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4:57 수정 : 2014.07.03 14:57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여인이 있다. 항암제 때문에 남은 머리카락이 없지만, 빠지기 전에는 붉은색이었단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불새여인’으로 부르기로 한다. 불새여인은 죽기 전에 아들을 보고 싶어 한다. 먼 나라에서 의사로 있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오려고 했지만, 화산이 폭발해서 당분간 비행기가 뜰 수 없다.

“화산이 재를 뿜어대는 한 아무것도 날 수 없다고 하네요.”(25쪽)

아들을 기다리는 말기암 환자. ‘나’는 비행기 운항이 재개될 때까지 환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결심한다. 세헤라자데가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로 목숨을 부지한 것처럼, 불새여인이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한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불새여인이 죽기 전에 죽도록 웃겨줄 생각이야>는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저자의 경험담인데, 이야기가 매일 이어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주인공의 노트다. 그 노트에는 주인공이 경험한, 혹은 주위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잔뜩 담겨 있다.

“노트에 담아놓은 사연은 대부분 웃긴 이야기들이야. 불새여인이 병세 악화로 돌아가시기 전에 죽도록 웃겨드릴 생각이야.”(79쪽)

주인공이 일 때문에 바빠 불새여인에게 들를 짬을 내지 못하면, 동료들이 대신 불새여인에게 가서 노트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 차이 때문인지 주인공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죽도록’ 웃기지는 않지만, 하얀 가운을 입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의사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

외형은 그럴듯하지만, 속으로 곪아터져가는 곳이 있다. 이 나라에서는 휴전 상태인 상대국을 견제해야 할 정보기관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사람들은 지역감정과 색깔론에 눈이 뒤집혀 선거 때마다 얼토당토않은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 배가 침몰하기라도 하면 선장과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하며, 그 결과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다. 책 대신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 수도 없다. 그래서 그 나라 국민은 자신들을 일거에 구원해줄 영웅을 기다리지만,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 전에 죽은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났다.

<나·들>의 창간은 바로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의도였다. “정보의 원형질인 사람을 중심으로 재현되는 저널리즘을 구현하겠다.” 구원은 저 먼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나’가 모여 연대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게 ‘나들’이 만들어진 이유였던 것. 실제 ‘나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희망을 던지고자 했다. 편집장을 비롯한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든 기사들은 “아니 이런 사람이 있어?”라는 감탄을 독자에게 선사해줬다.

다시 불새여인을 돌보는 의사 얘기로 돌아가자. 주인공 의사를 찾아온 ‘욥’이라는 환자는 간경화와 간암을 앓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뼈와 폐, 뇌에 암이 전이된 상태였다. 자신의 병을 ‘말년의 그랜드슬램’이라 부르면서 “제가 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병에 걸릴 거면 제대로 걸려보려 했습니다”라고 자조적 웃음을 흘리는 욥, 그는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 마실 위스키 한 잔이면 됩니다.”(189쪽) 주인공 의사는 위스키 한 병을 구입해 가운 속에 숨겨 그에게 전달한다. “새벽녘에 사망 사실을 확인한 의사는 환자의 입이 귀까지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마신 위스키 덕분이었다.”(190쪽) 의학이 제법 발달했지만, 말기암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위스키가 고작이다. 이건 불새여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재미있는 얘기도 그녀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다.

“(불새여인의) 손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 사람은 이렇게 죽는 걸까? 표면이 차가워지고 숨을 멈추면서?”(323쪽)

게다가 주인공 의사는 불새여인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오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사가 한 일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웃게 해주려고 이야기를 짜내는 의사 덕분에 불새여인은 잠깐이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

2012년 10월 첫선을 보인 <나·들>이 이번호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잡지의 시대가 저물고 있을 때 창간한데다 말초적인 것에 유난히 더 반응하는 우리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2년을 채 버티지 못한 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들>의 실험이 의미가 없진 않았으리라. 사회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가며 희망의 불씨를 찾으려는 ‘나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조금이나마 밝아지지 않았을까? 그 희망의 불씨가 다른 곳에서 점화돼 활활 타오르기를 빌어본다.

글 서민 수줍음이 너무 많아, 같은 사람을 다시 볼 때도 매번 처음 보듯 쭈뼛거린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대화하다보면 10년지기처럼 군다. 기생충학을 전공했고, 현재 단국대 의과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기생충의 변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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