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07 10:03 수정 : 2013.08.07 20:24

대학에 입학하자 친구들은 나를 ‘목동 사람’으로 호명했다. 목동에서 없는 집 자식이고 문제아에 불과했지만 ‘목동’이라는 상징적 기표 하나만으로 나를 부잣집 도련님인 양 호명했다.한겨레 자료
“자, 외할머니 성함을 말해보세요.”

만약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것은 내가 살면서 맞닥뜨린 최초의 입시 문제였다. 엄마의 회상에 따르면 추첨도 하고 간단한 산수도 풀었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국립 인천교육대 부속 국민학교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외할머니 이름을 알아야 했다. 8~9살 아이들이 지닌 총명함의 정도를 시험하려면 한국 사회의 가족 구도 속 ‘가장 먼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했으리라. 어쨌든 나는 ‘최순녀’라는 희한한 이름을 잊지 않고 대답해서 ‘교복 입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순녀는 친할머니 이름이었다.

인천 작전동 사글셋방과 봉지쌀

집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이었다. 아마 내부는 복층의 목조건물 형태였던 것 같다. 사진을 보고서야 집을 기억할 만큼 오래된 일이다 보니, 지금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집에 대한 기억보다는 그 바깥 풍경이 대부분이다. 마당에는 ‘백구’ 한 마리가 있었고, 해마다 사루비아 꽃이 만발했다. 마당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놀이터였고, 거기 매여 있던 백구가 내 유일한 친구였다. 부모님이 새벽같이 집을 나가고 나면, 텅 빈 집을 메우는 것은 주변을 온통 포위한 공사장의 소음이었다. 기껏해야 4살 남짓한 나로서는 그 소리의 정확한 의미를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것이 어떤 파괴와 맞닿아 있다는 것만은 감지할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녹슨 못을 밟고, 유일한 친구던 백구가 파상풍으로 죽었으니까. 그리고 백구가 죽은 그해, 우리 가족은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왔다. 나는 그때만 해도 이사가게 된 것이 나 때문인 줄 알았다. 백구가 죽은 뒤로는 그야말로 매일 울기만 했으니까. 물론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과 그 집이 온전히 우리 가족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들어가면 혼나는 방’이 우리 가족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계 너머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인천 계양구 작전동 사글셋방에서 봉지쌀을 사 먹던 우리 가족은,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동인천백화점 근방으로 이사했다. 15층짜리 동부아파트의 15평(49.6㎡)짜리 집이었다. 2800만 원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알 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동부아파트가 남긴 유일한 인상이 ‘작다’였음을 떠올려보면 그다지 좋은 집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비싸서라는 이유가 아니라, ‘둘 곳이 없다’는 이유로 어린 내가 장난감 사는 걸 포기할 정도였으니까. 이사한 뒤로 부모님은 매일 버스를 타야만 하는 먼 유치원에 나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 버스는 타지 않았다. 옥상에 긴 쇠막대로 작은 공을 쳐올리는 스포츠센터가 있는, 3층짜리 병원을 가진 집 외동딸과 함께 다녔다. 방향제 냄새가 너무 싫었지만, 어쨌거나 그랜저 V6는 6인승 승합차보다 엉덩이가 편했다. 나는 매일 아침 은비네 그랜저를 타고 유치원에 갔다가, 오후에는 옆집 사는 대웅이네 쏘나타2를 타고 집에 왔다. 저녁에는 아빠가 사온 ‘인현통닭’의 전기구이를 먹었고, 일주일에 두 번쯤 온 집안에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을 구웠다. 엄마와 내가 텔레비전을 보는 밤이면 아빠는 컴퓨터 책과 씨름했고, 반 년간 공부 끝에 286 컴퓨터 한 대를 조립해냈다. 물론 그 여섯 달의 공부가 완제품 살 돈이 없어서 시작한 독학이었으며, 그것이 당시 부모님을 사로잡던 ‘남들 만큼 있어야 한다’의 강박 자체였으며, 그로 인해 15평 아파트가 나날이 좁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역시 나중의 일이었다.

