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작별하는 법 [2014.07 제21호]
[나들 인문 사회학]
1. 세월호와 ‘나’
세월호가 침몰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구조작업은 10여 명의 실종자를 남긴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조만간 구조작업이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구조가 한없이 지연되면서, 현장을 주시하던 눈길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미 유병언의 행방과 문창극의 행보가 침몰 현장 소식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 장맛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대한민국의 시간을 정지시켰던 세월호도 흐르는 세월에 흘러가버릴 일만 남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던 광장은 어느덧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월드컵의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이 열기가 식을 때쯤, 우리는 텅 빈 광장에서 “사랑은 세월을 잊게 하고, 세월은 사랑을 잊게 한다”는 바이런의 탄식을 이명(耳鳴)처럼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태가 그렇게 흘러가면, 한때 죽어가던 어린 영혼들의 고통에 절망하고 분노하던 ‘나’는 그 마음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가책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리라. 그런 상처를 모든 ‘나’가 폐쇄적으로 경험한다면 모든 ‘나’에게 세상은 가장 진지한 애도의 순간도 집단적으로 연출되는 인형극 무대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그런 공간은 깊은 불신이 지배하는 장소로 어떤 종류의 소통과 연대도 불가능한 장소, 집단적 냉소만이 흐르는 장소가 되기 쉽다. 그래서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애도하고, 살아남은 자를 위무하는 방법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이런 사유를 통해, 사고 희생자의 절규와 대면하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한 각성의 고통스러운 체험- 저 상황을 두고도 ‘나’는 가해자를 타인으로 지목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따뜻한 거짓말밖에 없구나, 이 무능을 대면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세월에 편승하려고 ‘나’는 그리도 애절하게 고통과 슬픔을 즉물적으로 탐닉할 수밖에 없었구나- 을 넘어서야 한다. 진정으로 ‘나’를 치유하고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세월호 사건은 재해석되고,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지겹게 되풀이되는 재난에 대해 ‘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나들’로 연대할 수 있는지 길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비극’과 ‘비애극’의 구별을 통해 개인적 삶이 역사와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 발터 베냐민의 통찰을 빌려 ‘나’가 어떻게 세월호와 작별해야 하는지를 말하려 한다.
2. 비(애)극으로서의 역사
비극은 고대 그리스의 극 형식으로 주인공이 운명 혹은 신과 싸우다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니체는 비극의 주인공에서 아폴론적 이성에 대응하는 디오니스적 도취를 보았지만, 베냐민은 개인의 삶이 역사와 접속하는 방법을 읽어냈다. 그가 구상하는 역사철학의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보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다투다 둘 다 죽지만, 폴뤼네이케스는 이 과정에서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한다. 화가 난 테바이의 왕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허락하지 않지만, 안티고네는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고집하다 동굴 무덤 안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그러자 그녀의 약혼자였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분노하여 자살하고, 아들의 자살에 낙담한 크레온의 아내 에우뤼디케마저 자살한다. 졸지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크레온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탄식한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인륜에 따라 오빠의 장례를 고집하지만 왕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취하게 된 항명의 의사표현이다. 말하자면 그는 죽음을 통한 침묵으로 왕의 명령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그의 의사는 약혼자 하이몬의 죽음과 에우뤼디케의 죽음을 통해 크레온에게 전달되고, 결국 왕을 변화시킨다. 베냐민은 이 신화를 역사적 현실의 알레고리로 읽어내며 비극적 영웅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체의 형상으로 제시한다. 그는 비극적 영웅의 역사철학적 의미를 “그 자신을 희생물로서 옛 법규들에 내맡기지만 그의 영혼은 아득히 먼 어떤 공동체의 낱말에서 구원된다”는 말로 요약한다. 즉 비극적 영웅(안티고네)은 죽음을 통한 침묵으로 현실의 한계(오빠의 장례를 금지하는 반인륜적 왕명)를 고발하는데, 이 희생을 밑거름으로 현재의 체제를 넘어서는 미래의 공동체(탄식하는 크레온)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영웅의 희생과 미래의 공동체를 연결하는 역사적 과정이 요구되는데, 그게 바로 ‘애도’이다. 그래서 진정한 애도는 영웅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현이자, 영웅이 죽음으로 말하려 한 분노의 표현이 된다. 안티고네의 죽음을 항명의 의사로 읽고 죽음으로써 이를 크레온에게 전달한 하이몬과 에우뤼디케의 행동처럼.
