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07 14:02 수정 : 2013.10.09 19:58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엄마가 있는 풍경 마마도>(KBS)가 눈에 들어왔다. 평균나이 68살의 중년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란다.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꽃보다 할배>(tvN)의 표절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그다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할머니 여배우들의 예능이 궁금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녀들의 잔소리와 수다가 쏠쏠한 재미를 준다. 거침없이 드러내는 입담과 속내도 은근히 재미나다. 그러다 화면에 떠오른 자막에 박장대소를 했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76세’. 출연진 중 맏언니인 김영옥이 막내인 이효춘에게 분홍색 하트무늬 잠옷을 선물로 받는 장면에 붙은 자막이었다. 큰 의미 없는 우스갯소리였고 어쩌면 주책없는 그녀들을 살짝 조롱하는 유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왠지 모를 쾌감이 있다. ‘사랑’과 ‘76’이라는 낯선 조합, 익숙한 것들을 비껴가는 의외성이 주는 즐거움이랄까.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혹은 허락하지 않는 도발적인 노년 여성의 욕망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물론 과한 해석이고 몰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행간을 흐르는 다양한 말과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앙드레 김은 아는 당신, 노라노를 아세요

3년 전, 노라노 선생님과의 첫 대면에서도 그런 즐거움이 있었다. 83살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나이, 직업, 이름,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앙드레 김은 알아도 노라노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패션에는 문외한인데다 ‘노라’라는 서구식 예명도 왠지 위압감이 들었다.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우연히 같은 이름을 쓴다는 데 애써 친밀감을 느낀 정도랄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노라는 예명이 아니라 본명이고(물론 개명한 이름이지만) 인생의 중차대한 결정의 순간, <인형의 집>의 ‘노라’와 같은 삶을 살겠다는 결심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이름도 그러하거니와, 83살에 현역 패션디자이너라는 것도 생소했다.

‘노라노’라는 간판이 붙은 2층 매장에 들어서니 여전히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는 패션디자이너가 그곳에 있었다. 멋스러운 검정색 슈트, 잘 정돈된 손톱, 메탈 목걸이에 팔찌, 두어 개의 반지, 그리고 날렵하게 말려 올라간 인조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83살 여성에게는 좀처럼 보기 드문 낯선 이 모든 조합이 결코 과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 새로운 여성 이미지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60여 년을 지켜온 노라노 선생님의 일상은 그날도 어김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껏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매장과 작업실을 오가며 분주히 옷을 만들고 있다. 수천 번, 수만 번, 아니 수천만 번을 더 반복했을 작업이건만 여전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출발과 과정을 모른 채 잔뜩 진열된 옷들만 접해온 나는 하나하나 완성돼가는 옷의 탄생 과정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적어도 수년에서 많게는 60여 년의 시간이 녹아 있는 작업실의 재봉틀이, 가위가, 몽당연필이, 그녀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잡지사 사진 촬영 중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그는 83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자신감이 넘친다.
드디어 마주한 자리에서 노라노 선생님은 오래된 검정 스크랩북을 꺼내놓았다. 거기에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시작한 당신의 패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대 젊은 시절의 노라노가 담겨 있었다. 당대를 생각하면 신비롭기까지 한 사진 속 노라노는 도발적이고 과감해 보였다. 매혹적이었다. 사진 속 젊은 노라노가 걸어온 시대가, 삶이 궁금했다. 노라노 선생님은 자신이 거쳐온 그 시대를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태어나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해방을 맞이하고, 또다시 한국전쟁을 겪었다. 군사 쿠데타를 목격했고 밥 먹듯 뒤바뀌는 정치권에 몸살도 앓아야 했다. 내가 책상머리에서 글로 배운 한국의 우여곡절 많은 역사가 그녀의 기억이고 경험이었다.

윤복희 미니스커트에 여성의 자존심 입히다

그 우여곡절 많은 시대 속에서 노라노 선생님은 요샛말로 ‘돌싱’이 되었다. 그것도 19살에.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모집을 피해 결혼을 선택한 선생님은 결혼 2년 만에 이혼을 결심했다. 시댁의 며느리를 향한 처사가 “경우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시댁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며 눌러앉느니 차라리 온갖 수모와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이혼을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때 ‘노명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노라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말처럼 여자 혼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패션계에서 여성 디자이너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던 1956년, 당시 전후 사회적 분위기는 위기에 놓인 가부장제를 재건하기 위해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근검절약을 최고의 미덕으로 내세운 시기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패션 같은 사치스러운 풍조를 조장하는 이혼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리 만무하다. 게다가 서구 문물과 서구적 가치가 조선 여자들에게 평등이니 권리니 하는 쓸데없는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 있다는 어르신들의 위기의식이 존재했던 터라, 서양 의복을 만드는 노라노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주범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는 이래저래 ‘나쁜’ 여자였던 것이다.

