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5 23:31 수정 : 2013.03.05 23:32

오비맥주 장인수 사장 정용일
그는 원래 종이를 만드는 회사(삼풍제지)의 경리담당 직원이었다. 상고 출신으로서 입사하기에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회사의 주요 자금 관련 업무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그 ‘일’이 터진 건 어느 토요일 새벽이었다. 전날 동료와 술을 한잔하고 귀가했다. 숙취를 느껴 새벽 5시에 깼는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당좌수표가 온데간데없었다. 5천만 원짜리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전날 걸어온 길을 헤매고 다녔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사라진 수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분실 신고를 하면 큰 손해는 보지 않겠지만 말단사원이 저지른 실수로는 엄청난 일이었다. 어깨가 축 처져서 회사에 나갔는데 반가운 손님이 와 있었다. 수표를 길거리에서 주운 분이었다.

“어찌나 고맙던지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죠. 수표를 건네받고 약간의 사례비를 드리면서 머리를 조아렸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돈 만지는 일이 확 싫어지더라고요.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경리 업무가 적성에 안 맞는다 싶었는데….”

곧바로 사장실을 찾아가 영업부서로 옮겨달라고 했다. 사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자금 압박이 심하던 때인 만큼 경리 업무는 회사에서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마다하는 걸 오히려 사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던 차에 신문에서 한 주류회사의 사원모집 공고를 봤다. 소주를 만드는 진로였다. 영업직 모집 조건에 ‘고졸 지원 가능’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신입사원을 적게 뽑던 진로는 그해 영업직 40명, 생산 기획 및 관리직 40명 등 대규모로 사람을 뽑았다.

바로 입사원서를 냈다. 4천 명이 몰려 경쟁률은 50대 1이 넘었다. “왜 그렇게 많이 왔느냐면, 그때는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난 다음 해로 사회적 혼란기였어요. 실업자들이 꽤 있던 시절이죠.” 진로재단인 우신고등학교에 가서 필기시험을 치렀다. 마지막 면접 단계에서 위기가 엄습해왔다. 그는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한 면접관이 “주량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술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을 뽑는 것이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 그게… (소주) 한 병이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거짓말을 좀 보탰다.

진로에서 합격 통보를 받고 삼풍제지에 사표를 던졌다. 몇 년간의 경리 업무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기에 후련했다. 그를 영업직으로 보내주지 않은 (삼풍제지) 사장은 떠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자네,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그래도 술 장사보다는 종이 장사가 낫지 않은가?”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장인수 사장 약력

195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대경상업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라 ‘고졸신화’ 최고경영자(CEO)란 말이 따라다닌다. 1976년 삼풍제지를 거쳐 1980년 진로에 입사한 이후로 내내 주류회사 영업맨으로 일해왔다. 2008~2009년 하이트주조와 하이트주정 대표이사를 맡았다. 2010년 1월에 오비맥주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해 6월부터 오비맥주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태권도 공인 6단이며 취미는 스포츠 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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