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0:16 수정 : 2014.06.13 11:48

마블이 창조한 영웅들은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존재다. 그들은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독단자가 아니라 부대끼고 어울려야 팀워크를 발휘하는 협력적 존재다. 2012년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속 영웅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
무참한 세월이다. 층층이 역겨운 구조가 작동한, 그래서 무력한 개인은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종류의 ‘불의’ 앞에 사람들은 차라리 ‘영웅’의 탄생을, 아니 생성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일거에 뒤집고, 끝내 패배하지 않을 서사로 비약하지 않으면 이 상황이, 작금의 형편이 너무 견딜 수 없이 불행하기에. 세상은 총체적으로 더럽고, 어른들은 하나같이 기만적이며, 권력은 속물적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꺼이꺼이 우는 편이 훨씬 정당해 보이는 그런 시간이다. 누군가 소설에서 이렇게 묘사했더라면 그건 너무 슬픔으로만 점철된 비현실이라고 욕이라도 하련만 지금 이 순간에도 돌아오지 않을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이 모든 걸 초월하는 영웅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유속의 흐름과 바다의 깊이를 단박에 무력화하는 물리력은 존재할 수 없으며, 비정규직 선장이 회사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속절없이 무능할 수밖에 없던 그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을 기적은 찾아오지 않는다. 정부는 인명 구조를 민간 기업에 위탁하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잠수부조차 검열하는 윤리 수준을 가진 집단이다. ‘경험 많은 선장이 안전한 국가를 만든다’고 표를 구하던 대통령은 이 와중에 가장 먼저 이 비극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과단한 3인칭 화법을 구가한다.

비극적 순환이다. 영웅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간절히 영웅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염원할 것도 없다. 누구도 이 현실을 비켜서거나 흔들 수 없다. 그래 차라리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없어지게 할 영웅을 기다린다. 이 비극의 순환에서 정부는 ‘시선 분산용 아이템’이란 악당을 영웅으로 호명했고,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가장 늦게까지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다이빙 벨’을 최후의 기제로 격상시켰다. 그렇게 영웅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영웅은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 상황 자체의 해체일지 모른다.

마블코믹스(Marvel Comics)의 영웅들은 바로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마블의 영웅들은 대체로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속에서 방황한다. 흔한, 사회적 서사다. 마블의 경쟁사인 DC코믹스(DC Comics)의 영웅들은 이에 비해 대체로 독단적 존재로 초월자의 지위에 대해 고민하다 기꺼이 세상을 구한다. 일종의 숙명론이다. 마블의 영웅들이 복잡한 현대성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그 방황의 끝에서 겨우 세상에 편입되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DC의 영웅들은 복잡한 현대성의 세계를 깔아두고 그 위에서 살아간다.

예컨대, DC코믹스의 대표적 영웅이라고 할 ‘슈퍼맨’과 ‘배트맨’은 그들의 세계 안에서 가히 적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압도적 ‘파워’를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DC의 영웅들에 비해 마블의 영웅들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상상계이긴 하지만 굳이 ‘밸런스’ 측면을 계측하자면 전혀 엉뚱한 얘기는 아니다. (한 예로, 마블사가 제작한 <어벤져스>를 보며 어떤 이들은 제작사의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슈퍼맨과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선 슈퍼맨과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은 상황 자체가 또 다른 무한 상상의 매치업으로 이어지며 콘텍스트화되기도 했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갈등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을 둘러싼 고민이긴 하지만, 핵심은 ‘이렇게 압도적인 내가 정말 이 세상의 일원으로 살 수 있는가’의 여부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주요한 서사적 갈등 구조는 ‘이미 영웅인 너는 세상의 일원으로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숙명적 자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일원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적 자아의 대립이다.

반면 근래 마블코믹스 영웅 서사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언맨은 전혀 다르다. <어벤져스>에서 전혀 영웅답지 않은 형상으로 캡틴아메리카 등과 대면한 아이언맨은 자신의 정체성을 ‘천재, 억만장자, 플레이보이 그리고 박애주의자’라고 말한다. 고함량의 유머가 수반된 이 대답은 그 자체로 영웅의 숙명적 자아를 걷어낸 존재 설정이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흡사 국민교육헌장 문구처럼 ‘우리는 지구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고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다. 가볍고 지극히 개인적인 아이언맨 정도의 윤리 의식을 가진 이가 전 지구를 구한다는 것은 그래서 다소 허황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아이언맨의 적수는 대체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누군가였지 세상 자체의 운명은 아니었다.

마블이 창조한 ‘어벤져스’의 세계는 다분히 마블 영웅들의 특성을 감안해 철저하게 고안된 스테이지다. 상업적 기획 의도를 제외하고, 각기 다른 계열에서 존재하는 영웅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설정의 흥미 요소 외에 그들은 태생적으로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달리 어울려야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였다. 독단자로 위치하는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달리 마블의 영웅들은 부대끼고 팀워크를 발휘해야 하는 협력적 존재다.

태생적으로 부족하게, 그래서 협력할 수 있게 설계된 영웅의 존재는 그 자체로 지금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우리에게 닥친 진짜 참사는 슬픈 얼굴로 돌아보니 어느새 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엘리미네이션 매치’(Elimination Match)의 룰로 바뀌어버렸다는 가혹한 확인이다. 지난 두 번의 선택에서 우린 초월자이자 독단자를 자처하던 이들을 택했다. 그들은 ‘협치’로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성의 미덕을 완전히 방기한 채 국민을 깔아두고 그 위에서 ‘통치’했다. 마블의 영웅을 한자리에 모은 어벤져스의 기동은 영웅들 뒤에서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닉 퓨리’라고 하는 숨겨진 지도자가 있어 가능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일까? 하나같이 제자리에서 영웅이었을 세월호 참사자들의 명복을 빈다.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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