노라노 선생님의 많은 시도는 그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쁜 여자였기 때문에! 여성에게 요구되는 당연한 태도와 위치,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라노라는 디자이너가 나쁜 여자였기 때문이다. 1963년 노라노 선생님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디자이너 여성 기성복을 시도했다. 선생님은 ‘일하는 여자’의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선 직장여성들이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멋지고 편안한 옷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흔히 ‘옷이 날개’라 하지만, 노라노 선생님은 “여성에게 옷은 무기”라 말한다. 그래,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주로 티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즐겨 신지만 이따금 결전에 임하는 자세로 ‘잘 차려입고’ 집을 나설 때가 있다. 섹시함, 당당함, 도도함, 그 무엇을 원하든 어떤 누군가와의 대면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거울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했던 경험이 있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노라노 선생님의 옷은 화려하거나 호화롭다기보다는 단정하고 정갈하다. 당당하다.

평생 옷을 대충 입은 적 없는 ‘신여성’

하지만 노라노 선생님의 패션은 획기적이고 과감한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 선생님은 세계적인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킨 발칙한 여성들의 욕망에 기꺼이 동참했다. 여성들의 위험한 도발에 대한 남성 사회의 엄포를 간단히 무시하고 윤복희라는 스타를 통해 한국 사회에 미니스커트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스크린 속 여배우를 통해 많은 유행과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들의 생각을 바꾸고,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는 노라노 선생님의 철학은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상상력이었지만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도전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60년 넘게 한길을 걸어온 노라노는 여성의 몸을 세심히 다룰 줄 아는 패션디자이너였다.
2012년 ‘라비앙 로즈전’에 전시된 노라노의 의상들과 1950년대에 찍은 노라노의 젊은 시절 모습(작은 사진). 그는 며느리를 향한 처사가 “경우에 맞지 않았다”며 결혼 2년 만에 이혼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60년 넘게 한길을 걸어온 노라노 선생님은 여성의 몸을 세심히 다룰 줄 아는 패션디자이너였고, 당대 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재빨리 읽어내고 견인하고 호흡하는 문화기획자였다. 그 다양한 욕망과 함께 때로는 주류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적 가치에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계를 거닐기도 했다. 물론 눈치챘겠지만, 노라노 선생님의 인생은 안락하고 안전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 가정환경은 아마 선생님 인생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었을지 모른다. 또한 노라노 선생님의 인생은 모범적이기도 했다. 일찍이 미국 진출에 성공해 국가 브랜드의 위상을 높였고 섬유산업의 수출 역군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노라노라는 인물이 걸어온 협상과 타협, 갈등의 지점과 시간을 평평하고 매끈하게 정리할 순 없다. 나는 그녀가 여성으로서 버텨온 83년의 긴 시간과 수고로움에 의미를 발견한다. 또한 흔히 소비와 사치로 인식되는 패션이라는 그녀의 세계에서 당대 여성들의 욕망과 문화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3년여에 걸쳐 노라노 선생님을 카메라에 담았다. 노라노 선생님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선생님이 견뎌온 시간과 기억이 단지 당신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선배 여성에게서 나의 내일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잊혀진 많은 여성의 기억과 경험이 우리 모두의 기억과 역사로 기록될 수 있는 계기를 얻고 싶었고, 정해진 길이 아닌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을 걷게 되는 순간에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지닐 기회를 얻고 싶었다.

현재를 함께 걷는 동반자와 찍은 다큐

10월, <노라노>라는 다큐멘터리를 세상에 내놓을 요량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의 이유와 질문에 대한 답을 난 얻었을까. 질문은 또 다른 질문과 과제로 이어진다. 노라노 선생님, 그녀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온 많은 여성의 삶은 완결될 수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은, 앞으로 지속돼야 할 많은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83살의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선생님을 통해 바라본 매혹적인 시간은 과거였지만 현재였고, 다른 시대를 살아온 생소한 기억이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같은 기억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삶이 ‘완성’되는 나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음을, 갈등과 선택의 길 위에서 언제나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무엇을 하든 ‘딱 좋은 나이’가 아닌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도반’(道伴)이라는 말을 배웠다. 20대, 40대, 80대, 다른 시간들을 살아왔지만 지금 여기서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 그래서 같은 시간의 길을 걷고 있는 인생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를 만든 당대의 많은 ‘노라들’, 그리고 내일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노라들과 함께 걷게 될 앞으로의 길을 설레며 기대하게 된다.

오늘도 노라노 선생님은 늘 그러했듯 그 자리에서, 늘 그러했듯 옷을 짓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하듯 어제와는 또 다른 길을, 시간을 함께 걷고 있음이 분명하다.

글·사진 김성희 다큐멘터리 감독.

여성주의 문화운동 및 인권운동을 위해 모인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활동 중이며, 연분홍치마의 6번째 다큐멘터리 <노라노>를 통해 감독 데뷔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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