이처럼 비극의 주인공은 언제나 애도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영웅의 죽음에 공감하는 조문객이 되어 그를 애도함으로써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냐민이 고대 비극의 근대적 판본으로 구별한 ‘비애극’에서 죽음은 전혀 애도되지 않는다. ‘비애극’의 죽음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어떤 희생도 허락되지 않는, 생물학적 목숨의 정지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애극’의 죽음에 대해 관객은 즉물적 비애의 감상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비애극’은 근원적으로 애도가 불가능하다. 비애극은 왜 애도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을까?
‘비애극’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독일의 연극 형식이다. 이 시기 독일은 30년전쟁으로 기독교적 구원의 믿음이 산산조각 나고, 의미 없는 죽음만이 지속된, “은총 없는 죄악의 상태”였다. 비애극은 당시 독일의 참담한 역사적 현실을 소재로 했다. 전형적인 주인공은 야누스적 속성을 가진 불안정한 군주였다. 이들은 절대적 권력을 누리지만 위기 상황이 닥치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이는 폭군들이다. 그나마 나은 인물 유형은 베냐민이 ‘순교자극의 주인공’으로 분류한 인물로, 평소에 폭군으로 군림했지만, 죽음의 순간에 순교자를 연출하는 인물이다. 이 순교자 캐릭터는 비극적 영웅의 ‘짝퉁’인데, 그 기원은 소크라테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냐민은 “이웃에게 빌린 닭 한 마리를 대신 갚아달라”는 말과 함께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 순간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자로서, 만일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자들 가운데 가장 도덕적이고 최선의 존재로서 죽음을 직시한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을 낯선 어떤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낯선 것 너머에서, 불멸성 속에서 자신이 재발견되리라고 기대한다.”
베냐민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어차피 죽을 목숨을 최선의 형태로 포장해서 불멸의 형상으로 남기려는 나르시시즘적 도취 속에서 죽음을 수용한다. 그의 죽음에는 도래할 미래의 공동체를 위해 전하는 언어가 없다. 즉, 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정치적 분노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옛 법규를 준수하자는 ‘악법도 법이다’로 낙찰된 것일 수도 있다. 비극적 영웅이라면 미래의 공동체에 ‘이 악법과 싸우라’는 메시지를 남겼을 터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대한 관객의 애도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자연생명의 정지에 대해 동정하고 슬퍼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미래의 공동체에 전하는 언어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베냐민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순교자극을 “한 인간의 오만함”으로 규정하고, 이와 구별되는 영웅적 반항의 핵심을 “응축된 형태(죽음으로 이뤄내는 침묵)로 미지의 말(그 죽음이 도래할 공동체에서 해석되는 의미)을 담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베냐민에게 소크라테스는 미래의 공동체를 단지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성자로 자신을 연출하며 죽어가지만, 비극적 영웅은 미래의 공동체와 소통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일체의 영웅적 형상을 거부하고 죽어간다. 소크라테스는 은밀하게 수다스럽게 죽어가고, 비극적 영웅은 공개적으로 과묵하게 죽어간다.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미래의 공동체 위에 군림하고 추앙받기를 욕망하며 죽어가지만, 비극적 영웅은 미래의 공동체 속에 녹아들어 사라지길 기원하며 죽어간다. 간단히 말해 두 인물의 차이는 이런 게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자의식이 욕망으로 귀결된다면, 비극적 영웅의 자의식은 역사의식으로 승화된다는 것. 그래서 베냐민은 “충분히 발전된 공동체 의식이라면 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더 이상 그 어떤 숨겨진 불가사의한 내포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베냐민이 전하려는 역사철학적 메시지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은 요구로 압축할 수 있들 듯싶다.
‘비애극’ 속에는 애도할 영웅이 없다. 동정받을 비루한 인간과 경계해야 할 가짜 영웅, 순교자만이 있다. 그러니 ‘비애극’으로 상연되는 역사적 현실을 신화적 비극으로 각색해보라는 것, 그러려면 동정심에 매몰되거나 오만한 인간의 현란한 희생의 제스처에 속지 말고 침묵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비극적 영웅의 희생을 찾아내보라는 것. 그 영웅이 전하는 언어를 해독해보라는 것. 그래야 도래할 미래의 공동체를 위한 진정한 애도가 시작될 테니까.
