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3 14:10 수정 : 2014.07.03 14:13

1. 망명조정의 동선(動線)을 따라서

앞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제나라 망명 시기에 공자가 주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문장의 형태를 갖춘 기록으로 사마천의 ‘공자세가’가 거의 유일한 권위를 지니지만, 이 또한 매우 단편적인 사실의 취합이어서 7년여에 이르는 ‘잠룡의 시절’은 여전히 숱한 의문부호들에 둘러싸여 있다. 나, 이생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까지 당시의 촌로들을 찾아다니며 전언과 전문의 편린을 채집했다고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실로 확정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동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떠난 이유’가 분명하다면 ‘이후 행적’도 그 ‘이유’를 중심으로 이뤄졌을 것이 아닌가?

공자는 서기전 516년 노나라를 떠나 서기전 509년 노나라로 완전히 귀국했다. 이 시기는 노소공이 친위쿠데타에 실패한 뒤 망명했다가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온 시기와 일치한다. 이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이유가 소공의 망명에 대한 공분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소공이 떠나자 공자도 떠났고, 소공이 죽자 공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팩트’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공자의 망명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소공의 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공자 일행이 신분상으로는 일개 사인(士人) 망명객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이면으로는 망명조정과 일정한 선을 유지하며 행동했고, 망명조정의 동선을 따라 자신들의 행로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추정이 옳다면, 나는 망명조정의 움직임에서 당시 공자의 심사(心事)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희망을 품고 나, 이생은 제나라와 진나라 일대를 여행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수년이어도, 선생님의 시간으로는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과거라 그 자취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찾아나선 여정만으로도 나는 감히 선생님의 고투만큼 나의 고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럼 소공의 출국과 사망까지의 종적을 따라가보기로 한다. 문득 그 언저리에서 책간(冊簡)을 옆구리에 낀 채 무엇인가 골똘히 사색에 빠져 있는 키가 큰 한 망명객의 실루엣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젊은 시절의 선생님 곁에 선 문도이리라.

2. 치열한 국제외교전

서기전 516년 망명한 소공은 송나라와 위나라의 공실을 동원해 맹주국인 진나라에 계씨 정벌을 주장하는 국제회의를 열도록 부탁하면서 소공과 계씨 정권 간에 치열한 외교전의 막이 올랐다. 간자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계평자(계씨 정권의 수장인 계손의여)가 즉각 가신들을 소집했다. 회의를 주도한 사람은 친위쿠데타 때 계평자를 위해 맹활약한 젊은 가신 양호(陽虎)였다.

“제후회담이 열려 연합군이 결성되면 끝장입니다. 제후들은 임금을 쫓아낸 신하를 처벌하자는 소공 쪽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후연합군 결성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회담이 열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맹주를 자처하는 진나라가 소국의 구원 요청을 받고 모른 척할 명분이 없질 않은가?”

“회담 요구 자체를 묵살할 수는 없습니다. 군주 회담 대신 대부 회담을 먼저 열도록 한 다음, 대부들을 매수하여 제후동맹을 무산시켜버려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런데 공조(노소공의 이름) 그 자가 앞으로도 계속 사방을 들쑤시고 다닐 텐데 그때마다 대부들을 매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오?”

“화근의 뿌리를 잘라야죠. 제가 군대를 이끌고 운읍으로 가 임금을 탈취해 오겠습니다. 궁전 앞뜰에 앉혀놓으면 더 이상 복위 운운하는 꼴값을 떨지 못하겠지요.”

