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07 00:56 수정 : 2013.05.09 10:45

A : ‘공간은 힘의 형식, 시간은 무력(無力)의 형식’이라고 말한 게 누구였죠?

N : 쥘 라뇨(프랑스 철학자).

A : 우리 신혼 시절이 생각나네요. 각자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살림을 합쳤을 때, 양쪽 집에서 꼬리를 물고 날아온 것은 다름 아닌 책 상자였어요. 두 집의 공간을 상당 부분 차지하던 책 1만 권이 33평짜리 신혼집에 모이니 온 집이 그야말로….

N : 책의 홍수였죠. 우리 집 책장은 대부분 붙박이여서 신혼집에 가져올 수 없었어요. A씨의 책장만으로 다 감당할 수 없어 거실과 방 세 개에 무작정 쌓아놓은 책 때문에 다른 짐은 아예 정리할 엄두를 못 낼 정도였죠. 500권 정도 추려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는데도 빙산의 일각을 살짝 베어낸 정도였고, 거기다 작가 앤 패디먼과 그 남편처럼 책을 분류해 ‘서재 결혼시키기’를 시도하려고 하니 이건 뭐….

A : 그래도 쥘 라뇨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비슷한 또래의 신혼부부보다 훨씬 큰 ‘힘’을 업고 출발하는 셈이었어요. 서울 중심가의 33평짜리 대기업 브랜드 아파트. 교통 편리하고 대형 쇼핑몰 가깝고, 번화가가 이웃해 있고, 학군도 나쁘지 않은 동네. 비록 전세지만 우리 돈은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죠.

N : 은행에 손 벌릴 필요가 없었어요. 간단히 말해, 우리가 소유한 공간이라는 형태의 힘은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빌린 거예요.

A : ‘간단히’라는 부분에서 얼굴이 붉어지네요. 하지만 거기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부연할 계제는 아니니 넘어갑시다. 그래요. 우리는, 정확히 말하면 N씨의 부모님은 최대한 에둘러 말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죠. 덕분에 결혼 준비하면서 부동산을 돌아다닌다거나, 서류를 들여다본다거나,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우린 그저 우리가 살고 싶은 지역을 말하면 됐고, 그 뒤로 계약에서 이사까지 일사천리였지요.

N : 우리는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여러모로 닮은 커플이지만, 그 시점에서 양쪽 집안의 풍경은 많이 달랐어요. 우리 부모님은 도심에 빌딩 한 채와 수익형 부동산 몇 채를 소유해 꼬박꼬박 적지 않은 월세를 받으며 정원이 있는 이층집에 거주하는 반면….

많은 젊은이가 살 공간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결혼을 유예하는 시간적 선택을 하지만 어떤 젊은이들에게 공간은 시간과 무관하다. ‘데우스엑스마키나’, 부모는 그들에게 언제든 공간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이다. 한겨레 탁기형 기자
부동산으로 부 축적한 부모님 있기에

A : 우리 부모님은,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 어머니는 유흥가 뒤편의 아주 오래된 양옥집에서 홀로 살고 계셨죠. 하지만 스케일이 다를 뿐 우리 어머니도 집주인이고 방 몇 개를 돌려 월세를 받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리 다른 풍경도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굳이 그 집의 반지하 방에 거주한 건 넓은 방을 세놓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였고.

시간을 거슬러 우리의 유년기로 돌아가면 양쪽 집안의 풍경은 더욱 비슷해지죠. 먼저 제 얘기부터 할까요. 우리 부모님은 1980년대 초반 아버지 직장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도권의 한 도시에 자리를 잡았어요.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아버지가 대기업 직원이어서 허리띠를 졸라매며 돈을 모은 지 5년 만에 단독주택을 한 채 장만했어요.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A와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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