내가 7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또 이사했다. 삼양정수 사원으로 일하던 아빠는 동부아파트 입주할 때 즈음 태영건설 대리로 이직했고, 배 가까이 늘어난 봉급을 착실하게 모아 마침내 24평(79.3㎡)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 현대2차아파트. 제일 좋은 동네라는 연수구 연수동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같은 구 안에 살게 되었으니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어쨌든 부모님은 옆 럭키아파트에 비해 훨씬 늦게 지어진 새집을 ‘겨우’ 6천만 원에 분양받았다는 사실에 마냥 행복해했다. 다만, 그 행복이 내 몫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24평 아파트에 입주한 그날부터 전에 없이 엄격한 가정교육이 시작되었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반이 되라”며 아빠가 내게 훈계를 늘어놓는 사이, 엄마는 버스로 30분을 가야 하는 ‘국립 국민학교’에 나를 입학시켰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유기빈

하이페리온과 행복주택

목동은 주택 500만 호 공급 정책의 일환으로, 그리고 서울 서부 지역의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하나의 중심을 가진 도시 서울이 인구와 경제 모든 면에서 급성장함에 따라 다수 지역에 부도심을 갖춘 다핵 도시로서 비전이 필요해졌다. 목동은 그중 서울 서부 지역 부도심으로서 경인축 선상에서 구로, 영등포, 여의도와 도심을 선형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목동 지구의 선형 중심축에는 중심업무지구(CBD)가, 중심 가로의 직장과 각종 도시 서비스 시설 배후에는 주거 지역이 배치되었다.

자족적 도시는 주택 및 교육, 의료, 교통, 상·하수도 등 각종 기반 시설을 확보하고 이를 유지할 인구와 인구를 부양할 경제 규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산업이 있어야 한다. 목동 계획은 초기부터 이런 비전이 구체화된 하나의 예다. 그러나 경부축의 관문으로서 성장하는 강남과 달리, 쇠퇴하는 서울 서부 경공업 지역과 인접한 목동의 중심업무지구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상업지구로 계획이 변경되었으나, 이마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여파로 기업의 자금 사정이 어렵게 되자 좌절되었다. 대신 목동 중심축은 경제위기가 가져온 새로운 서울의 역할을 실현하는 곳이 되었다.

경제위기를 극복해가던 2000년,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주상복합 건축 제한 완화와 강남 타워팰리스의 성공에 힘입어 목동 중심업무지구는 초고층 주상복합 거리로 탈바꿈했다. 이것은 서울의 중심 산업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서울은 행정과 기업의 본사가 위치한 중심 도시이기는 하지만 국가 기반 산업인 제조업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대신 주택 가격과 교육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을 주도하고, 국내 최고 순위 대학을 보유한 서울의 산업은 단연 중산층의 재생산이었다.

2000년대 중반, 목동은 특목고 입시 특구로 이름을 날렸다. 대원외고 진학의 선두에 대치동의 중학교가 있었다면 명덕외고 진학을 위해선 목동의 중학교에 가야 했다. 목동의 학원가도 특목고 진학 특수로 호황을 구가했다. 대학 정원이 늘어나는 한편, 대학 이외의 대안이 쇠퇴하자 대학 진학률이 급상승했다. 일류대를 향한 노력이 가계의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사교육 구매력이 집중된 학군 주변에 교육 특구가 형성되었다. 특목고에 이어 국제중이 명문대 진학의 지름길로 각광받으면서, 사교육은 서울의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1989년이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입주 완료와 대학생 과외 교습 허용으로 사교육 자율화의 여정이 시작된 해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2009년 주상복합 건설에 따른 학교 수요를 분담하기 위해 목운초·중학교가 개교했다. 목동에서 가장 비싼 주상복합인 하이페리온·파라곤·트라팰리스 입주자 자녀들이 이 학교에 배정된다. 신생 학교에 귀족 학교 이미지가 더해졌다. 목운초·중학교에 갈 수 있는 목동 7단지 701~715동은 같은 단지 아파트보다 전세가가 수천만 원 비싸다. 그런데 하필 목동 유수지에 들어설 임대주택 ‘행복주택’ 입주자가 배정받게 될 학군이 바로 이곳이다.

글 아파트 키드 생애 기획팀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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