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2 10:57 수정 : 2013.09.02 13:52

내게 집이란 곧 ‘교회’를 뜻한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81년, 장로교 전도사인 아버지는 강원도 철원에 교회를 하나 세웠다. 단 몇 평의 공간조차 얻을 여력이 안 되어 주인 없는 땅을 찾고 또 찾다가 그 기슭까지 떠밀려간 것이다. 천막으로 간신히 눈비 피할 공간만 만들어놓고 문 앞에 작은 십자가 하나 내걸고 교회를 시작했다. 멀쩡히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해 남부럽지 않게 살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박차고 나와 천막교회를 개척했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모양새지만 당시에는 ‘교회 개척’이 나름 트렌드였다.

개척교회 부모 따라 10년 떠돌이

1970년대 초부터 한국 기독교계에 불기 시작한 ‘부흥의 바람’은 두 젊은이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이른바 ‘복 주시는 하나님’이 뜨던 시대였다.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였고, 누구나 신화를 쓸 수 있는 시대였다. 강단에선 ‘축복’의 메시지가 넘쳐 흘렀고, 현세에서의 축복을 저해하고 가로막는 모든 요소는 ‘사탄 혹은 마귀의 역사’로 치부되었다. ‘축귀’(엑소시즘)와 ‘축복’, 두 패러다임이 한국 교회의 폭발적 부흥을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마다 축복을 주고 받고 마귀를 내쫓는 일에 열중했다.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서울 여의도에 매머드급 교회가 출현했는데, 그 교회의 수장은 말 그대로 영웅 혹은 스타 대접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금요일 저녁만 되면 철원에서 여의도까지 나를 업고 그 먼 길을 다니곤 했다. 바로 그 영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공교롭게도 그 교회의 시작이 바로 천막교회였다. 척박한 땅에 천막교회를 세우며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꿈꾸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우리 가족의 개척시대는 계속됐다. 철원에서 시작된 교회 개척의 여정은 10년이 넘도록 끝날 줄 몰랐다. 철원에서 인천, 서울 청량리, 경기도 파주와 문산으로 여정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천막에서 건물 지하, 상가, 버려진 창고 등으로 교회의 형태는 계속 바뀌었지만 조건은 늘 비슷했다. 사글세 아니면 월세. 그렇게 아버지가 세운 교회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을 꽉 쥐고도 모자랄 지경이었고, 그사이 옮겨 다닌 학교만 해도 다섯 군데가 넘었다. 그 10여 년의 세월 동안 집다운 데서 살아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예배당 한구석에 조그맣게 딸린 방 한 칸 정도가 우리 가족이 먹고 잘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는 곳은 언제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우리 집은 가장 못사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런 삶의 조건 속에서도 나는 그다지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아들마저 가난 때문에 궁상 떠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던 어머니는 주말이면 서울 중심가로 나를 데리고 나가 ‘핫’한 브랜드의 옷을 사 입혔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르게 했으며, 영화는 꼭 대한극장이나 단성사, 서울극장 같은 주요 개봉관에서만 보게 했다. 그 덕에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항상 잘사는 집 자식 취급을 받았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여기는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선교를 위해 잠시 머물러 있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여기 사는 애들처럼 하고 다니면 안 된다고. 돌이켜 보건대 어쩌면 그건 어머니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아니었을까?

중학교 입학하던 해인 199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가족은 한곳에 정착하게 된다. 아버지가 오래된 교회의 4대 담임목사로 청빙받은 것이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성도 간의 유대가 깊고 끈끈한 교회였다. 재정 상태도 넉넉했다. 사택이 제공되었고, 아버지에게 매달 사례비가 지급됐다. 목사도 월급받는다는 사실을 이 교회 와서 처음 알았다. 한 주 벌어 한 주 먹고 사는 신세에서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약 10년간 우리 가족은 여느 평범한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끽해보는 안정이고 평화였다.