그러면 지금 우리가 세월호 침몰 사건을 재현하고 애도하는 방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폭군처럼 난폭하고 기만적인 권력 작동의 톱니바퀴에 치인 무구한 희생자에 대한 감상적 동정으로 애도를 대신하는 ‘비애극’으로 단지 소비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숱한 죽음 속에서 미래의 공동체를 위한 언어를 찾기 위해 비극적 영웅들의 신화로 각색되고 있을까?
3. 재현의 정치와 애도의 윤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세월호 침몰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마 그 결과는 지금 언론이 어떻게 재현하고, 국가조직이 어떻게 수습하고, 시민들이 어떻게 애도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진행 경과를 보면, 세월호 사건은 선원들의 무책임, 해운사의 탐욕, 관련 공무원들의 무능과 부패가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정리되고 있다. 언론의 최대 관심은 도피 중인 유병언의 행방과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다. 시민들의 태도도 많이 변했다. 사건 초기 구조에 대한 간절한 기원과 희생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 선원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는 도피 중인 유병언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상황이 이대로 흘러가면 세월호 관련자들의 처벌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세월호 사건은 종결될 것이다. 그리되면 희생자들은 단지 부도덕한 인간들에 의해 우연히 희생된, 동정받지만 애도되지 않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부도덕한 인간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 더 교활한 인간들이 자리를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애극’이 재상연되고, 애도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관객은 다시 슬퍼하고 분노하고 잊어버리는 애도의 코스프레를 되풀이할 것이다.
이 무의미한 동어반복을 그만두려면 ‘세월호’를 ‘비애극’이 아닌 ‘비극’으로 각색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으로 이해돼야 한다. 세월호의 침몰이 예정된 것이었고, 그 자리에 누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건 필연이다. 그 자리에 다른 학생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슬퍼하지 않을 터인가. 마찬가지로 세월호의 선원이 있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헌신적으로 자신을 희생했던 몇몇 승무원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으로 선원의 자리를 다 채울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요행을 바라는 일이 아니겠는가.
희생자의 죽음을 비극적인 것으로 인식하면, 애도는 자연생명의 소멸보다 희생자가 미래의 공동체를 향해 남긴 언어에 주목하게 된다. 비극의 주인공의 언어는 운명이라는 적과 싸우려 한 저항의 의지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운명을 의식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것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음을 사후적으로 고지하고 있다. 그들은 우연히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이해하면, 진정한 애도는 그들의 언어를 재현하고 공동체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나서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을 인식한다면,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 다시는 나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달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운명, 즉 세월호가 침몰될 수밖에 없었던 부도덕한 자본과 권력의 작동 방식에 저항하지 않을까? 과연 지금까지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가 그렇게 나아갔는가? 다만 희생자를 동정하고 선원들에게 분노를 집중하면서 정작 적대해야 할 그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희생자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해하면, 애도의 방향은 주인공이 적으로 삼은 운명을 ‘나’의 적으로 삼아주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진정한 애도를 위해 넘어서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언론의 도덕주의 프레임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은 두 가지 이유로 사회구조적 현상을 사건화해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이유는 사안을 구조적 문제로 접근하면 재현 자체가 어렵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도 어려워 독자들의 흥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드러진 행위자들의 드라마로 사안을 극화하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사회현상을 행위자들의 도덕적 문제로 구성하면 책임 소재가 행위자 개인에게 전가되면서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은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준해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 다수의 호응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반하는 관점을 취하는 데 거부감이 있다. 이런 도덕주의 프레임을 적용하면 물리적으로 사건과 가까이 있는 행위자에게 더 많은 책임이 지워진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 대체로 선원(및 해경)→해운사(및 관련 공무원)→유병언(및 관리 책임을 맡은 고위 공무원)→정부의 순으로 책임의 하중이 실린다. 이렇게 되면 말단 행위자의 무능이 악덕으로 과장되고 이 상황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면서 배후에서 이득을 취하는 교활한 악덕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도덕주의 프레임은 결과적으로 구조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자의 악덕을 은폐하는 효율적인 정치 담론이 된다. 일반적으로 기득권 강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의 정치학은 윤리학의 외양을 하고 등장한다. 그 결과 윤리학이 사실은 정치학임을 지적하는 진보의 윤리학은 정치학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안티고네의 신화는 이런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테바이의 왕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오빠가 자신을 공격한 정치적 행동에 화가 나 안티고네가 장례식을 치르는 윤리적 행위를 금지한다.