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9 02:38 수정 : 2013.02.08 18:06

자산, 청년 공자를 울린 정치가  

 정(鄭)나라는 진(晉)과 초(楚)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조그만 나라였다. 조공을 양쪽에 바치다 보니 국가 재정이 늘 부족했다. 소국 정나라의 재상은 공손교(公孫喬)라는 사람으로, 호가 자산(子産, ?~기원전 522)이었다. 자산은 공자가 30살 무렵 세상을 떠났으므로 나, 이생(이 소설 속 화자-편집자)은 그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얼마나 자자했던지 유랑하는 대륙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작은 나라의 수상에 불과했으나 탁월한 정치력과 외교술로 강대국들의 갈등을 중재하며 조국의 안녕을 도모했다. 자산은 중국 최초로 성문법을 제정(기원전 536년)한 인물로도 역사에 알려져 있다. 그는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형서(刑書)를 청동솥(당시의 청동솥은 정부의 권위를 상징했다)에 새기게 한 뒤 곳곳에 이를 전시했다. 훗날 자산이 법가(法家)의 효시로 알려지게 된 이 사건은 칭송과 함께 논란도 불러일으켰다. 재정 확보를 위해 효과적인 농민 통제가 절실했던 자산의 이 고육지책에 대해 진나라의 현인 숙향(叔向, 생몰 미상)은 “덕치주의를 포기했다”며 자산을 꾸짖었다.

 “법령이 많아지는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다. 훗날의 정나라가 걱정되지도 않더냐?”

 대국 선배의 힐문에 소국의 재상 자산은 이렇게 답한다.

 “선배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 구제가 급합니다. 자손대까지 걱정할 겨를이 없습니다. 명을 받들 수는 없으나 (가르침을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춘추좌씨전>(이하 좌전), 노소공 6년)

 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자산의 현실적인 법치는 그래서 냉혹하지 않았다. 자산의 국익 추구는 대체로 민익을 동반했기에 백성의 지지를 잃지 않았다.

 자산이 정나라를 다스린 지 26년 만에 죽자 장정들은 소리내어 울고, 노인들은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말했다. “자산이 우리를 버리고 죽다니 백성들은 누구를 믿고 산단 말입니까.”(<사기> ‘순리 열전’) 

 한번은 조정 원로가 총애하는 젊은 가신을 지방 고을의 읍재(마을 수장)로 보내고 싶어 했다. 자산은 그가 무경험자라며 반대했다. 그러자 국로가 간청했다. “그는 내가 아끼는 젊은이라 이번 기회에 정사를 배우게 하고자 한다.” 자산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배운 뒤에 정사에 입문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사를 학습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읍재가 된다면 그에게도 불행이요, 고을 백성에게도 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향교의 학생들이 자산의 정치를 놓고 시비를 따지고, 심지어 시위를 벌이려 하자 한 신하가 “철없는 것들이 정치를 뭘 아는가”라며 향교를 허물어버리자고 했을 때, 자산은 말했다.

 “향교의 학생들이 내 정치에 대해 선악을 의논한다고 한다. 저들이 잘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행하고, 저들이 잘못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고친다면 저들이 내 스승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향교를 부순단 말인가?”

 자산은 “천도(天道)는 멀고 인도(人道)는 가깝다”고 외친 사람이다. 주술을 배격한 인본주의자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을 모아 땅의 신(사·社)과 곡식의 신(직·稷)에게 제사를 지냈다. 자산은 인간의 심정을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더 높은 차원의 정치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이런 자산에 대해 공자는 “사람들이 내게 자산이 인(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며 자산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좌전> 노양공 31년) 훗날 공자의 민본대동(民本大同) 사상은 실로 자산의 정치 철학에 힘입은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영,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다 

 논어에도 등장하는 안평중(晏平仲, 이름 안영, ?~기원전 500)은 <안자춘추>(晏子春秋)란 저술로도 유명한 제나라의 명재상이었다. 공자는 그를 ‘구이경지’(久而敬之·‘공야장’편 16장), 즉 오래 사귀어 편해져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공자가 쉰 살 무렵에 사망했는데, 제나라 3대 임금에 걸쳐 무려 55년간 재상직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정의 영수이면서도 밥상에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했고 집안의 여자들에게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임금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고자 하면 그 명령을 따르고 올바르지 않을 경우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한 사람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최저가 안영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죽이지 못했다. “백성이 그를 신망하기에 죽이면 이롭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안영은 정나라의 자산, 진나라의 숙향, 오나라의 계찰 등과 더불어 훗날 역사가들이 ‘현상(賢相)의 시대’라 부른 이 시기의 대표적인 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안자의 마부가 주인의 권세를 업고 의기양양해하자 그의 아내가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주인은 키가 여섯 자도 안 되는 몸으로 대국의 재상이 되어 이름을 떨치고 있음에도 늘 자기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데, 당신은 키가 여덟 자나 되면서도 남의 마부 노릇이나 하며 의기양양해합니다. 이것이 소첩이 헤어지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이후 마부는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여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마부의 태도가 바뀐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안자는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뒤 그 마부를 추천하여 대부로 삼았다.(<사기>‘관안열전’)

 사마천은 이런 안영을 관중과 나란히 세워 열전에 넣으며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다”는 찬사를 바쳤다.

