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03 11:14 수정 : 2014.07.03 11:15

1. 변설가의 입냄새

공자가 정치에 대하여 묻는 경공에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게 정치”라고 말하자 경공이 이렇게 답했다.

“좋은 말씀이오! 정녕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서 먹을 수 있겠소!” -<사기> ‘공자세가’

나는 앞에서 ‘정명’(正名)에 대한 이 대화는 실재한 것이 아니라, 공자와 경공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한 말이 후대의 어느 시기에 하나로 합쳐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경공의 말은 제나라 실권자 진씨와 관련해 재상 안영과 나눈 대화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당시의 귀족문화에 비춰볼 때, 무명의 젊은 외국 사인(士人)이 ‘동방의 패자’를 자임하는 군주를 직접 만나 정치철학을 강론했다는 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 대화를 <논어>에서 가져와 <공자세가>에 삽입한 사마천 자신도 이 설정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공자와 경공이 이미 6년 전에 만났다는 사실을 이 대화 앞에 배치해놓았다. 이는 공자, 경공, 안영 세 사람이 서로 안면을 튼 사이이기 때문에 매개자 없이도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복선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노소공 20년 공자가 서른 살 때(정명론 대화가 있기 6년 전인 서기전 522년) 제나라 경공과 안영이 노나라에 사냥을 왔다가 공자를 만나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공자세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작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와 그 주석서인 <춘추좌씨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웃한 강대국의 임금과 수상이 함께 노나라를 방문했다면 반드시 사서에 기록할 큰 사건인데도 말이다. 더욱이 공자는 경공에게 한 수 가르치면서 ‘진(秦)나라 목공이 숨은 현자인 백리해를 기용하여 패자가 되었다’는 것을 사례로 들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전국시대 종횡가들의 관점이다. 만약 경공을 가르칠 일이 있었다면 공자는 마땅히 자신이 사표로 삼고 있는 주나라 주공을 거론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멀리 떨어진 진나라에서 벌어진 불확실한 이야기(진목공이 염소가죽 5장을 주고 백리해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를 근거로 공자가 타국의 임금에게 패권주의를 찬양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전국시대 무렵 유가들이 공자를 우상화하기 위해 만들어 항간에 유포한 ‘설화’를 사마천이 공자와 경공의 만남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끌어다 쓴 것으로 봐야 한다.

혹자는 노나라에서 예론 전문가로 이미 유명해진 공자가 경공과 면담하지 못하란 법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200여 년 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어찌 군주가 나라를 다스림에 이익을 먼저 말하느냐”고 힐난한 장면도 상기시킬지 모르겠다. 하지만 맹자는 양혜왕을 만날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을 몰고 다니던 당대의 명사였다. 시대 상황이 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맹자는 무명의 망명객 공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나, 이생은 이 시기 공자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서 전국시대 변설가들의 구취를 강하게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입냄새의 주인은 유가의 역사는 물론 경공 치세 이후 몰락으로 치달은 제나라 공실의 패망사에 대해서도 잘 아는 자였을 것이다.

2. 강제(姜齊)와 전제(田齊)

강태공(姜太公)이 세운 제나라는 전국시대인 서기전 379년 권신 전화(田和)가 강공(康公)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후가 됨으로써 망하고 말았다. 진씨의 후예인 전화는 제나라 국호를 계속 유지했는데, 전화 이후의 제나라를 이전 강성(姜姓)의 제나라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 부르게 되었다. 전화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인 전상(田常), 즉 진항의 증손자이다. 제환공 때 진나라에서 제나라로 망명 온 진완(陳完)의 후예인 진씨는 제나라에 와서 성을 전씨로 바꾸었다. 진씨가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진무우가 영공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무우의 아들 진기(陳乞)와 손자 진항(陳恒. 진상(陳常)이라고도 불리며, 훗날 제나라 최고 실력자가 되는 전성자(田成子) 전상을 말한다) 대에 이르러 전씨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이런 진씨 가문이 제나라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시기가 바로 경공 때였다. 경공은 무려 58년간 재위하면서 진씨 가문이 세력과 신망 양면에서 모두 공실을 추월하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경공이 후대의 식자들로부터 암군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안녕과 부를 지키기 위해 백성을 보살피기는커녕 진씨가 야금야금 군주의 지위를 파먹어 들어오는 것마저 눈 뜬 장님처럼 방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의 역사적 흐름을 되짚어보면 공자를 존숭하고 제나라 망국사를 비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억지로라도 공자의 담대한 정명론과 경공의 먹거리 타령을 하나의 장면 속에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 ‘역사 조작’이 가능했던 데는 아마 재상 안영의 존재가 한몫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변설가들, 특히 노나라 유가 출신의 유세가들은 공자를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닌 성인’으로 미화하면서 동시에 경공과 안영이 일찍이 공자의 진면목을 몰라보고 기용하지 않았기에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이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다음의 두 대화를 제기한다.

