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09:59 수정 : 2014.06.13 13:31

1. 폭풍전야

경봉, 이놈이 이제는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나.

조당에 나온 공자들은 매일 점심으로 나오는 닭고기 두 마리가 나오지 않고 국물뿐인 오릿국이 나온 것이 경봉 쪽의 짓인 걸 알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최저는 품위나마 있었는데 경봉은 도무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물 같았다. 아무튼 오리 국물 사건으로 종친 및 귀족 세력과 경씨 세력 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경봉은 공자들이 사소한 음식 일로 경씨를 비난하고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가신 노포별과 상의했다.

“저놈들을 어찌할까?”

“한 줌도 안 되는 그깐 놈들, 가죽을 벗겨버리면 그만입니다.”

애당초 오리 국물 사건은 노포별의 주도하에 경씨의 가신들이 공족의 재산을 노려 꾸민 일이었다. 노포별이 전통적인 명문가 중 하나인 안씨가(晏氏家)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영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냈다.

“이 기회에 탐욕스러운 종친들을 정리해버리고 부귀영화를 함께합시다.”

안영이 납작 엎드렸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귀족 간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계모(計謀)도 배짱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오늘 일은 안 들은 것으로 맹세하겠습니다.”

경봉 세력이 명망가들에게 ‘줄서기’를 타진하고 있다는 첩보가 세작(간첩)을 통해 진문자(陳文子)의 귀에 들어갔다.

진문자가 아들 무우를 조용히 불렀다.

“아무래도 경씨와 공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것 같다. 우리 가문에 어부지리가 있을까?”(禍將作矣 吾其何得?)

진환자(陳桓子·진무우)가 대답한다.

“장가(莊街)에 있는 경씨의 목재 100수레를 얻을 것 같습니다.”(得慶氏之木 百車於莊)

장가는 주로 관청이 밀집해 있는 거리이니, 경씨를 위해 일하던 조정의 인재들이 장차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란 비유였다. 즉, 이번 사태를 잘 이용하면 진씨의 권세가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얻은 뒤에는?”

진문자가 되묻고는 아들의 귀에 속삭였다.

“한번 얻은 것은 잘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하느니.”(可愼守也已)

한편, 노포계와 왕하는 아버지를 대리해 정사를 맡고 있는 경사에게 점괘 하나를 보였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치려고 뽑은 괘입니다. 어떻습니까?”(或卜攻讐 敢獻其兆?)

경사가 점괘를 풀어보더니 말했다.

“우두머리를 잡겠다. 피를 좀 보겠구나.”(克. 見血)

2. 칼끝의 향방

그해 겨울, 그러니까 권신 최저가 몰락하고 경봉이 정권을 잡은 지 1년여가 지난 때였다. 경봉이 진환자와 함께 래(萊) 땅으로 사냥을 떠났다. 래는 지금의 산둥반도 연안 지역으로 임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경봉이 진환자를 동반한 것은 볼모의 성격이 짙었다. 겉으로는 사냥을 함께 즐기자는 것이지만 권력자가 잠재적 경쟁자가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는 것이었다.

사냥이 한창일 무렵 진환자에게 아버지 진문자의 전령이 왔다.

‘모친 위독. 급상경.’

어머니에게 급병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진환자는 경봉에게 달려가 귀가를 청했다.

막 사냥 열기가 뜨겁던 참이라 경봉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모친 상태가 어떠신지 내가 점을 쳐볼 테니 너무 심려 말게나.”

경봉이 거북점을 쳐서 징조가 나오는 듯하자 진환자는 다짜고짜 거북 껍데기를 부여잡고 눈물부터 흘렸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가 죽을 징조입니다.”(示之兆 曰死!)

측은해진 경봉은 진환자의 귀경을 허락하고 말았다.

경봉의 가신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갑자기 무슨 모친 위독이랍니까?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도 돌아갑시다.”

경봉도 꺼림칙했지만 집정으로서 기왕 보인 관용을 번복하기도 뭣했다.

“쓸데없는 걱정. 설사 무슨 일이 난대도 서울엔 경사가 있지 않은가?”

사냥터를 벗어나자 진환자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임치로 가는 강을 건넌 뒤에는 부하들을 시켜 건너온 배와 다리를 모두 불태웠다.

불타는 나루터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애초 경봉의 총신 노포별은 공족들의 재산을 노려 일부 공족의 제거 작전을 꾸몄으나 노포별의 동생 노포계의 칼끝은 반대로 경씨를 향하고 있었다. 노포계와 왕하가 기실 누구였던가? 최저와 경봉에게 죽음을 당한 장공이 총애한 무사가 아니었던가. 장공의 복수를 맹세한 두 사람은 본색을 감추고 경씨의 무릎 밑으로 숨어 들어가 복수의 날만을 노려왔던 것이다. 노포계의 배후에는 최저와 경봉에게 눌려 지내왔던 고씨, 포씨, 난씨 등과 같은 전통적인 호족들이 있었다. 귀족 간의 대립에는 중립을 지켜왔던 진문자-진환자 부자도 비열한 방식으로 최씨를 멸문시킨 경봉을 혐오해 귀족들의 경봉 거세 계획에 동참했다. 이 친위 쿠데타는 반진나라파와 친진나라파의 대립 성격도 띠고 있었다. 친진나라파는 반진나라파의 ‘수괴’ 경봉이 임치에 없을 때를 노렸다. 도성 안의 경씨 세력을 제거하고 사냥 나간 경봉의 주력군을 외지에 고립시키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계획이었다.