이리하여 계씨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진나라 실력자 사앙(범헌자)이 진경공의 재가를 얻어 군주회담 대신 집정대신회의를 소집한 다음, 노소공의 부탁을 받고 계씨 정벌을 주장하는 송나라와 위나라의 대신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노나라 임금이 자기 나라를 떠난 것은 계평자의 책임이 아니오. 지금 계씨는 오히려 민심을 얻고, 제나라와 초나라가 그를 돕고, 하늘이 돕고 있소.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보오. 그럼에도 두 분이 앞장서서 노나라 임금의 복위를 주장한다면 내가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소. 나 또한 따라나서야지요. 그러나 노성(魯城)을 포위하였다가 자칫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그곳에서 죽기로 합시다.”(<좌전> 노소공 27년)

섣불리 나대다가 일이 실패하면 두 사람은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맹주국의 집권자가 면전에서 을러대자 소국의 두 대신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바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한편 운읍을 공격한 양호는 운읍의 저항이 거센 가운데 마침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소식을 듣자 철군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소공과 망명조정에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양호가 노린 것도 기실 이런 심리적 효과였다.

<논어>에서 공자를 회유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양호는 공자의 일생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3. 치욕의 연회

제후연합도 무산된데다 직접 군사적 공격까지 받아 겁에 질린 소공은 제경공을 만나 구원을 요청하기로 한다. 서기전 515년 겨울 노소공이 임치에 나타나자 경공의 입장이 곤란했다. 만나자니 울고불고 매달릴 게 뻔하고, 안 만나주자니 도의상 눈치가 보였다. 명분만으로 보자면 당연히 노소공의 복위를 지지해야 하지만, 실리를 따지면 허울뿐인 소공보다는 계씨 쪽과의 우호가 더 짭짤했기 때문이다.

“소공에게 계씨 정벌을 주장할 기회를 주어선 절대 안 됩니다.”

제나라 조정이 짜낸 묘안은 향례(饗禮)였다. 국빈의 예를 갖춰 맞이하는 것이니 소공이 사사롭게 경공과 대면하기 어려운 의전이었다. 제나라가 소공을 국빈의 예로서 맞이하겠다고 하자, 의도를 간파한 소공의 총신 자가자가 바로 맞불을 놓았다.

“아이고, 사돈 간에 번거롭게 무슨 향례란 말입니까? 그저 술 한잔 나누면 되는 연례(宴禮)로 족합니다.”

과도한 대접은 사양한다는 손님의 겸양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제나라 조정은 난감해졌으나 곧 누군가가 묘안을 만들어냈다.

소공 쪽은 연회가 무르익으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 소공이 경공에게 직접 술을 따르며 본격적인 읍소작전을 펼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 연회가 본격화되려나 싶을 즈음에 경공이 먼저 소공을 위로하는 말을 한 다음 재상 안영에게 시관을 시켜 소공에게 술을 올리도록 했다. 소공이 찝찝한 기분으로 술잔을 받아들자 경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가 쉬겠소”라며 자리를 뜬 것이다.

이는 소공과 노나라 대신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같은 임금끼리 술을 직접 따라주지 않고 신하를 시켜 술을 올리게 한 것은 상대를 같은 임금 반열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제나라가 소공에게 읍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짜낸 불가피한 계략이었다지만,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소공을 욕보인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4. 사라진 재상

소공이 경공에게 충격적인 하대를 당했다는 소식은 곧 노나라 망명객들 사이에도 퍼졌다. 많은 노나라 지식인들이 울분을 금치 못했다. 이 사건은 공자의 신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때 공자는 임치에서 고장(고소자)이라는 세력가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젊은 외국인 공자가 임치의 손꼽히는 권세가를 직접 알지는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면, 공자는 노나라 망명조정의 유력자들- 나는 그가 강경 주전파의 수장이며, 공자 집안과도 인연이 있는 장소백이라고 본다- 추천으로 고소자의 문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임치에서는 많은 노나라 망명조정 사람들이 제나라 공실과 대부들을 상대로 군사·외교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력자의 문하에 있는 공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공자는 박학다식한 신진학자였으므로 유수한 가문의 자제, 유세객들과 교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중에는 제나라 최고 실력자 가문인 진씨가의 젊은 후계자로서 공자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진항(陳恒)도 있지 않았을까? 진항은 훗날 전상(田常) 또는 전성자(田成子)로 불린 제나라 최고 실권자로서, 그가 제간공을 시해하자 노년의 공자가 노애공에게 토벌을 주청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진항은 약간 선배뻘에 불과한 공자의 해박함과 인품에 반해 공자를 존중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진씨가의 이해를 수호해야 할 후계자였다. 진씨가는 노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공실보다는 같은 경대부계급의 실권자인 계씨와 이해가 더 가까웠다.