3. 망국의 예언

두 대화는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공히 ‘제나라 망국’과 ‘진씨의 융성’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대화.

서기전 539년, 경공 9년 제나라 조정은 북방의 패자 진나라의 압력을 정략결혼으로 누그러뜨리기 위해 청혼사로 안영을 진나라에 보냈다. 이때 안영의 나이 44살(추정), 지위는 경이었다. 안영은 당시 진나라 정계의 원로이자 현인으로 유명했던 숙향(叔向)이 베푼 연회에 참석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숙향 “우리 진나라는 공실이 허약하고 귀족들이 강성해 얼마 안 가 나라가 여러 개로 쪼개질 것 같소이다. 제나라는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소?”

안영 “우리 제나라는 진씨의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아 인심이 진씨에게 돌아갔습니다. 진씨 집에서는 시중에서 쓰는 되보다 큰 되를 사용하는데, 사정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줄 때는 자기 되로 주고, 돌려받을 때는 시중의 되로 받습니다. 목재를 팔면서는 운반비를 받지 않고, 소금과 해산물을 산지 가격으로 거래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임금은 백성들이 애써 모은 재물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걷어가니, 임금의 재물은 창고에 쌓인 채 썩고 벌레가 생기는데도 가난한 노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립니다. 나라의 모든 시장에서 신발 값보다 목발 값이 비쌉니다. 형벌이 가혹해 사소한 잘못에도 발이 잘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고통당한 인민들을 혹자(或者·진씨를 가리킴)가 보살펴주니, 백성들은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여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이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러니 어찌 (제나라 공실이) 망조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좌전> 노소공 3년)

두 번째 대화.

서기전 516년, 경공 32년. 제나라 수도 임치에 혜성이 나타나자 이를 불길하게 여긴 경공이 침전에서 궁전을 내려다보며 안영에게 공실의 장래를 걱정한다.

“과인도 언젠가는 죽을 터, 이 아름다운 궁전은 누구 차지가 될까요?”

(美哉 室 其誰有此乎)

“전하, 무슨 그런 말씀을.”(敢問 何謂也)

“결국 덕을 가진 사람이 이 방의 주인이 되겠지요?”(吾以爲在德)

안영이 정색하고 대답한다.

“만약 전하께서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신다면 아마도 이 방은 진씨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如君之言 其陳氏乎) 진씨가 비록 임금이 될 덕은 없으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공세를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쓰고, 곡식을 빌려줄 때는 큰 되를 썼습니다. 임금이 세금을 많이 거두는 동안 진씨는 후하게 은혜를 베푸니 민심이 그리로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임금님의 후손이 덕치를 게을리하고 진씨가 망하지 않는다면 제나라는 결국 진씨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後世若少惰 陳氏而不亡 則國其國也已)

경공이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말씀이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善哉 是可若可)

“오직 예(禮)만이 막을 수 있습니다.(唯禮可以已之) 예를 행하면 대부의 시혜가 국인에게 미치지 않고, 백성과 농부들이 논밭을 떠나지 않고, 공인과 상인이 직업을 바꾸지 않으며, 선비가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고 관원은 태만하지 않으며, 대부가 공실을 넘보지 않습니다.”

경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좋은 말씀이오! 내가 비록 예를 행하지는 못하나, 예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비로소 알겠소이다.”(善哉 我不能矣 吾今而後 知禮之可以爲國也)

안영이 또 말한다.

