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1 11:29 수정 : 2013.06.12 11:37

“아휴~ 말도 마세요. 그때 생각만 하면 아찔합니다.”

김홍국 회장은 ‘긍정’을 성공 비결로 꼽았다. 농장 폐업(1982), IMF 경제위기(1997), 도계장 전소(2003) 등 세 차례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게 한 원동력 역시 긍정의 힘이었다고 한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김홍국(57) 하림 회장은 대뜸 손사래부터 쳤다. 그와 내가 마주한, 2003년 5월 12일 전북 익산 도계공장 화재사건을 꺼내자 나온 반응이다. 격한 몸짓과 어울리지 않게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트라우마로 남은 걸까. 그는 “전화위복이었다”고 말했다. 그날 그는 젊은 시절부터 피와 땀으로 일궈온 공장과 닭들을 잃었다. 전기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건물 9171평(3만317㎡)이 모두 불탔다. 직·간접 손실 규모가 1천억 원에 육박했다. 화마의 현장에서 마주한 그의 모습이, 촉촉히 젖은 눈빛과 대면한 순간이 생생하다. 꿈을 상실한 좌절감과,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르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눈물….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던 냉혈한(?)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니!

“제정신일 수 없었죠. 악몽에 시달려 잠도 못 잤어요. 잠시 잠을 청하고 새벽 2~3시에 눈을 뜨면 땀범벅이었죠. 날이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보내기 일쑤였어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충격이 컸어요. 일부러 불을 냈다는 소문도 있었죠. 아내조차 내가 자살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하더군요.”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터를 갈고 닦던 순간부터 화재 전까지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억울하고 분했다. 재기 욕구가 타올랐다. 그는 이듬해 전소된 도계장 자리에 동양 최대의 도계 가공공장(당시 기준)을 지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비 온 뒤 땅이 더 굳듯, 이후 하림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마케팅대상’, ‘품질경영대상’, ‘좋은기업대상’, ‘금탑산업훈장’, ‘우수축산브랜드’ 등을 휩쓸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산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농민에서 출발한 지 40여 년 만에 연매출 5조 원에 육박하는 중견기업 수장이 된 그는, 농업계에선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포기하면 모든 것을 잃지만, 좌절을 딛고 일어서면 인생에 값진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난관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더군요”라고 말했다.

지난 5월 10일 NS홈쇼핑 사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꼭 10년 만의 재회다. 그는 그때와 달리 한층 여유로워 보였다. 어느새 인상 좋은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외모만큼이나 집무실에도 변화가 있었다. 낡은 철제 책상에 허름한 소파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던 협소한 공간이 열 배쯤 넓어진 듯했다. 하림그룹 회장실 입구에 닭 조형물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내 뿌리는 농민이고, 농민의 피가 흐른다”던 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농민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진다”고 고백했다.

외모, 열정과 패기가 예전 그대로인 것 같다고 하자, “허허허”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특유의 넉살과 추진력도 여전했다. 최근 하림은 도시락 등 쌀 가공식품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닭고기, 돼지고기에 이어 쌀까지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식품전문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김 회장이 생각하는 하림의 최종 목표, 즉 종착지가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경제인 카페’에 모신 이유다. 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첫 질문은 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쩜 그대로세요. 나이를 거꾸로 드신 것 같아요. 비결이 뭔가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추진력은 예전 같지 않아요, 하하. 2년 전부터 승마를 하는데, 그게 젊음의 비결인 듯해요. 골프에 드는 비용보다 3분의 1쯤 저렴하지만 운동량은 월등해요. 일주일에 두세 번, 4~5시간 말을 타는데 면역력이 높아져서인지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어요.”


“쌀 가공업 돈 벌자고 하는 것 아닙니다”

“최근에 쌀 가공업 진출을 선언하셨어요. 맞죠?”

“아하, 지난 5월 서울 여의도에 오픈한 ‘하이밀’(HYmeal) 1호 매장을 말하는군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궁금한 질문부터 던졌다. 김 회장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프리미엄 도시락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아니다”라며 “하림이 쌀 가공업도 한다고 봐달라”고 당부했다.

“저 농민인 것 아시죠?(웃음) 4H 회원에다 농어민후계자 1기 출신이거든요. 무슨 일을 하든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주제넘게 어떻게 해결할지 방법까지 고민하지요. 쌀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급감하지, 쌀 수입은 코앞이지 가만있을 수 없었지요. 이를 고민한 지 오래됐고, 4~5년 전부터 구체적으로 쌀 시장 진출을 준비했어요. 절대 돈벌이 목적이 아닙니다.”

2004년 쌀시장이 개방된 이후, 그동안 최소시장접근물량(MMA)으로 규제되던 외국산 쌀 수입이 2015년부터 관세화에 의한 완전개방으로 전환된다. 이 시점에 국내산 쌀을 프리미엄화해 외국산 쌀과 차별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고, 그 실행 차원에서 추진했다고 한다.