3. 이상한 부부

미남자 노포계에 반해 남편으로 삼은 경사의 딸 노포강은 전향자 출신인 남편의 출세길이 늘 걱정스러웠다.

“여보, 부부 사이엔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저한테도 꼭 말해야 해요.”(有事而不告我 必不捷矣)

그런 아내를 사내도 사랑했던 것일까? 노포계는 아내에게 거사 계획을 실토했다.

“사랑하는 당신이 늘 내 걱정을 하기에 말하지 않을 수 없었소.”

장인의 목숨만은 살려주려 한 것인지, 아니면 이 또한 거사의 일부였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아내 또한 남편을 위해 아버지를 희생하려 하였는지, 아니면 남편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도 살리려는 생각이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성질이 괴팍해서 남이 뭐라고 하면 꼭 반대로 합니다. 그날 제사에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제사에 나가지 않을 것이니 내가 나서서 말리겠습니다.”(夫子 愎莫之止 將不出 我請止之)

마침내 거사일인 상제(嘗祭·공실 제사)일 아침. 노포강이 아버지의 소매를 잡았다.

“변고가 있을 듯합니다. 가지 마십시오.”(且止之)

경사가 웃는다.

“감히 누가 우리 집안에 반기를 들겠느냐?”(弗聽曰 誰敢者?)

경사는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장한 가병들로 하여금 제사가 열리는 태공묘를 철통같이 에워싸게 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내 허락 없인 들어오지 못한다.”

제사는 무사히 끝났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고는 무슨. 고생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풀어 잔치를 열어줘라.”

술과 음식이 나오고 광대놀이도 벌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묘당을 지키던 경사의 가병들도 갑옷을 벗고 놀았다. 진씨와 포씨의 가복들이 앞장서 길놀이를 떠나자 경씨 가병들도 구경하느라 따라나섰다. 광대놀음으로 거리가 시끌벅적할 즈음, 묘당 담 밑에 벗어놓은 갑옷을 챙겨 입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씨, 고씨, 포씨, 진씨 쪽 사람들이었다. 곧이어 묘당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렸다. 문짝 부서지는 듯한 큰 소리가 들리자 의아한 경사가 노포계에게 상황을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가 싶던 그 순간, 노포계의 품에서 칼이 빠져나와 경사의 등을 찔렀다. 이어 왕하의 창이 경사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경사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배신이었다. 사위의 칼에 깊은 자상을 입은 경사는 고통과 회한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미친 듯이 몸부림치다가 죽고 말았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경사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경공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대부들이 경공을 호위하며 말했다.

“이번 거사는 중신들이 전하를 위해 벌인 일이니 두려워 마십시오.”(郡臣爲君故也)

경봉이 없는 틈을 노린 호족들의 친위 쿠데타는 보기 좋게 성공했다. 사냥에서 돌아오던 길에 소식을 들은 경봉은 임치로 들어가 옥가에서 일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임금은 물론 대부분의 국인(國人)들이 유혈 내전을 원치 않자 경봉은 잔존 세력을 이끌고 노나라를 거쳐 오나라로 달아났다. -이상 <좌전> 노양공 28년, <사기> ‘제태공세가’

4. 진씨의 전성시대

제나라 정권을 쥐락펴락하던 최씨와 경씨 세력이 거세된 때는 경공이 이들의 손에 이끌려 임금이 된 지 3년째인 해였다. 전왕을 시해하고 자신을 세운 두려운 권신이 사라졌지만 경공의 자리는 아직도 가시방석이었다. 최씨와 경씨의 빈자리를 고만고만한 호족들이 앞다퉈 차지했다. 이런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세력이 진씨였다. 당시 백성 사이에 명망이 높던 진문자와 그의 아들 진환자는 몰수한 최씨·경씨의 재산을 호족들에게 적절히 분배토록 하여 그들의 환심을 산 다음 경공의 친정(親政)을 명분으로 안영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안영은 장군으로 명성이 높았던 안환자의 아들로, 그 자신 역시 지혜가 많고 청렴해 3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좋은 평판이 자자했다. 또한 안씨가가 명문가이기는 하나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아 권력 투쟁 상대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호족들은 안영의 재상 기용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진씨의 입장에서도 지혜로운 안영을 통해 임금과 호족을 동시에 견제하는 한편,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쉽다는 점에서 안영의 재상 기용은 절묘한 카드였다. 진환자 부자는 그래도 안심되지 않았는지 진씨가의 서자 집안 출신인 진양저를 국방장관 격인 사마로 밀었다. 훗날 전국시대 때 제나라 위왕에 의해 편찬되어 오나라의 <손자병법>과 더불어 중국 고대 병법서의 쌍벽을 이루게 되는 <사마병법>의 주인공이 바로 이 사마양저(司馬穰苴)이다. 사마양저의 지휘 아래 군사력을 기른 경공은 연나라를 굴복시키고 진나라와 군사적으로 대등하게 경쟁하면서 동방의 패자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사마양저의 활약과 명성은 진씨가에게도 더없는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령관의 존재는 가병을 거느린 군사집단이기도 한 전통 호족들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통치력이 미약한 군주에게도 병권을 틀어쥔 막강한 신하란 결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이처럼 경공과 호족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사마양저는 결국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마양저의 실각은 진씨가에도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지금의 패업이 누구 덕인 줄도 모르는 소인배들!”