 임금을 받드는 재상이 역사의 전면에 두드러진다는 것은, 거꾸로 임금의 권위와 세력이 그만큼 약해졌음을 뜻한다. 현명한 재상은 드물게 출현하기에 현상이다. 제후의 명을 받아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끈 실력자들 중에는 마침내 권력을 찬탈하려는 야심가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주군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능력 있는 부하들을 양성했다. 대부의 가신인 사(士) 계급 출신들은 주군의 일을 대리하면서 결국 실무 능력으로 주군을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대부와 사 계급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공자가 살던 무렵의 흔한 세태였다. 공자가 사 계급 출신으로 ‘천하구제’라는 큰 뜻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계급 변동의 사회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 속의 공자(저우룬파 분).

 좋은 값으로 팔리고 싶다

 공자는 자신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은 데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하자 “미천한 출신이어서 그렇다”(‘자한’편 6장)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요약한 적도 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방향을 세웠다. 마흔에는 학문에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쉰에 이르러 하늘이 내게 준 명을 알았다. 예순이 되니 험한 말에도 웃을 수 있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위정’편 4장)

 공자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서 교양인의 자부심을 지녔으나 조실부모한 한미한 가문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쉼 없이 배워서 천리에 통달하려고 한 일생(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헌문’편 37장)이었다. 그는 서른에 자신의 학문을 세운 이래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혼탁한 시대를 자신의 이상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의 이상은 한 사람의 추구로 실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에 비해 지나치게 미래의 사람이었고, 그의 시대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아직도 먼 과거였다.  

 공자는 50대에 이르러 처음 벼슬다운 벼슬에 올라 나라를 직접 운영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자는 한때 나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만 있다면 반도의 무리라 하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마음을 품기도 했었다.(‘양화’편 5장) 공자는 그런 큰 의욕 속에 일정한 정치개혁을 성공시키기도 했으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가신들을 제압하려다 실패하면서 사실상 실각했다. 인과 예에 기반한 공자의 협동적 덕치주의는 핏발 선 간계와 무력을 앞세운 당시 정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공자는 자신의 정치가 참주는 물론 임금한테도 배척받고 있음을 느끼자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54살에 고국을 떠난 공자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제자들이 장기간 굶주림에 시달리는 곤경에 처할 때도 공자는 끝내 자신이 세상에 쓰이기를 원했다.

 “팔아야지, 암 팔아야 하고 말고. 나도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좋은 값으로 팔리기를 바라는 몸이다.”(‘자한편’12장)

 하지만 현실 속 임금들은 공자의 가치를 알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엔 무력하거나 무능했다. 임금 주변 총신들의 눈초리도 점차 따가워져갔다. 가신들의 패권주의를 경계하라고 임금을 가르치는 공자가 달가울 리 없었다.

 “저 철없는 늙은이를 하루빨리 우리 임금에게서 떼어놓아야 할 텐데….”

 권세를 누리는 총신일수록 공자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공자의 꿈은 점점 현실 정치에서 멀어졌고, 그 사이 공자와 더불어 제자들도 늙어갔다. 공자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제자들의 미래가 가슴 아팠다. 저들의 앞길을 터줘야 하는데….

 “돌아가자 돌아가자. 고향에 두고 온 제자들이 뜻은 크나 아직 실천할 방법을 모른다. 문장만은 확실히 뛰어난 이들을 나는 어디서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구나.”(‘공야장’편 21장)

 공자의 속마음을 눈치챈 제자들이 노나라 임금에게 달려갔다.

 “우리 선생님을 국로로 대우해주십시오. 그가 나라 밖에 있는 것은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돌아와 인재를 키우게 하소서.”

 노나라 애공과 실권자인 계강자(季康子)는 마침내 공자를 나라의 어른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의 일이다. 공자의 귀국에는 염구와 자공 같은 정치적 수완과 재력을 지닌 제자들의 힘이 컸다. 공식적으로 공자를 초빙한 조정에서 인재 교육에 필요한 돈과 땅을 내주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자학단’, 나아가 거대한 유교제국은 이로써 그 성립의 역사적 기단을 마련했다.