김 회장이 가장 고민한 것은 ‘밥맛’이다. 하림그룹은 지난 1월 일본 유노타니와 50%씩 지분을 투자해 합작법인 ‘하림유노타니’를 설립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생산된 고품질 쌀이 유노타니의 가공기술을 거치면 최고의 밥맛이 됨을 보여주려는 심산이다. 그 첫 단추가 ‘하이밀’인데, 김 회장은 “향후 떡, 과자, 음료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가공식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쌀은 도정과 가공 방법에 따라 씹는 식감을 물컹하거나 쫄깃하게 할 수 있다. 보관과 가공만 잘해도 1년 내내 햅쌀밥 맛을 낼 수 있다니 놀라웠다.

“지금껏 하림의 주력 분야는 축산이었습니다. 쌀 가공업이 생뚱맞아 보이는데 굳이 쌀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쌀은 우리 민족의 생명줄이니까요. 불우이웃에 쌀 기부하면 소비가 증가한다고 합니다. 말도 안 돼요. 그냥 재고 쌀 소진에 불과한 겁니다. 궁극적으로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쌀 소비를 늘려야 합니다. 그동안 쌀만큼 가공식품이 개발되지 않은 분야도 없을뿐더러 제품이 나와도 상품성과 소비 기반이 열악했죠. 하림이 그 역할을 하려는 겁니다. 유럽의 감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거엔 주식인 감자를 쪄서 먹었지만, 지금은 프렌치프라이(가늘게 썬 감자튀김)나 가공식품으로 먹어요. 결과적으로 소비가 안 줄었어요. 쌀도 그렇게 만들 겁니다.”

하림의 쌀 사업 진출을 두고 사세 확장을 위한 꼼수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더구나 하림은 올해 안에 액상 천연 조미료를 출시할 계획이 아닌가! 그는 “억울하다”며 “쌀 수입 개방과 국민 건강을 위한 하림의 선택”이라고 항변했다. “발골(뼈 발라내기) 과정에서 나오는 닭뼈를 활용한 제품이어서 친환경적 사업입니다. 닭뼈를 농축하면 꿀처럼 걸죽해지는데, 여기에 마늘·해산물·표고버섯·양파 등을 섞어 만든 육수를 곧 출시할 겁니다.”

쌀과 조미료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의 입술에 결연한 의지가 묻어났다. ‘만약 내가 김홍국 회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문했다.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쌀 사업에 뛰어드는 무리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 같다. 신규 사업을 벌이기보다 내실을 기하는 쪽으로 선회할 것이 분명하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2003년 공장 화재 이후, 그동안 묵묵히 지켜봐주던 아내조차 제발 일 좀 그만 벌이라고 한다”며 “끝없는 도전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이면 고향인 전북 익산의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그는 “기독교는 노동의 종교여서 현실에 안주하는 걸 죄악으로 여긴다”며 “하나님이 준 달란트를 갖고 소명을 다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데, 내 소명은 기업 경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와 관련한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애초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를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일찌감치 점찍었다. 대통령은 일주일을 공들여 설득했지만, 김 회장은 그 제안을 간곡히 고사했다. ‘소명’이 아니라는 연유에서였다. 그는 “장관직을 수행하며 농업정책을 직접 입안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장관 제안을 바로 수락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이 전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때의 서운함을 말하더군요. 앞으로도 정계에 진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내부 거래·계열사 수·농가 마찰 ‘불씨’

현재 하림그룹은 닭고기와 돼지고기의 생산업체를 거점으로 사료, 동물 약품, 유통, 금융 등 56개 계열사(지주회사 2곳)를 두고 있다. NS홈쇼핑, 천하제일사료, 돼지고기 생산업체인 선진과 팜스코(하이포크) 등이 대표 계열사다. 하림의 하루 닭고기 생산량은 72만여 마리로 국내 닭고기 시장의 32%을 점유하고 있다. 돼지고기 시장 점유율은 5% 남짓이다.

이 정도의 성공이면 절로 함박웃음이 나올 법한데, 김 회장은 지금껏 크게 웃어본 기억이 없단다. 그와 하림이 승승장구할수록 시기와 음해 여론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최근까지 김 회장은 국정감사 단골 초대손님(?)이었다. 그는 “내가 부족하고 못난 탓”이라며 “그럴 때마다 선두업체로서 하림의 책임과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국감에서도 지배구조와 계열사 현황,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와 내부 거래, 수입 닭고기와 계열 농가 등에 관해 국회의원의 질의가 쏟아졌다. 김 회장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이후 잠잠해졌지만,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수급 조절, 납품업체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생산업체가 닭고기 수입에 참여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림이 사용한 수입 닭고기는 전체 생산량의 2% 남짓이에요. 하림이 닭고기 사업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더군요. 말도 안 됩니다. 닭고기가 대량 수입되고, 사업이 죽으면 나와 하림이 먼저 죽습니다.”

