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05 03:28 수정 : 2013.02.17 15:51

지방에서 유학 온 대학생들은 낯선 도시에서 모든 것을 사야 한다. 기숙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거’도 사야 한다. 자취방과 하숙집 광고문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서울의 한 대학가 벽.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들,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없어졌으니까 네가 벌어서 한 채 사줘야 한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게 과연 가능하겠느냐”고 대꾸하고 싶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알았노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집 팔아서 아들 뒷바라지했다’는 말이 내 ‘부채’가 된 지도 벌써 십수 년째지만, 나는 여전히 변변한 직업 없는 대졸 백수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던 1980년 태어나서 5살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부산 초읍동의 자그마한 주택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낡은 단층 건물로, 주택이라 부르기도 뭣할 정도였지만 3대가 함께 살았다.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 그대로 ‘뒷방 노인네’였다. 1950년생인 아버지는 고졸 학력으로, 중동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다. 아버지는 거기서 만난 인맥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 야심찬 청년이었다. 큰아버지가 있는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불만이 점점 커지자, 아버지는 분가를 생각했다. 바야흐로 핵가족 시대로서 ‘우리 가족’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태동기였던 셈이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1985년, 할아버지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돌아가셨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는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그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큰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게 되었고, 우리는 이듬해에 이사했다. 본격적인 우리 가족의 삶이 시작되었다.

<기사 전문은 <나·들> 인쇄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글 노지아 (가명)

기획·자료 제공 ‘아파트 키드의 생애’ 기획팀 김류미, 박재현, 김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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