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4 11:32 수정 : 2013.07.05 10:39

과거 반포 주공 3단지(왼쪽)와 현재 반포자이의 모습. 과거와 현재를 모두 경험한 필자는 “예전 유토피아를 기억하는 사람에게 현재 모습은 어색한 풍경”이라고 말했다.한겨레 자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아기 뒤로 자로 잰 듯 반듯하고 깨끗한 회색(사실 너무 깨끗해서 흰색에 더 가까운) 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 주변의 보도 역시 깔끔하다. 보도 중간중간에 심은 가로수마저 깨끗해 보인다. 가로수 뿌리를 덮은 흙에는 잡초 한 포기 돋아나 있지 않고, 가로수 가지에는 겨울 나무처럼 잎사귀 하나 달려 있지 않다. 이 사진을 조금 축소시키면 가끔 책이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1970년대 말 서울 반포 지역 주공아파트 사진과 같은 모습이 나올 것이다(‘국가기록원 제공’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 좀더 축소시키면 영동(영등포 동쪽이긴 한데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대충 뭉뚱그려 부르겠다는 의도가 느껴지는)의 개발 계획을 담은 조감도 같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간 소풍을 기억한다. 소풍 장소는 아파트 단지 바로 길 건너편의 야산이었다. 그때는 소풍 장소가 그렇게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꽤 흘러 중학교에 입학한 뒤, 갑자기 떠오른 옛 추억을 가족과 이야기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던진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다. “거기? 둥근 마을? 바로 길 건너편이잖아! 미도아파트 있는데.” 둥근 마을은 바로 그 소풍 장소던 야산 아래 판자촌 이름이었다. 반포 주공3단지(이하 3단지) 안에 위치한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이름 ‘원촌’(圓村)은 말 그대로 둥근 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원촌이란 이름의 유래를 일찌감치 알게 된 인근 아파트 단지 아이들은 달동네 이름이라고 빈정댔다.

16평형을 ‘포장’하던 사각틀 25평형

3단지에는 25평(82.6㎡)형과 16평(52.9㎡)형의 저층(5층) 아파트가 섞여 있었다. ‘섞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섞여 있지 않았다. 25평형은 소수였고, 16평형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25평형은 몇 동씩 짝을 이루어 단지의 외곽에 배치되었다. 하늘에서 3단지를 내려다보면 16평형 아파트로 구성된 알맹이를 얇은 25평형 아파트의 껍데기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3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일반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보면 25평형만 보였다. (소음, 일조권, 조망권 등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일까? 이런 배치는 같은 자리에 새로 들어선 반포자이와 정반대이다. 반포자이는 단지 외부 도로 가장 가까운 쪽에 소형 임대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다.) 단지를 ‘포장’하고 있는 25평형 사이에도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25평형이 한 동씩 나란히 배치된 다른 부분과 달리, 사평로와 경부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과 가까운 방향에는 25평형이 그나마 여러 채 모여 있었다. 이곳은 3단지 안에서도, 심지어 같은 25평형 중에서도 일종의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쪽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뭔가 좀더 세련되었고, 학부모 간에 일종의 유대의식도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얇은 껍질’에 해당하는 부분에 배치된 25평형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앞서 언급한 25평형 밀집지역에서 느껴지는 우아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25평형 밀집지역과 달리 이곳의 25평형은 16평형과 건물의 입구가 마주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같은 앞마당을 공유하고 함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대학 1학년 때까지 살던 곳은 3단지의 25평형 중에서도 ‘얇은 껍질’ 부분에 속한 동이었다. 그리고 같은 동에서도 형편이 가장 좋지 않은 집이었다. 아버지는 무일푼이었으나 성실하고 공부를 잘했던 분이고,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딸로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기 위해 집에서 도망 나온 성깔 있는 분이었다. 성실하지만 무일푼인 가난뱅이 남자, 그리고 집에서 도망 나와 역시 무일푼인 여자가 어떻게 해서 25평형 아파트에서 살림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모의 베이스캠프에 자리 잡은 우리 집

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누나와 단둘이 어려운 세월을 헤쳐왔다. 머리가 좋고 성실해 지역의 명문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한계를 느낀 인문계 대학생의 당연한 코스로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동 근처 테니스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어머니와 눈이 맞았고, 사귀다 보니 아이를 갖게 되어서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어느 재벌가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아버지의 사정을 딱히 여기고 계열사 중 한 곳에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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