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1 11:52 수정 : 2013.06.12 10:47

이 글은 ‘아파트 키드의 생애’ 기획팀 박재현이 서울 강북 재개발 지역의 다세대주택에 자가 거주하는 4인 가족의 가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해 작성했습니다. 글 속의 화자 ‘나’는 인터뷰이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싼 집을 찾아 서울 곳곳을 떠돌다 어렵사리 정착한 곳을 중심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한때 집값이 몇 배씩 뛰고, 분양권을 더 많이 챙기려고 지분 쪼개기가 성행했지만,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주민들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겨레 정용일 기자, 한겨레 김진수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무리해 장만한 다세대주택 신혼집

2005년 5월, 나는 아내와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식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신혼부부에게 혜택을 주는 저금리의 주택자금대출을 받아 집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변동금리였는데, 처음에는 3%인 것으로 기억한다. 매매 계약에서 정한 날짜를 지키려다 보니 서류상으로나마 결혼을 서두르게 된 것이다. 전세로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2003년부터인가, 이 동네에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평당(3.3㎡) 500만 원짜리 동네가 평당 1천만 원을 넘어 1500만 원짜리 동네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분양권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분주했다. 여기서 전세로 시작한다는 것은 떠도는 삶을 예약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나도 새로 지은 다세대주택 2층의 전용면적 18평(59.5㎡), 대지 지분 6평(19.8㎡)인 주택을 구입했다. 부동산 일을 오래 해온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로는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매매 대금 9천만 원 중 7천만 원을 빚으로 충당했다. 2009년, 이 동네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자 나는 분양권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같은 구역 내에 집이 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던 집이다. 이렇게 신혼 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주택재개발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충남 당진, 어머니는 강원도 횡성 출신이다. 1970년대 말, 두 분은 결혼 후 서울 상도동의 달동네 판자촌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쌀집이나 세탁소 등에서 막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미용 기술을 배워 미용실에서 일했다. 아버지는 출산이 닥친 나를 낳기 위해 어머니를 손수레에 실어 달동네 언덕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봉천동 등을 떠돌며 살았다는데, 나는 그 시절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이 조금 나는 때는 내가 네댓 살 무렵부터다. 그때 우리는 은평구 응암동의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늘어선 방들 중 하나에 자리했다. 다른 방엔 각각 다른 가구가 있었다. 이 무렵 아버지는 건설회사를 통해 일을 구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중동 건설붐이 일어 중동으로 진출하는 건설회사에서 사람을 많이 구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1년이 채 못 되어 현장에서 큰 사고로 척추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이후 2년을 꼼짝없이 병원에서 지내셨다.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 손에 달려 있었다. 삯바느질과 미용일을 하며 겨우 먹고살았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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