 

 노나라와 곡부 

 공자가 태어나고 죽은(기원전 551~479) 노나라는, 주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이자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주공(周公, 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 형 무왕이 일찍 죽자 섭정이 되었으며, 어린 조카 성왕이 장성한 뒤 대권을 돌려주었다. 생몰 미상)이 아들 백금을 봉한 나라다. 주공의 적통이며 문화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높은 나라였다. 지금의 산둥성 부근에 위치한 노나라 영역은 상(商, 은나라의 본래 이름)나라의 지배 종족인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백금이 자신의 일족과 은족을 대거 이끌고 와 동이족 원주민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두 종족이 문화적으로 결합한 결과가 노나라였다.

 공자가 노나라 곡부 인근의 추읍 출생이면서 스스로 은나라의 후예를 자처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공자의 조상은 송(宋)나라에서 노나라로 건너왔는데, 송나라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은 왕족의 제사를 지내주기 위해 그 왕족에게 분봉한 나라다. 그러므로 송나라는 은 왕실의 적통이 된다. 공자가 자신을 은의 후예라 하고, 훗날 사람들이 공자를 동이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뿌리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자가 은나라 또는 송나라 귀족의 후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가 은나라(또는 동이족)의 후손임을 자처하면서도 그가 이상으로 따르려 한 것은 주공의 정치 사상과 치세였다는 사실이다. 나, 이생이 가까이서 지켜 본 공자와 그 제자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노나라의 수도는 곡부(曲阜)다. ‘구불구불한 언덕’이란 뜻으로 ‘취푸’라고 불리는 이 도읍에는 춘추시대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제일 높은 언덕에 궁성이 있고 그 아래 작은 언덕들 사이에 시가지가 조성돼 있었다. 도시는 돌과 흙으로 쌓은 성으로 둘러쳐진 일종의 성읍(城邑)국가 형태를 띄었다. 성 안은 왕궁을 중심으로 귀족·관리 계급과 시민권자라고 할 수 있는 국인(國人)의 주거지와 시장, 왕실, 관청에 물품을 제작·공급하는 공방 등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과 외거노예들은 주로 성벽 안팎을 따라 띠집을 짓고 거주하며 농경과 어로·수렵에 종사했다. 군대는 성읍 인근의 방어용 성인 나성에 주둔하며 유사시에 대비했다. 성과 주요 성들 사이의 숲과 들판은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 비슷했는데 정복 토착민이나 은나라 유민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당시 시민권자인 국인과 구분해 야인(野人)이라 통칭했다.

 

 중국 최초의 민간 교육

 공자의 학당이 자리잡은 곳은 성 안의 궐리(闕里)라는 마을이다. 공자는 서른 살 무렵부터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립학교였다. 중국은 고대부터 국가 중심의 교육, 즉 관학(官學)의 전통이 선 나라다. 은나라 때는 갑골문과 점복을 가르치는 학궁(學宮)이, 주나라와 노나라에는 제의와 예절을 가르치는 벽옹(###대장서 표기 임금 벽+雍)과 반궁(泮宮)이란 상설 학교가 있었다. 모두 왕족이나 귀족 자제를 위한 국가 교육기관이었다. 이런 철저한 귀족 사회에서 공자가 신분이 낮은 사 계급이나 일반 서민 자제를 위한 민간 교육기관을 연 것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교육에서 만큼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이 계급을 초월하여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공자는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이를 마다는 법이 없었다. 공자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사람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단다. 가르침에 신분의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有敎無類) 이란다.”(‘위령공편’ 38장)

 2500년 전의 엄격한 봉건귀족사회에서 최하층 계급 출신과 명문 귀족의 자제가 나란히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먼 미래에서 온 나, 이생마저도 그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공자의 학당은 처음에는 아마도 초라했을 테지만, 68살의 공자가 귀향한 무렵에는 조정의 지원과 출세한 몇몇 제자들의 노력으로 곡부 제일의 학당이란 명성에 걸맞는 번듯한 규모의 당(堂)과 실(室)을 갖추고 있었다. 푸른 소나무 숲과 맑은 계곡, 연지(蓮池)와 언덕이 잘 어우러지고 교문 양쪽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늠름히 가지를 펼친 아름다운 서원(書院)이었다.

 만년의 공자는 이곳에서 <시경>과 <서경>을 엮고 각종 예악을 정리했으며, <춘추>의 편찬에 착수했다. 역(易)에도 심취해 나, 이생이 그 죽간의 가죽끈을 세 번이나 새로 묶어드릴 만큼 애독하셨다. <단전>, <계사전>, <대상전>, <문언> 같은 주역 해설서인 이른바 <주역십익>(周易十翼)을 지으실 때는 내가 갈아드린 먹이 얼마나 많았던지, 문도들에게 “학당의 연못 물이 반으로 줄었다”는 과분한 칭찬을 듣기도 했다.

