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4:41 수정 : 2014.07.03 14:41

신도를 양산하는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대중음악은 이제 전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카리스마’를 소구점으로 하는 ‘록’의 패러다임이 아닌 ‘소통’을 말하는 시대다. 6년 만에 컴백한 신해철의 앨범은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적 정서를 모호하게 노래하던 ‘마왕’다운 과거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케이시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길 언어의 의미는 그것의 ‘쓰임’에 있다고 한다. 우리 사상과 철학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이 말씀의 의미는, 하지만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다. 말은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특정한 맥락 안에서 쓰이고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연필’은 흔해빠진 필기구가 되거나 혹은 빼빼 마른 같은 반 친구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의 의미를 고정해서 소통이 가능하자면 그것이 쓰이는 맥락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이러한 주장이 철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세상의 난다 긴다 하는 사상가들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인지 의심스럽다. 하긴 세상을 바꾸는 원리가 완전히 새롭거나 복잡하고 거대해서 대단해 보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늘 보고 듣는 일상 속에 있지만 미처 그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야말로 더 큰 생각의 진전을 끌어내는 디딤돌이 된다. 아무튼 늘 곁에 있는 혹은 있었던 어떤 것이 새로운 생각의 출발이 되거나 새로운 시대의 주추가 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새삼스레 어떤 일상적 사실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 어떤 것의 문제라기보다 대체로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그렇게 발견된 의미에 공감하거나 시비할 수 있게 된 ‘지금 여기’의 우리라는 ‘맥락’의 문제다.

신해철의 신곡 <아따>(A.D.D.a)는 그의 새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의 정식 발매에 앞서 미리 공개된 노래다. 혼자의 목소리를 한켜 한켜 쌓아올려 만들었다고 해서 그 실험성이 상찬되는 노래다. 켜켜이 쌓인 목소리가 두께를 가지고 들리는 이 노래는 한편 혼자의 목소리를 여러 사람의 노래로 만드는 힘(intensity)을 시도하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소리에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소리를 통해 열리고 소리를 통해 닫히며, 소리로 사람을 길하게 하거나 흉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해철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래가 근본적으로는 ‘소리라는 에너지’라고 생각했던 듯싶지만, 특별히 이 노래로 그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쌓아 소리를 만드는 일은 한편으로 반복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반복의 균열을 드러내는 차이가 겹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따>는 신해철이라는 한 사람이 반복되는 목소리를 통해 무한 증식하는 형식으로 자기를 벗어나 보편에 마주치자는 그다운 영민함의 산물이다. 대중의 귀와 입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노래의 문화적 과정이 <아따>에서는 아예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포섭돼 있다. 이러한 과정은 그의 목소리(들)로 빚어진 소리의 안개에 가려 날것의 외설됨을 순화한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노래는 ‘소통’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해철은 이미 지금과 다른 세대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가수다. 물론 그와 함께 소통하는 대중이 있으며, 그와의 소통에 익숙한 세대 또한 지금 여기 있다. 그럼에도 신해철에게 붙여진 ‘마왕’이라는 타이틀은 그가 ‘카리스마’를 중요한 소구점으로 하는 지난 시대의 대중음악가라는 징표로 여전히 남아 있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대중음악이 엘리트 중심적인 ‘록’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국면에 들어섰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적어도 지금의 시대에 음악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은 더 이상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집단이 아니다. 도대체 어디에들 숨어 있었던 건지 회를 거듭할 때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등장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능력자만 보더라도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이제 우리와 ‘다른’ 어떤 이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다른 개성’과 ‘다른 능력’을 보임에 있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나, 존재 자체를 턱 짓고 구분하는 데는 한없이 싸늘한 얼굴이 되어버린다.

신해철의 새 노래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노래다. 아카펠라의 형식을 장인적 정신과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재구성한 그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여전히 그의 노래일 뿐이다. ‘무한궤도’ 이후 ‘넥스트’ ‘비트겐슈타인’의 앨범, 그리고 솔로 앨범들을 통해 그가 보여준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아따>의 스타일과 형식이 주는 충격이 그다지 크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충격이라면 6년 만의 컴백이고,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이 나름 잘 보존돼 있었다는 점일지 모르겠다. 사회적 이슈를 비교적 선명한 선으로 도려내듯 드러내던 같은 시절의 서태지와 다르게 다분히 개인적 정서와 감정의 수준에서 모호하게 노래하던 그의 감수성은 <아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표출된다. 사회적 발언과 행동에 적극적이고 직설적이었음에도 정작 음악에서는 다소 낭만적이었던 그의 입장은 <아따>에서도 여전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2014년 여름 신해철의 신곡과 새 앨범이 주는 충격이란 여전한 그와 변해버린 맥락의 묘한 긴장과 갈등을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마왕’ ‘여전한 신해철’은 한편으로 여전하지 못했던 지난 6년을 방증하는 것이며, 그 시간을 둘러싼 더 커다란 흐름 속에서 세상을 다른 그림으로 보게 된 우리의 거울인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동네 한구석이라도 프랜차이즈가 아니면 장사 되는 빵집이나 식당이 없고, 카페를 차려 커피를 내리고 작은 스튜디오 하나 장만해 사진이나 찍으며 살려 해도 학원이나 대학을 통하지 않고는 먹고살 길 없는 나라에 살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우리는 점점 더 ‘어지간하고’ ‘부실하고’ ‘미운’ 놈들이 되어간다. 이런 세상을 우리는 그저 ‘버티고’ ‘뭉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런 우리는 보수적이고 냉소적이다.

신해철의 <아따>는 여전한 신해철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을 여전히 그다운 어법으로 이야기하는 노래다. 문제는 그 노래를 맞는 우리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변했고, 그 변화는 신해철의 노래를 또한 변하게 만들 것이다. 그의 노래 또한 그 의미는 우리라는 맥락 안에 있는 것일 테니. 록의 패러다임 끄트머리에 발을 딛고 카리스마 해체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머리를 내밀던 신해철의 음악적 스탠스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의 노스탤지어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의 여전한 흔적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반갑다, 신해철.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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