소공의 망명정부는 진씨가 같은 제나라 귀족들에게 노소공의 복위와 계씨 토벌을 호소했지만 이들은 겉으로만 호응할 뿐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결국 제나라 귀족사회의 이중적 태도는 경공이 노골적으로 소공을 하대하는 연례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잠복해 있던 두 집단 간의 불신을 노골화하면서 관계가 파탄나고 말았다는 것이 나, 이생의 추정이다. 아마 ‘연례 사건’을 주도한 사람은 막부의 실권자 진기(진항의 아버지)와 조정의 재상 안영이었을 것이다.

당시 68살로 추정되는 안영은 서기전 516년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는데, 나는 그의 ‘퇴장’이 연례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안영은 어쩌면 연례 사건에 심한 의분을 느낀 한 노나라 지사의 ‘사고를 가장한’ 공격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 공격은 진씨가의 수장을 상대로도 계획됐겠지만, 엄중한 경호를 받는 진씨에게는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안영이 이 무렵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5. ‘치이자피’의 진실

이때와 관련하여 주목해볼 전승이 하나 더 있다. 묵가들에 의해 중원 전체로 퍼져나간 이 전승에 따르면,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진항의 집 앞에 자신이 제나라를 떠난다는 사실과 아울러 경공과 안영의 위선을 성토하는 ‘치이자피’(鴟夷子皮·‘치이’는 가죽으로 만든 부대로, 망명·추방을 의미한다)를 세우고 떠났다(<묵자> ‘비유’편)는 것이다.

치이자피의 전승은 사실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무엇인가 제나라에 대한 울분에 찬 비판을 쏟아낸 정황이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그 비판은 소공의 복위 지원 약속을 배반한 제나라에 대한 노나라 망명조정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공자가 제나라를 떠날 때 “밥을 지으려고 씻어놓은 쌀을 거두어 급히 제나라를 떠났다”(<맹자> ‘만장’ 하편)고 한 것도 어쩌면 공자가 망명조정 편에서 소공의 귀국운동에 참여하다가 이것이 발각되자 계씨 쪽 사람들을 피해 제나라를 떠난 사실의 편린은 아닐까? 사마천의 ‘공자세가’에서는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 하였고 공자도 이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제나라 대부들은 계씨 쪽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전문들이 모두 이때의 일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정황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모든 전언들은 이 무렵 공자를 비롯한 노나라 망명조정 관련 인사들이 서둘러 제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모종의 사태’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6. 진나라로 간 공자

소공 일행은 경공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고 진나라로 간 것이 서기전 514년, 공자가 제나라 임치에 온 지 3년째로 접어드는 때였다. 소공이 진나라로 가자 많은 망명인사들도 ‘서둘러’ 제나라를 떠났다. 소공이 진나라로 오자 진경공은 ‘불청객’ 소공이 진나라 도성에서 얼쩡대며 골치 아픈 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 싫은 나머지 소공을 간후에 머물도록 했다. 간후는 당시 세력 가문인 위씨의 영지로서, 조정의 실력자인 위서(위헌자)가 임금의 곤란한 처지를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제공했던 것 같다.

위헌자는 한선자에 이어 진나라 집정대신의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공명정대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집권한 뒤 사사로운 관계보다 인품과 능력 중심으로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더욱 찬사를 받았다. 이런 위헌자에 대해 “인재를 씀에 가까이로는 친속을 버리지 않고, 멀리로는 쓸 만한 사람을 버리지 않았으니 도의에 맞다고 할 만하다”는 공자의 평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듬해 진나라가 형정을 주조한 사실을 공자가 비판한 말과 함께 나란히 사적에 남겨졌다. 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사적이 드문 당시 사정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나는 이 기록이 사적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공자가 당시 현장에서 직접 한 말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사적은 공자가 이 시기에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외국으로 간 결정적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7. 객사한 소공