결국 경공 16년 진씨가의 젊은 후계자인 진기와 진표 등이 고씨와 난씨가 반목을 벌이는 틈을 노려 두 집안을 멸문시켰고 포씨, 국씨 등도 잇따라 제거함으로써 진씨가는 유일무이한 제나라 최고 권력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경공 시대는 진씨가가 훗날 제나라 임금 자리마저 찬탈하는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5. 정명(正名)의 이상

공자가 임치에 왔을 때 경공은 50대 중·후반의 나이로 재위 32년째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군주권은 앞에서 보았듯, 권신들이 벌인 난투극의 파생물일 뿐이었다. 경공은 최후의 승자가 된 진씨가에 비굴하게 의존하는 대가로 군주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경공의 치세는 제나라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근본적인 결함을 노출하고 있었다. 바로 군주권의 부재였다. 군주가 군주답게 굴지 않자 군신 간의 위계질서도 흐릿해졌다. 얼굴마담과 진짜 주인이 따로 있는 술집과 같은 꼴이었다. 이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정치 현실은 귀족사회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기풍 퇴락으로 이어졌고, 혹정과 가렴주구의 묘판이 되고 있었다. 물론 이같은 정치 상황은 제나라만이 아니었다. 많은 나라에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았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이 시기는 모든 기존 질서와 가치가 위협받는 하극상과 계급투쟁의 시대였다. 권력의 유무나 전쟁의 승패만으로는 어느 쪽이 정의이고 누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 단정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공자의 ‘정명’(正名)은 이런 시대적 배경과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냥 문맥만으로는 상식 수준의 도덕적 언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상식을 상기시키고자 정명론을 펼쳤다. 공자가 가장 원론적인 말로서 군신관계와 인륜 질서의 근본을 주장했던 것은 덕(德)과 예(禮)를 갖춘 군자정치, 즉 수백 년 전 주공이 세운 문화정치로의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복고주의는 단순히 과거의 질서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었다. 공자의 복고에는 가치가 전도된 시대에 이상을 가진 군자라면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는 진정한 대동(大同)으로의 회귀, 즉 평화로운 ‘천하국가’를 향한 꿈이 작동하고 있었다.

6. 신화의 탄생

지금까지 살펴본 경공 치세 때의 정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나, 이생은 선생님의 제나라 시절을 추적하면서 선생님이 ‘군군신신부부자자’의 정명론을 설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경공 앞에서 한 강론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여전히 당시 무명의 외국 사인(士人)에 불과한 30대 중반의 공자가 50대 중·후반의 임금과 60대의 재상(안영) 앞에서 정치철학을 강론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나는 그 장면에서 지난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는 후세 사람의 필력(筆力)을 느낀다. 그 대화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정녕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먹을 수 있겠소!”

(景公問政孔子 孔子曰 君君臣臣父父子子. 景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豈得而食諸. -<사기> ‘공자세가’)

이 대화는 선생님의 어록 속에 들어 있는 여타의 대화들과는 다르게 뭔가 어색한 동문서답의 느낌을 준다. 묻는 이가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자 대답하는 이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게 정치’라고 했는데, 애초 정치를 물은 이가 맞장구를 치며 고작 하는 말이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다면 곡식이 있어도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먹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문면만 읽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면서 어떻게 밥을 먹겠느냐’고 하는 것이니 아주 빗나간 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의 요체를 물은 사람의 답변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그런 답변치고는 너무 유치한 수준이다. 그래서 훗날 일부 사가들은 경공이 어리석고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상의 경공은 탐욕스럽고 노회한 사람이지 어리석은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58년을 재위하면서 재상 안영을 나름대로 부릴 줄 알았고, 호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줄도 알았다. 정치권력을 포기하면 부는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나는 경공의 이 발언이 실재한 것이었다면, 경공의 비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경공은 그런 의도적인 비유를 통해 대화의 핵심을 비껴가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대화는 공자와 경공의 대화가 아니라 실은 경공과 안영이 나눈 수많은 대화에서 파생된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추정한다. 나, 이생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계속 이야기를 해보겠다. (계속)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바로잡습니다

지난호에서 ‘君君臣臣父父子子’가 ‘君君臣臣夫夫子子’로 잘못 표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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