“예가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이 된 지 오래이니 천지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임금은 명령하고 신하는 공경하며(君令臣共), 아비는 자애하고 자식은 효도하며(父慈子孝), 형은 사랑하고 동생은 공경하며(兄愛弟敬), 남편은 화목하고 아내는 유순하며(夫和妻柔), 시어미는 자애하고 며느리는 순종하는 것(姑慈婦聽)이 예이니, 임금은 명령을 내리되 도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君令而不違), 신하는 공경하되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며(臣共而不貳), 아비는 자애하되 가르치고(父慈而敎), 자식은 효도하되 부모가 틀린 것은 마음이 아프지 않게 바로잡도록 권하며(子孝而箴), 형은 사랑하되 우호하고(兄愛而友), 동생은 공경하되 순종하며(弟敬而順), 남편은 화목하되 도의로써 아내를 인도하고(夫和而義), 아내는 유순하되 정도로써 남편을 섬기며(妻柔而正), 시어미는 자애하여 며느리를 따르고(姑慈而從), 며느리는 순종하여 시어미에게 온순한 것(婦聽而婉)이 예 중에서도 더욱 좋은 예입니다(禮之善物也).”

“좋은 말씀이오! 과인이 비로소 예를 숭상한다는 것이 무얼 말하는지 들었소이다.”

(善哉 寡人今而後聞此禮之上也)

안영이 읍하며 말했다.

“예는 선왕이 천지에서 받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예를 숭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先王所稟於天地 以爲其民也 是以先王上之·<좌전> 노소공 26년)

4. 궁전의 진짜 임자

망명 가문 진씨는 귀족 간의 분쟁에는 중립을 지키면서 일반 서민의 환심을 사는 일에 주력했다. 인심을 얻어놓으면 ‘굴러온 돌’이라고 해서 박해받는 일은 없으리란 심모원려였다. 그 대표적인 일이 바로 유명한 ‘됫박 선심’이었다. 곡식을 꾸어줄 때는 자기 집에서 쓰는 큰 되를 사용하고, 돌려받을 때는 시중에서 통용하는 되를 사용했다. 곡식 10말을 빌리면 실제로는 11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자를 내기는커녕 곡식을 꾸는 순간 1할의 이익이 생기는 격이니, 진씨의 집 앞이 문전성시를 이룰 것은 불문가지였다. 반면에 지배층은 권력다툼을 거듭하는 한편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임금은 그런 세도가의 횡포를 외면한 채 그 자신도 축재에만 골몰해 백성들이 어디서 얼어죽고 굶어죽는지 관심조차 없다. 형벌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발을 잘리는 벌을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시장통의 목발 값이 천정부지로 뛸 정도가 되었다. 안영은 숙향에게 이런 실상을 한탄하면서 제나라 공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진씨 쪽으로 정권이 넘어갈 것이라고 탄식 아닌 ‘예언’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23년 뒤, 제나라 수상이 된 안영은 경공에게 정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군주의 도리에 대해 간곡하게 말한다. ‘진짜 걱정은 임금 바로 당신이다. 진씨가 뇌물로 인심을 사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군주로서 덕을 쌓고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경공에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과 예는 군주의 인(仁)인데, 진씨 눈치를 살피며 축재에 골몰해온 경공에게 인의 실천은 애당초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래서 경공은 자기는 못하는 일(我不能矣)이라고 선을 긋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경공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는 안영이 에둘러 진심을 말한다. ‘당신이 못한다면 후손이라도 나태해지지 않도록 잘 단속하시오. 그것도 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진씨를 망하게 하시오. 그도 저도 못하면 결국 당신네 강씨들은 이 궁전을 잃게 될 것이오.’

<좌전>이라는 역사책에는 이와 같이 나라나 인물의 흥망에 관한 예언이 자주 등장한다.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소’ 하는 식의 기술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기보다 인과응보를 강조하기 위한 서술상의 장치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안영이 심혈을 기울여 말한 예치론(禮治論)을 8자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말한 ‘군군신신부부자자’가 될 것이다. 공자의 이런 가르침을 경공과 그 후손이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놀라운 유사성이다. 또한 진씨의 ‘됫박 선심’을 안영이 경계하라고 하자 경공이 무슨 대책이 없겠느냐고 되묻는 대화는 “곡식이 있어도 어찌 내가 얻어서 먹을 수 있겠느냐”고 큰소리치는 경공의 말과 대조를 이룬다. ‘나는 정통성 있는 군주로 30년 넘게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다. 됫박질 같은 위선으로 인심을 속이는 자가 있지만, 나는 군주로서 그따위 속 보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 군주가 건재한데 누가 그런 저울질에 속아넘어가겠는가. 나라면 그따위 구차한 곡식은 얻어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제나라 정치의 실상을 안다면 이는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진씨를 경계하라는 간언을 들은 경공이 진씨와 맞서야 하는 두려움을 뒤로 감춘 채 허세를 떨며 간언의 진의를 애써 무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5. ‘서기전 516년’의 비밀