진나라로 간 소공은 간후에 머물다가 서기전 513년부터는 운읍과 간후를 오갔다. 진나라와 제나라 어느 공실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던 것이다. 소공이 간후와 운읍을 오락가락하자 운읍의 백성들은 마음이 지친 나머지 소공에게 반기를 들었고 남은 신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간후에서도 식량이 부족해 시종들이 굶주리는가 하면, 소공이 엉뚱한 이유로 태자 공위를 폐하자 신하들이 더욱 동요했다. 진나라는 계평자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미 고립무원 상태나 다름없는 소공을 강제 귀국시키려 했으나 망명조정의 강경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소공은 주변국들은 물론 신하들 사이에서마저 신망을 잃고는 간후 땅에서 죽고 말았다. 소공이 죽자 진경공이 사관에게 물었다.

“계씨는 임금을 나라 밖으로 떠돌게 하였는데도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제후들이 도우며 임금이 외국에서 죽었는데도 계씨에게 죄를 묻는 이가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노군은 안일 방종하고 계씨는 대대로 근면을 수행하였으니 백성들은 임금을 잊었습니다. 임금이 비록 외국에서 죽었으나 누가 그 임금을 가엾게 여기겠습니까? 사직에 군주가 영구히 고정된 적이 없었고 군신 사이에 그 지위가 영구히 고정된 적이 없었던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삼후(순·우·상 3대의 임금)의 자손이 지금은 서민이 된 것을 군주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좌전> 노소공 32년)

8. 7년 만의 귀국

서기전 509년 7월 소공의 장례가 노나라 공실 묘지가 있는 감읍에서 거행됐다. 소공의 무덤은 아버지 양공을 비롯해 역대 임금들의 무덤이 있는 북쪽에 가지 못하고 남쪽에 자리잡았다. 이는 소공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계평자의 증오심 때문이었다. 계평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묘역에 도랑을 파서 소공의 무덤을 아예 격리시키려고도 했다. 아무튼 군중 속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일행이 있었으니 7년 전 곡부를 떠났던 공자와 자로를 비롯한 문도들이었다. 공자가 소공의 상여가 묘도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정명(正名)의 길… 요원하구나….”

이로부터 꼭 10년 뒤 공자는 노정공의 조정에 참여하여 사구(법무장관)가 되자 공실 묘역부터 정비했다. 소공의 묘 밖으로 도랑을 파서 소공의 묘가 역대 임금들의 묘역 안에 있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노소공의 장례를 계기로 공자는 7년 만에 완전 귀국하여 다시 교사의 길을 걸었다. 공자는 망명 기간에 제나라를 비롯해 진나라와 주나라, 송나라, 위나라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았다. 약소국의 비애와 국제정치의 냉혹함도 목격했다. 특히 제나라에 머물 때 공자는 제나라의 풍부한 물산과 발달된 산업에 감탄하는 한편, 그 이면에 도사린 현세주의와 물질주의의 타락을 직시할 수 있었다.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면서 문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질과 실리를 중시하는 제나라 기풍을 한번 혁신하면, 인의예지를 중요시하는 노나라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또 노나라가 자신의 기풍을 한번 더 혁신하면, 이상적인 도덕사회를 이룰 수 있다.”(子曰 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 -‘옹야’편 22장)

제나라의 물질주의와 노나라의 정신주의가 변증법적으로 지양, 통합된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는 이 깨달음은 공자가 젊은 시절 7년을 투자해 얻은 소중한 배움을 한마디로 압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공자는 외국에서의 출세보다 귀국하여 제자를 양성하는 길이 자신의 사명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곡부에 돌아온 43살의 공자는 양호의 집요한 회유를 뿌리치고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 출사를 결심하게 될 때까지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위대한 교육철학을 열정적으로 실천했다. 이리하여 공문(孔門)은 곡부 제일의 사학으로 성장했고, 박학군자로서 공자의 명성은 노나라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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