하림을 향한 육계 농민들의 불만에 대해 김 회장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600여 계열농가 중 5% 남짓 사육 성적이 안 좋은 농가들이 있는데, 이들에게서 대체로 불만이 나온다”며 “하림 농가들이 연간 사육을 통해 얻는 평균 수입이 1억5천만 원에 이르고, 성적이 우수한 농가는 2억5천만 원도 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하림의 지배구조와 내부 거래는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의 전형적인 악성 관행인데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행태다.

“공정거래법상 순환출자 규제는 자산규모 5조 원 이상 대기업에 해당합니다. 하림은 순환출자가 가능한 규모지만, 지난해 논란이 된 뒤 모두 해소했습니다. 현재는 2개의 지주회사가 나머지 회사를 소유하는 형태입니다. 계열사 수와 내부 거래 문제는 일반 기업체에 적용하는 잣대가 아닌, 전부터 강조해온 3장(농장·공장·시장) 통합 관점, 수직계열화 업체 특수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합니다. 회사 안에 사료·약품·가공 부문을 두고 거래하는 것은 괜찮고, 분리해서 거래하면 문제가 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닭고기와 돼지고기의 생산단가를 낮추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영 기법으로 봐야 합니다.”

하림은 국내 최초로 육계 계열화를 추진해 닭고기 자급률을 80% 수준까지 높이고, 품질과 가격경쟁력 제고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용가리치친, 치킨너겟, 즉석삼계탕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개발해 소비를 촉진했다. 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하림이 국내 농축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점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김 회장의 시선이 잠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쓰여 있는 액자에 머물렀다. “내 마음을 달래주는 글귀입니다. 억측과 오해가 언론에 보도될 때의 내 심정이지요. 속상하고 부끄러워 죽고 싶을 지경입니다. 이렇게까지 욕 먹으며 이 사업을 계속해야 하나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땐 저 액자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렇지, 내가 잘못했지.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군요.” 


11살 때 부터 사업수완… 18살 때 벌써 사장님

김 회장은 11살 때 외할머니에게서 병아리 10마리를 선물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축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닭띠’인 그가 닭에 빠진 건 숙명인지도 모른다. 병아리가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던 그는 풀과 쌀을 먹이는 것도 모자라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잡아먹일 정도로 정성껏 키웠다. 병아리들은 살이 통통 올랐다. “10마리를 250원씩에 팔아 2500원을 벌었어요. 그 돈으로 7원짜리 병아리 100마리를 사고도 1800원이 남았죠.” 병아리 키우는 재미와 장사에 맛을 들였다. 이런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초등학교 6학년 무렵엔 돼지 18마리를 구입했다. 이때부터 닭과 함께 돼지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농업고교에 진학한 뒤 축산업에 승부를 걸겠다는 인생 목표도 구체화시켰다. 걸림돌은 부모님의 반대였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이 농부가 되겠다니, 부모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중3 때 반장을 했어요. 중학교 내내 성적이 상위권이어서 전교 700명 중에 7등까지 했어요. 부모님은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기를 바랐죠.”

가출을 감행했다. 목포 유달산 인근에서 일주일을 보내다 귀가했다. 그제서야 부모님은 “네 맘대로 하라”며 마지못해 승락한다. ‘청년 농사꾼’ 김홍국의 인생은 이리농고 진학 이후 날개를 달았다. “18살에 이미 사업자등록증을 가진 어엿한 사장이었어요. 자본금 4천만 원으로 설립한 황등농장 직원만 10명이 넘었어요. 아저씨들이 결재받으러 학교를 들락거릴 정도였죠. 학생임에도 250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잘나갔죠, 허허.”

20대 초반 무렵 사육하던 돼지가 700두를 넘어설 정도로 농장 몸집을 키웠다. 오토바이 대신 트럭과 포니를 몰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술집과 요정에도 출입했다. 하지만 장밋빛 현실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2년 닭값 폭락 여파로 25살 때 쫄딱 망했다. 빚쟁이를 피해 돼지 막사에서 잠을 청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축산업에 뛰어든 걸 뼈저리게 후회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농장을 접고 식품회사 영업사원으로 마지못해 취직했다. 그러나 ‘농장주’ 꿈은 꺾을 수 없었다. 틈 나면 닭 관련 논문과 책을 뒤지며 지식을 습득했다. 우연한 기회에 “농축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가공유통 사업”이라는 고 박영인 박사의 강연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돼지값 폭락에도 소시지값이 폭락한 예는 좀처럼 없었다. 그렇게 4년의 암중모색 시기를 보내다 1986년 닭고기 수직계열화 사업체인 하림식품을 설립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양념치킨 체인점이 인기를 끌었다. 닭고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는 “운이 따랐다. 하루 수천만 원씩 벌었고, 회사도 급성장했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은 요즘도 어김없이 새벽 5시 30분에 눈을 뜬다. 회사 출근은 오전 8시 남짓. 수십 년째 이어진 버릇이다. “젊을 때, 특히 농장이 망하고 재기를 꿈꾸던 무렵엔 하루를 이틀처럼 산다는 생각이었죠. 아침식사 전 하루 일을 끝내고, 그 이후 이튿날 일을 하는 거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됩니다. 지금도 몸이 벅차다 싶을 정도로 빽빽하게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편이에요.”

