼했다. 동생 부부에게 안양 역세권에 전셋집을 마련해주신 부모님은, 그들이 가까운 직장에서 잘 살며 편하게 출퇴근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굉장히 기뻐하셨다. 당연히 나에 대한 결혼 압박도 심해졌다. 그래서 집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빚을 끼고 이래저래 한다 생각해도 마땅한 곳은 없었고, 한성대입구나 녹사평 근방 다세대주택을 기웃거리는 게 전부였다. 이게 모두 돈을 더 모으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중산층 자녀들은 부모 덕에 금전적으로 안정된 삶을 산다. 분가 뒤 아파트를 구입할 때도 상당액의 보조를 받는데 이는 부모에 대한 심리적 부채로 남게 된다.
부모님도 그런 부분에서는 아직 부담이 크다 판단되셨는지 집이나 독립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계셨다. 그러다 박근혜 정부가 쐐기를 박았다. ‘생애최초주택마련대출’에 ‘양도세·취득세 면제’라는 2개의 부양책을 내놓은 것이다. 중도상환 수수료 없이 연 3.1%에 대출이 되고 세금까지 면제라니 버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봐두신 약수역 쪽 아파트에 ‘가기만 해보자’며 갔는데, 그게 또 화근이었다. 약수역 매물이 눈에 차지 않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여기까지 온 김에’ 하는 마음으로 공덕역 근처 아무 부동산이나 들어가서 소개받은 급매물이 하필이면 마음에 들어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어머니께서는 내가 드린 생활비를 장기주택마련 비과세저축에 넣고 계셨고, 이 돈도 꽤 쏠쏠히 모여 있었다. 집을 본 이후 통장을 이리저리 깨서 전세 끼고 구매하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 뒤 나는 부모님께 돈을 빌려 전세금을 빼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집에 담보를 걸어 대출을 받아 부모님께 갚았다. 그렇게 나는 빚과 집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나이가 35살 미만인 관계로 양도세·취득세도 면제되지 않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이번 대책(?)으로 받은 혜택이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사하고 전입까지 마쳤으니 먼저 빚을 상환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상환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놀랄 만한 일이 두 가지 발생했다. 첫째는 오른 집값이었다. 그 놀라움은 ‘망할 수밖에 없다 확신하던’ 부동산 시장이 망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우스푸어를 비웃던 내가, 막상 자신이 집과 빚을 끼게 되자 그런 뉴스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정말로 놀라웠고, 동시에 슬펐다.

둘째는 생활비였다. 반찬 몇 종류에 식재료를 조금 샀더니 4만원, 가재도구 몇 가지 사니 6만원, 돈이 정말 여기저기서 새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정녕 캥거루 혹은 흡혈귀같이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 있으니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한 사람 더 먹지 않냐”던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집에서 밥 얻어먹고 생필품을 공유하며 아꼈던 돈이 정말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적금과 예금을 지시하며 여기저기 돈을 잘 관리해주시며 돈을 못 쓰게 하신 것 또한 돈 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부모님 덕에 마포에 내 집… 심리적 부채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모든 것은 내가 부모님 덕에 상당히 금전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달 돈이 어느 정도 들어오면 씀씀이가 오히려 안정된다. 그 돈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 부대비용도 줄어들고, 큰돈이 들어올 것을 기다릴 일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돈을 쓸 일도 없다보니 무언가를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 역시 많이 줄어든다. 결국 내 환경 덕에 돈을 안 쓰며 살 수 있었고, 그 환경을 조성하고 정기예금 전환 때마다 조금씩 보태주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여러 가지 대출과 선택지에 관한 정보를 부모님이 주셨기에 지금의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만큼 부모님께 심리적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만큼 도움을 받았으니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연애나 결혼도 부모님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것이다. 24평이라는 집의 사이즈 역시, 아이를 낳아 키운 뒤 더 큰 집으로 옮겨가는 하나의 단계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인생은 본의 아니게 상당 부분 어떤 트랙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그렸던 안정적 중산층의 모델일지도 모르겠다. 안정적 직장을 가진 부모가 사회에 나서는 아이에게 전세 등을 통해 일정 부분의 부를 양도하고, 자식은 양도받은 부를 통해 돈을 조금 더 빨리 모아 안정적 자산을 획득한 뒤 부모의 노후 부양을 담당하는 방식 말이다. 물론 이 모델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 같다. 부동산이 현재 모습과 같이 유지된다면 나는 자식에게 집을 구해줄 수 없을 테고, 부동산 시장이 변화한다면 부모가 굳이 집을 해주지 않아도 살 집을 마련할 방법은 생길 것이다. 전자라면 슬픈 일이겠고, 후자라면 조금 기쁜 일이겠다. 어쨌든 나는 어떤 세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하고 있다.