경공이 혜성 출현에 약한 모습을 보이며 제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대화는 <좌전> 노소공 26년 말미에 나온다. 경공의 나이 50대 후반, 안영의 나이 60대 중·후반(67살로 추정) 때의 일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해는 공자가 제나라에 망명을 온 해(혹은 이듬해)이다. 공자의 제나라 망명 시기를 이때로 삼는 설을 인정한다면 공자가 경공에게 정명론을 설파했다고 하는 해 역시 이 해가 될 것이다. 또한 이 해는 안영이라는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는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안영은 기록상 이 대화를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안영이 이해 또는 다음해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사기>에는 서기전 500년 안영이 사망했다는 짤막한 기록이 나온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안영은 서기전 516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사망하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재기 불능의 은퇴(중풍이나 치매 같은 질병에 걸렸는지 모른다) 상태에 있다가 16년 뒤에 죽은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래서 안영과 경공의 대화가 반드시 그해에 있었던 사건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즉, 다른 해에 있었던 일을 이해에 끌어와 삽입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역사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대화는 명재상 안영의 마지막 말이란 점에서 ‘현자의 유언’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자가 제나라에 와서 정명론을 설파했다고 하는 해는 서기전 516년이다. 안영이 정명론의 초본(草本) 같은 내용의 ‘유언’을 남기는 해가 굳이 공자가 경공에게 정명론을 설파했다고 하는 바로 그해인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일까?

6. 공자의 불신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논어>와 안영의 전기에 해당한 <안자춘추>, 그리고 춘추시대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인 <춘추좌씨전> 등을 토대로 서술됐다. 이 책들은 모두 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 최종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책들에는 수백 년의 시간 속에서 각 유파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경쟁적으로 유포한 위작위문(僞作僞文)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 시공을 달리한 전승의 불확실성에다 유가는 공자를 높이기 위해, 묵가는 공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사실을 비틀고 주관적인 윤색을 가한 결과물일 것이다. 특히 겸애를 주창하고 절용절검(節用節儉)을 강조한 묵가는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청빈검소한 현자로 유명한 안영을 내세워 허례허식을 일삼은 당대 유가를 야유했던 역사적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따라서 나, 이생은 결론적으로 공자와 경공의 만남, 곡식 운운한 경공의 말, 그리고 공자의 여타 제나라 시절과 관련한 일부 기록을 위문으로 보는 견해(최술, <수사고신록>)에 동의한다.

그러나 만년의 공자가 경공의 부음을 듣고 “제나라 경공이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1천 승을 소유하였지만 그가 죽는 날에 그의 덕을 칭송하는 백성이 없었다”(‘계씨’편 12장)고 차갑게 비평한 것, 진항이 제간공을 시해하자 공자가 노애공에게 진항의 토벌을 주청한 일(‘헌문’편 22장), 진위가 의심스럽지만 공자가 진항의 집 대문 앞에 진씨의 배덕을 비판하는 내용의 말뚝을 세우고 제나라를 떠났다는 설(<묵자> ‘비유’편) 등은 공자가 제나라 조야에 큰 불신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겠다. 제나라 정치의 한계는 노나라 군주권을 되찾으려는 망명정부 일각에게도 큰 불신과 환멸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공자가 자신을 해치려는 제나라 대부들을 피해 노나라로 돌아갔다는 사마천의 기록(<공자세가>), “공자가 밥을 지으려고 담근 쌀을 도로 건져서 급하게 제나라를 떠났다”는 맹자의 말(<맹자> ‘만장’하편) 등은 모두 공자를 비롯한 노나라 망명객들이 제나라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운 상황을 시사하는 것이리라.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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