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0:20 수정 : 2014.05.08 13:36

할리우드 영화 속 영웅들은 각성을 통해 밑바닥의 존재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재탄생한다. 인간을 넘어섰지만 인간과 섞일 수 없는 영웅들은 그 경계의 갈등 속에서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어벤져스〉의 두 주인공 토르(왼쪽)와 캡틴아메리카. 한겨레 자료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에서 힘으로>를 읽다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일상의 자잘한 규범에 해당하는 코드들의 코드, 즉 모든 코드를 초월한 코드인 ‘초코드’(Super Code)는 세상의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는 지상의 존재이자 우주의 가장 어둡고 차가운 밑바닥을 차지하는 지하의 존재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의 존재와 소통하는 영매는 대개 두려움과 받듦의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 따돌림과 멸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J.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등장하는 디아나 숲의 제사장이 그랬고, 조선의 무당이 그러했다. 박상륭이 예를 든 대장 늑대의 운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의 독서에 따르면, 늑대들의 우두머리는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순간 무리의 가장 말단으로 밀려나 어린 늑대들의 노리개가 될 뿐이라고 한다. 방금까지 지상의 존재였던 대장 늑대는 한순간 무리의 가장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천한 신분이 된다. 세상의 모든 질서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돈’은 세균이 득실거리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으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감히 드러내 밝힐 만한 목적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상과 지하는 좁은 통로로 연결된 이상한 모양, 마치 ‘클라인 병’(Klein Bottle) 같은 형태로 이어진 같은 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말이다.

할리우드가 내러티브의 고갈로 허덕이면서 나타난 경향들 가운데 하나는 미디어를 넘나들며 전혀 영화적이지 않던 소재와 이야기에 빨대를 꽂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랜 경험으로 갈고닦은 노하우는 어떠한 설정과 이미지라도 영화 속에 구겨넣을 수 있는 자신감의 밑천이 돼주었다. 그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의 한 축은 한없이 만화스럽다. 할리우드의 만화스러운 영화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를 떠올릴 것이다. <어벤져스> 같은 족집게 핵심정리가 없다면 그 전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블코믹스의 슈퍼 영웅들은 어쩌면 우리 세상에 편재한다고 할 만큼 흔한 이미지가 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블코믹스의 영웅 예닐곱쯤은 손꼽아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만화책이 아니라 영화만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마블코믹스의 캐릭터들은 사실 만화보다는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접근했다. 이를테면 1980년에 발매돼 <엑스맨> 시리즈의 기초를 세운 <엑스맨: 다크 피닉스 사가>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우리나라에 2012년에야 출판됐다. 토르, 울버린, 데어데블,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고스트라이더, 슈퍼맨, 헐크, 엑스맨 모두 영화가 먼저였고 만화는 나중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들 캐릭터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영화가 준 틀에 한정돼 풍부하게 전해지지 못한 면이 있다. 비록 코믹스의 풍요로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영화에도 미덕은 있다. 그리고 마블의 영웅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 그릇이 영화냐 만화냐에 관계없이 똑같이 울려 전해진다.

전사한 아버지, 결핵 병동 간호사로 감염돼 죽은 어머니, 천식에 깡마른 왜소한 체구로 징병 검사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는 스티브 로저스는 정의감에 불타는 애국청년이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그의 빛나는 가치를 나치와 히드라를 피해 망명한 독일 과학자 요한 슈미트가 발견한다. 캡틴아메리카의 기원이다. 캡틴은 양아치가 싫다. 그들과의 싸움이라면 한나절이고 온종일이고 자신이 있다. 오직 두들겨 맞을 뿐 상대에게 손가락 하나 걸쳐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남은 건 악이요 믿을 건 깡밖엔 없던 쭉정이가 전쟁 영웅이 된다. 중생(重生·거듭남)의 의식을 통해 밑바닥의 존재가 인간을 초월한 지상의 존재로 날아오른다. 배트맨이나 헐크, 슈퍼맨이나 고스트라이더의 탄생 혹은 정체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인간을 넘어섰기에 인간과 섞일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의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은 인간의 기억과 ‘넘어선’ 자로서 현실 사이의 갈등에서 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우리의 맨 밑바닥에서 기어나와 저 위로 상승한 그들은 ‘타자들’이다. 번을 짜서 돌고 있는 듯 때가 되면 찾아오는 마블의 히어로들은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긍정과 부정의 기운으로 대립한다.

일본 공포영화 <링>의 ‘사다코’는 마블코믹스의 ‘엑스맨’들과 마찬가지로 초능력을 가진 소녀였다. 엑스맨들이 돌연변이로 보통의 인간이 지니지 못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듯이 사다코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한 능력과 자웅동체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그 모습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우물에 던져 죽게 만든다. 억울하게 죽은 사다코의 영혼은 비디오테이프에 심어져 인간세계를 떠돌고, 자기의 죽음을 되갚기 위해 텔레비전 밖으로 기어나온다.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은 보는 관점과 주어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된다. 비록 완전히 똑같은 대상일지라도 그 ‘넘어섬’은 외줄 위에서 기력을 다한 광대처럼 왼쪽이나 오른쪽 어느 한 곳으로는 떨어지고 말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지금 그대로의 일상을 지켜 살기 위한 방법은 기력을 아껴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외줄 위에 남아 있는 일이다. 바람이 불고 땅이 흔들려 줄이 흔들리고 몸이 기울어도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어떻든 떨어지면 적어도 아프거나 잘못하면 사망이다.

<아이언맨 3> <더 울버린> <토르: 다크 월드>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캡틴아메리카가 <윈터 솔저>로 돌아왔다. 지나치게 미국적인 이미지라 마치 <아메리칸 파이>에 <배트맨>을 섞어놓은 것 같기도 한 이 영화에도 마블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마블의 캐릭터들은 자극된 상상력에서 튀어나온 환상의 그림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고야의 그림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태어난다>가 그렇게 말하듯, 우리가 사람이라는 정체를 놓아버리는 순간 타자의 차원이 열리고 그 다름이 두려움과 존경, 환멸과 적대의 이유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마블의 캐릭터들이다. 타자의 지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위태한 줄타기에 몸을 맡긴다는 점에서 히어로들의 삶이나 우리의 일상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환상이란 규범 속에 들어와 적절한 언어와 표상을 얻지 못한 찌꺼기의 이미지들이다. 마블의 캐릭터들 역시 그러한 찌꺼기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를 표상하는(represent) 상징보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를 더 잘 짚어주는 ‘이미지’ 말이다.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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