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4:39 수정 : 2014.07.03 14:39

무려 ‘존재’를 성찰하는 가수 신해철이 주는 감동과 메시지는 격렬했다. 그는 대중가수 가운데 유일하게 대중을 상대로 ‘존재를 성찰하자’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참여가 대중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미성숙의 구조에서 소신을 지속적으로 밝혀온 신해철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대상에 가깝다. 케이시에이엔터테인먼트 제공
그 시절, 신해철을 좋아한다는 건 뭔가 괜찮은 것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듀스’가 또래 아이들의 영혼에 중얼중얼 힙합을 이식하고 있을 때, 신해철은 (동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왕’이라 불렸고 ‘교주’로 칭송됐다. 그의 노랫말이 묘사하는 세계는 대체로 어두웠지만 묘하게 확신적이고, 허세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아우라’가 분명 있었다. 그가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Here, I Stand For You)(1997)에서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라고 읊조릴 땐, 부끄럽지만 울었다.

물론, 그도 한때 ‘아이돌’이었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같은 발라드를 부르던 시절의 그는 책받침 표지 모델로 군림하던 핫한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그는 연예인으로서의 강렬한 ‘소비’가 아닌 뮤지션으로서의 불안정한 ‘자립’으로 돌아갔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유하 감독은 ‘가요계의 누벨바그’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를 연예인으로 소비하던 시절엔 그런 건 잘 몰랐기에, 그런 미학적 평가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런 비평적 이해가 없더라도 직관적으로 느끼고 체감적으로 보기에 그는 당대를 지배했던 스타들과는 조금 다른 지형에서 누군가를 이끌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서태지와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듀스 사이에서 신해철을 좋아한다는 것은 뭔가 수준이 고만고만한 동질성의 집단에서 한발 떨어져 무리를 관조해도 좋다는 이질성의 승리감을 주었다. 그의 라디오를 듣는 행위는 이질적인 나와 교류하는 누군가들이 이 사회 어딘가에 분명 암약하고 있다는 심리적 위안이었다. ‘난 누구나 좋아하는 그 누굴 좋아하진 않는다, 너희와 나는 다르다’의 치기 어린 혹은 꼭 필요한 성장 경로에서 신해철은 없어선 안 될 요소였다.

오늘의 신해철을 있게 한 앨범이라고 해도 좋은 (1994년 5월)의 앨범 제목은 ‘The Being’이었다. 앨범 제목이 무려 ‘존재’다. 읽기만 해도 숨이 가빠지는 것 같고 조건반사적으로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당시 그 앨범이 던진 쇼크는 정말 대단했다. 일개 가수가, 아니 조금 더 격식 있게 ‘밴드’라고 불러보더라도 결국, 대중 취향의 보편성 회로에서 존재를 구축할 수밖에 없는 연예인이 대중을 상대로 ‘존재’를 성찰하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예컨대, 이런 식의 시도는 같은 해 8월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발해를 꿈꾸며> 정도가 아닐까 싶다. 서태지의 경우 감히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지위를 구축한 뒤에야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신해철은 대마초 파동을 거치며 흔들리던 입지 속에서 굴하지 않고 ‘존재’를 성찰하자고 물었다. 그 ‘패기’ 혹은 ‘결기’는 당시로선 신해철이 유일했다.

그 앨범에는 <이중인격자>와 <껍질의 파괴> 그리고 신해철의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궁극의 명곡으로 꼽을 수 있는 <날아라 병아리>가 수록돼 있다. 흩어지지 않고, 한곡 한곡이 ‘존재란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으로 정렬돼 있다. 앨범에 대한 이런 완벽한 지배력은 1990년대의 몇몇 가수를 마지막으로 이제 사라진 유물이다. 가사 역시 당시가 아닌 지금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촌스럽지 않을 만큼 파격적이고 감각적이다.

소리의 구성 역시 훌륭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메인스트림 록밴드’에 걸맞게 밴드적 정체성에 충실한 메탈 요소와 대중성을 감안한 록발라드와 어쿠스틱의 리듬이 거의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당시 신해철은 26살이었다. ‘무한궤도’ 시절부터 프로듀싱을 해온 그이긴 하지만 20대 중반에 이미 완벽한 자기 세계를 갖추고 세상을 향해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내놓았던 뮤지션이다. 이 음반은 당연히 한국의 명반 100선에 꼽힌다.

철학을 공부한 지적인 가수. 20대 중반에 세계관 구축을 끝내고 기꺼이 세상과 맞서던 이 음악인에 대한 이후 세대들의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고,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자생적인 스타를 만나보지 못한 채, 세상의 가수들이 온통 기획사를 통해서만 쏟아져나와 엇비슷한 노래들을 뽐내던 풍토에서 신해철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듯 보였다. 그의 ‘달변’은 한 분야에 천착해 그 분야에선 일성을 이뤘지만 다른 분야에는 어눌할 듯한 여타 천재들과는 다른 형태의 지적 자아를 입증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런 위상이었다. 서태지가 존경스럽고 듀스가 좋아하는 것이었다면, 신해철은 존중하는 대상이었다.

시민단체에서 문화운동을 하던 시절 몇 번 그와 함께한 적이 있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그가 ‘대마초 비범죄화 운동’에 함께해주었을 때다. 대마초 흡연 경력이 있는 연예인은 많았지만 어떤 연예인도 나서기 꺼릴 때, 신해철은 기꺼이 그 ‘운동’에 동참해주었다.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제한해선 안 된다는 그의 확신은 <100분 토론>(MBC)과 여러 매체를 통해 전파됐고, 결과적으로 그는 여러 번 곤혹을 치렀다. 하지만 그의 소신과 그 소신을 맺는 확신에 찬 말들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에겐 큰 힘이 됐던 것이 분명하다. 이후에도 그는 ‘파병 반대’를 비롯해 대중문화인들의 사회참여가 필요하던 시점마다 소신 있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왔다. 사회참여가 종종 대중성 상실로 이어지는 미성숙한 구조에서 그는 존중받아 마땅한 행보를,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길을 걸어왔다.

그런 그가 6년 만에 새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이란 개념 자체가 옅어지는 음원의 시대에 그는 여태껏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어떤 시도들을 했고, 그 실험의 결과로 서태지와 맞서겠다고 농을 쳤다. ‘마왕’ ‘교주’로 불리던 그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를 추종하던 이들은 그가 우려하던 그 힘겨운 세상에서 퍽퍽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Here, I Stand For You. 내가 그래도 여기에 있었노라고.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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