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윤리적 금지의 형태로, 즉 정치학을 윤리학으로 표상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안티고네의 대응은 정반대로 현상된다. 그는 순수하게 인륜에 따라 오빠의 장례식을 고집하지만, 바로 크레온의 금지 때문에, 그의 행동은 크레온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윤리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크레온의 정치학 때문에 안티고네의 윤리학은 정치학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좌파는 윤리적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주의 프레임은 우파의 정치학이 윤리학의 모습으로 출현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런데 도덕주의 프레임은 비단 세월호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건에서 지배적인 해석 틀로 등장한다. 이는 그만큼 도덕주의 프레임에 대중이 쉽게 호응한다는 얘기다. 도덕주의 프레임에 대중이 쉽사리 감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도덕 감정이 살아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행위자들의 악덕 너머를 모르고, 알고 싶어도 언론 보도만 보면 알 수 없어서, 그들로서는 도덕주의 프레임을 현실 자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대중이 행위자들의 악덕을 조장하는 구조적 맥락과 전체적 상황을 조정하는 숨은 기득권 수혜자들의 존재를 감지하고도 외면한다면, 그건 정치적 순응과 개인적 욕망의 결과일 터이다. 즉 세월호 사건은 사회구조적 문제이지만 나는 연루돼 있지 않고,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으니, 원래 기득권 수혜자를 욕망하던 내 갈 길을 가려면 행위자들의 책임으로 종결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도덕주의 프레임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수습 과정에서 노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 안도감을 준다. 이런 ‘비애극’의 관객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요란한 동정의 제스처밖에 없다. 얻을 수 있는 교훈도 ‘나는 어떻게든 저런 배에 타지 않겠다’는 보신주의와 ‘한국 사회에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생존 의지 말고 더 있겠는가.
지금 진행되는 세월호 사건의 수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애극’을 보고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극’을 관람하고 있을까?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되는 걸 보면 다수가 세월호를 비극으로 각색 중인 것으로 읽힌다. 교육 현장에서 경쟁과 효율이라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저지하려 한 진보 교육감을 지지한다는 것은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구조적 맥락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단체장 선거의 결과만 보면 세월호 관객의 의중은 모호하다. 야당의 신승은 평소 지방선거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야당을 지지하는 것이 세월호 침몰을 잉태한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세월호 침몰을 선원과 해운사의 문제로만 인식하는 ‘비애극’의 관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교육감 선거의 결과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에서 시민들이 받은 충격 정도를 감안하면 어떤 형태든 동일한 사고가 재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시민적 책임의 확산은 분명한 사실로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교육감 선거 결과와 단체장 선거 결과 사이의 간극은 이렇게 설명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세월호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사회 전체가 변화해야 한다고 인식하지만, 아직 그 행동을 내가 해야 한다는 실천 의지는 부족한 상태라는 것. 그래서 아이들의 세계는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갈망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를 내가 바꾸는 일에는 아직 망설임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은 나쁜 아버지가 아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아이들은 언젠가 나쁜 어른들의 세계로 나와야 할 테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방식은 절반의 진정성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전한 애도가 되려면 세월호를 침몰시킨 어른들의 세계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애도의 행위는 두 개의 실천을 실질적인 내용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세월호를 침몰시킨 나쁜 어른들의 세계에 내가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부터 그 세계와 결별하는 윤리적 결단이 필요하다. 세월호 수사 과정에서 파면 팔수록 줄줄이 드러나는 편법과 협잡의 패거리 문화가 어디 해양경찰과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 그리고 유병언뿐이겠는가. 대한민국의 어른 세계가 부패의 악취로 가득하다는 것은 어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감히 주장할 직업집단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면 개인적인 윤리적 결단을 넘어 정치적 참여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투표라는 양자택일형 객관식 문제를 통해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시민정치의 아이디어를 통해 전방위적으로 사회에 정치적 의사표현을 논술로 서술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월호의 비극적 주인공들이 도래할 미래의 공동체를 위해 죽음으로 발성한 마지막 유언에 생명을 부여하는 길이다. 그것만이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형식이 될 수 있으며, 이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우리 사회는 떳떳하게 세월호의 아이들과 작별할 수 있다.
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학 갈 때까지 학교 공부보다는 잡지 읽기에 더 열심이었다. <중앙일보> 기자로 한 10년쯤 일했는데, 대부분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인터뷰집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 칼럼집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역서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무한 미디어>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