 “내가 몇 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역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으련만….”(‘술이’편 16장)이라며 빙그레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공문(孔門)에서는 공자가 말씀하고 제자들이 정리한 시·서·예·악을 가르쳤다. 이로써 중국의 육예(六藝)가 비로소 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높은 수준의 교육이 알려지자 사방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와 마침내 공자의 문도가 3천 명을 넘었다는 찬탄의 소리가 천하에 돌았다. 그들 가운데 노년의 공자가 스스로 자신의 직제자로 인정한 문도는 70명이 조금 넘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스승과 함께 위난을 겪었던 10명의 제자들은 훗날 유가들로부터 공문10철(孔門十哲)이란 영광스런 이름으로 추앙되었다.

 공자는 궐리의 학당에서 5년쯤 살다가 일흔셋의 나이에 수많은 제자들의 애통 속에 곡부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개혁가로선 실패한 삶이었으나, 교사로서는 행복한 죽음이었다.

 태산이 이렇게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이렇게 부러지는가!

 철인이 이렇게 사라지는가!

 공자가 임종하기 이레 전에 마당을 오가며 토로한 유언 같은 말씀이었다. <예기> ‘단궁 상’편에 따르면 자공이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나, 이생 또한 그날 아침 마당을 쓸고 있다가 산책을 나온 공자를 보았다. 지팡이를 뒷짐에 지고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말씀을 했는데, 왠지 그 모습이 마지막일 것 같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새로운 시작

 공자의 죽음은 위대한 사상의 시작이었다. 나, 이생은 생전에 선생님이 즐겨 신으시던 가죽신을 가슴에 품고 행렬의 맨 뒤에서나마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참례하는 더 없는 영광을 누렸다.

 생전에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승의 위의에 걸맞는 화려한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공자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허영을 꾸짖으신 뒤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나는 허명의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지 않다. 너희 제자들에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져 죽는 것이 본래 내가 바라던 바다. 予與其死於臣之手也 無寧死於二三子之手乎”(‘자한’편 11장)

 문도들은 예법에 따라 공자 묘를 3년간 지켰다. 자공은 특별히 6년을 시묘살이하며 스승이 남긴 학단의 기초를 다졌다. 세상에 전하는 가장 위대한 책, <논어>는 시묘하던 제자들이 밤마다 각자 스승에게 들었던 가르침을 서로 확인하면서 그 편찬이 시작되었다. 나는 묘당으로 저녁밥을 나르며 그들이 치열하게 논전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나, 이생이 꿈속에서 노나라로 건너왔으나,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진심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저 위대한 무덤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위대한 교사였으며, 저 제자들은 아름다운 사도들이었다. 천지를 방황하다 우연히 공자 일행의 짐꾼이 되었던 나, 이생은 최대의 행운아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의 가까운 곁에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인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李生自序 이생자서

나 이생(李生)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감사드린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본래 노(魯)나라 사람이 아니라 조선 남부에서 온 동이(東夷)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공자 사거 2400여 년 뒤에 태어났다. 어느 깊어가는 가을 밤 공원 그네에 앉아 불 꺼진 집들을 무연히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지금의 중국 땅이었다.

 이생은 졸지에 미지의 과거에 떨어져 낯선 공간을 유랑했다. 오로지 내가 왔던 시공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대륙을 헤매다가 천하를 주유하고 계시던 공자 일행과 조우하여 그 무리의 말단에 끼게 되었다. 이후 일행의 짐꾼으로 일하면서 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얼마간의 동행이었을까. 나는 미래에서 막연히 알던 공자라는 사람과 그 제자들의 이상을 향한 열정,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교감했다. 그 순간의 경이로움이란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뜻밖의 천운을 얻은 기쁨에 젖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조차 잊었다.

 만년에 고국에 돌아와 후학을 키우시던 공자께서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친 제자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자기 나라와 고향으로 흩어졌다. 눈 밝은 몇몇 제자들은 훗날 <논어>(論語)라고 불리게 될 스승의 위대한 말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 나 이생은 학교 마당을 쓸고 문도들의 신발 간수하는 일을 하던 어눌한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먼 미래에서 와서 한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목도하게 한 천명의 무거움을 피할 수 없어 내가 보고 들은 바를 감히 기록하려 한다. 부디 하늘의 도움으로 이 죽간들이 만고풍상을 견뎌내어 우리 선생님의 말씀과 뜻이 만세에 퍼지는 데 티끌만 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기 간절히 바란다.

 내 나이도 어느덧 이순(耳順)을 향하고 있으니 살아 있을 날이 많지 않다. 부디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들을 다시 보기를 소망하지만, 이뤄지지 않더라도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늘의 큰 보살핌이 있어 언젠가 내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먼저 아무 서점이나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서 나 이생이 전한 선생님의 흔적을 단 한 조각이라도 보게 된다면, 비록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흔쾌히 기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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