이 와중에 김 회장이 빼놓지 않는 일과가 하나 있다. 책읽기다. 그는 요즘 무크지 <생명의 삶>을 즐겨 본다. 매일 읽어야 할 분량이 정해져 있고, 이를 토대로 사색하는 일종의 성경 해설잡지다.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정말 좋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겸손해지고,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긍정하고, 불평과 불만이 사라지지요.”

하림을 일구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도계장 화재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를 위기의 순간으로 꼽는다. 1997년 하림은 420억 원을 들여 대규모 육가공 공장을 증축했다. IMF 구제금융으로 이자가 27%까지 뛰었다. 공장 가동은커녕 당장 회사가 주저앉을 판이었다. 위기 극복의 힘은 결국 ‘긍정’이었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의 문을 두드렸고, 2천만 달러의 투자 승인을 받았죠. 급한 불을 끄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거죠. ‘인간 김홍국=긍정’입니다. 너무 긍정적이어서 푼수처럼 보일 정도죠, 하하.”

긍정이 성공 비결인지 물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안전지대로 가기보다는 결과가 어떻든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결정을 내린다”며 “이런 쿨한 자세가 긍정의 힘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역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기회를 잡고, 부정적인 사람은 기회를 놓칩니다. 유산 없이 무일푼으로 자수성가한 내가 증인입니다.”

그는 직원에게 “유능한 경영인이 되려면 상식과 기본에 충실하라”고 한다. 학교 도덕책 수준의 효·근면·성실·정직·질서 같은 덕목 말이다. 그가 인위적 구조조정을 지양하고, 직원 채용 때 지식과 학력보다 성품과 의지를 중시하는 건 이 때문이다. 비자금 조성, 뇌물과 리베이트 수수, 세금 탈루 등의 불법·탈법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그가 실천하는 원칙 중의 하나다. 그는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며 “윤리와 정도에 입각한 경영철학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공과 사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세를 치르는 김 회장과 달리 부인과 자녀들은 베일에 가려 있다. 김 회장은 하림을 설립한 1986년 결혼했다. 큰딸은 외국 유학 뒤 귀국해 IBM에 몸담고 있고, 세 아이는 미국에 유학 중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가족이 회사를 방문하는 일도 거의 없다. 그 역시 회사 일은 집에 가져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그러고 보니, 2시간 30분 남짓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과 관련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다.

“부인 얘기 좀 해주세요.”

“고등학교 교사인 형님의 제자였어요. 아내가 대학 4학년 때 약혼을 했고, 이듬해에 결혼했죠.”

“회장님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시던가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심성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언젠가 말하더군요.” 


무뚝뚝한 남편, 헛소리 잘하는 아빠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연애 시절의 어느 날 밤이었다. 청원 톨케이트 근처 고속도로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덤프트럭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버스를 타기 위해 모여 있던 5~6명을 덮쳤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고 현장으로 다가갔다. 부상자들을 차량 뒷좌석에 싣고 병원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아내는 그날 나의 용감한 모습에 홀딱 반했다고 합디다.”

집에서는 어떤 남편, 아빠인지 물었다. “아내에게는 무뚝뚝한 남편, 아이들에게는 헛소리 잘하고 시비도 걸고 놀리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며 웃었다. 잠시 머뭇거린 뒤 “아내한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결혼 이후 아내는 네 살 터울 4남매를 낳고 키웠어요. 가사와 육아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한 번도 힘든 걸 내색한 적 없어요. 내 결정을 묵묵히 따르고 지지해줍니다. 기념일과 생일조차 챙기지 못하는 무정한 남편인데 말이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건 아내입니다.”

어느덧 그는 50대 중반을 넘어섰다. 2세 경영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아직까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며 “각자 달란트가 있는데, ‘경영’ 달란트를 가진 아이가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쌀 가공식품 사업 안착이 급선무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는 인터뷰 내내 “글로벌 생산성 1위가 하림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닭, 돼지, 쌀까지…. 김 회장의 도전이 또다시 출발선에 있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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