글 이기훈


한 손에 아파트

한 손에 빚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서울시에는 자가주택에 거주하는 143만9천여 가구가 있다. 서울시 전체 350만 가구 중 41%만이 자신이 소유한 집에서 거주한다. 약 36만 가구는 다른 지역에 집을 소유한 채 전·월세 등을 살고 있다. 서울시에서 거주하는 180만 가구가 어떤 형태로든 집을 소유하고 있다. 서울시는 2010년을 기준으로 연령별 주택 구입 시기를 조사해 공개했다. 이를 토대로 가구주 연령별로 파악할 수 있는 자가주택에 거주하는 가구만을 기준으로 추산해보면 2000년대에 집을 구입한 가구는 약 70만6천 가구다. 이는 전체 143만9천여 가구의 절반에 이른다. 국토교통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같은 기간 서울시에서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52만6천 가구다. 2012년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97.3%, 아직도 집이 모자란다.

내 집 마련의 가정사와 주택 건설의 역사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높은 성장률과 높은 금리 그리고 기업이 많은 빚을 지던 1997년 이전과, 낮은 성장률과 낮은 금리, 이번에는 가계가 많은 빚을 지는 1997년 이후다. 앞의 시기에 가계는 높은 금리를 바탕으로 저축을 통해 집을 샀다면 그 이후의 시기에는 낮은 금리를 바탕으로 빚내어 집을 샀다. 경제성장과 소득 증가를 원동력으로 주택 가격이 상승하던 앞의 시기가 끝나자, 부채 증가가 주택 가격을 끌어올리고 굼뜬 경제성장과 소득을 재촉하는 시기가 왔다. 2000년대의 아파트 가격 상승은 외환위기 이후 일어난 모든 변화를 집약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집값이 주는 조바심과 위기 이후 빠르게 진행되는 경제 계급의 분화가 주는 불안에 떠밀린 가계가 맞닥뜨린 미래의 최전선에 아파트가 있었다.

정부와 공기업의 부채가 1천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안에 가계부채가 1천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2년 한국의 명목국내총생산(GDP)은 1270조원이다.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활발히 지어지던 아파트의 거래가 멈추자 그동안 불가피한 임시방편으로 여기던 빚의 규모에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비싸기 때문에 빚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빚이 늘어났기 때문에 아파트가 비싸진 건 아닐까’ ‘사람들이 이 빚을 갚기 시작하면 아파트 가격은 어떨게 될까’ ‘애당초 소득을 모아 이 많은 빚을 갚을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은 각자 알아서 답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외환위기 이후 누적돼온 사회문제, 빈곤한 노인, 줄어드는 아이 수,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 등 이 중 누구에게 우선 국가의 재원을 배분해야 할지 같은 정치적 선택은 공공연히 강요된다. 돈을 탕진하는 일이 죄악시되자, 도리어 빚이 많은 사람일수록 공공지출에 거부감을 가진다.

한 손에 아파트를 쥐고 다른 한 손에 빚을 쥔 채 균형을 맞춰온 중산층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지금이 집을 살 때입니까?”글 박재현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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