군에서 제대할 무렵인 2004년쯤, 인근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북한산국립공원 근처였는데 행정구역상 서울에 속해 있지만 그린벨트, 즉 개발제한구역으로 오랫동안 묶여 있어 동네는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지역개발은 완전히 체념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아파트 단지 개발에 관한 소문은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돈 있는 사람들은 주변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린벨트가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 심리가 작용했다. 타지 사람들이 땅을 둘러보고 가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발견됐는데, 그중엔 유명인도 꽤 있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뉴타운 독거남, 프리랜서 극작가

주택청약과 아파트

내 집 마련과 투기 사이

“국민주택 청약 1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서울 구로구 누님의 집으로 주소를 이전했다.”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 지명자인 정홍원 국무총리는 청문회에서 새 집 마련의 소회를 밝혔다. 위장전입은 자녀 교육과 부동산 투기의 방편으로 활용되어 고위 공직자 청문회의 단골 손님이 된 지 오래다. 덕분에 당시 무주택자던 정 총리는 서울 반포동의 한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반복되는 문제에는 지속적인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주택 공급 정책의 핵심 중 하나인 주택청약제도다.

주택청약제도는 재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원활하게 주택을 공급하고, 공급한 주택을 1가구 1주택의 원칙 아래 분배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1978년 제정된 ‘주택 공급에 관한 규칙’으로 본격적인 틀이 잡히고, 이후 상황에 따라 조정돼왔다. 이 제도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주택 분양 희망자와 주택 건설 기금을 마련하는 방법을 하나로 묶는다. 주택 건설에 관련된 각종 저축 상품에 가입하도록 한다. 주택청약저축제도가 그것이다. 그리고 무주택 기간, 가구주 연령, 가족 수 등으로 점수를 매겨 우선 공급 대상자를 선별하는 청약가점제를 통해 공급된 주택을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배분한다. 일반적으로 청약저축액은 주택 가격에는 크게 못 미치므로 국민주택채권을 당첨자에게 사게 함으로써 부족한 재원을 보충했다.

이 제도를 통한 주택 공급은 주민등록에 따라 파악되는 가구 단위를 기준으로 시행되었다. 위장전입이란 주택을 우선 공급받으려는 수법 중 하나다. 우선, 가구주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분양가상한제 아래에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아파트를 당첨받아 시장 가격과의 차이인 프리미엄을 마음껏 누린 지난 시기, 주택청약 당첨은 곧잘 복권 당첨에 비유했다. 한 가족이 서류상으로 각각 흩어져 청약저축에 가입한 가구주가 되어 아파트를 당첨받기도 했다. 투기나 증여의 방편으로 활용된 것이다. “무주택자로서 내 집 마련을 위한 것이지 부동산 투기를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정홍원 총리의 해명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주인공이 가입한 청약부금은 청약저축과 조금 다르다. 청약저축은 집이 없는 무주택가구주로 가입 자격이 제한되며, 1세대 1계좌만 가입할 수 있다. 본래의 주택청약제도의 목적에 부합한다. 반면 청약부금은 주택이 있거나 가구주가 아니어도 가입할 수 있다. 대신 청약 가능한 주택이 제한되고 당첨될 가능성도 낮다. 주택청약제도의 세부적 내용은 복잡하지만 내 집 마련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거나 알게 된다. 그러나 내 집 마련이 멀리 있다고 해도 알아둘 만하다. 집을 살 여력이 없더라도 주인공처럼 임대주택 당첨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은평 뉴타운 입주가 시작된 2008년 이후, 아파트와 임대아파트 공급 계획의 중심이던 주택재개발사업이 난관에 부딪혔다. 믿음만으로 천국의 입주권을 약속하며 성장하던 개신교의 메시지처럼 지칠 줄 모르고 늘어나던 아파트도 성장이 멈추었다. 성장하는 경제와 아파트에서 교회로 흘러가던 은혜의 순환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아파트 가격에 치여 물길의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 지나치게 높은 아파트 가격은 재개발사업의 사업성 악화의 원인이기도 하다.

글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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