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16 수정 : 2014.05.02 15:40

1. 정명(正名)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정녕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서 먹을 수 있겠소!”(景公問政孔子 孔子曰 君君臣臣父父子子. 景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豈得而食諸.) -<사기> ‘공자세가’

제(齊)나라로 간 공자가 경공을 만나 ‘이름을 바로 세운다’는 정명(正名) 사상을 설파한 이 장면은 공자의 제나라 망명 시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조종(祖宗) 공자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동방의 패자(覇者)인 제나라 임금을 앉혀놓고 “임금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은 유가들의 어깨를 한껏 으쓱하게 해주는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전기적 사실’은 실제 역사와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과연 무명의 외국 선비가 탁월한 재상의 보좌를 받으며 30여 년째 재위하는 50대 중·후반의 노회한 임금에게 ‘임금이 임금다운 게 정치’라고 훈계할 수 있었을까? 이 ‘신화’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경공은 제나라 중흥기의 임금임에도 명군은커녕 암군이란 소리까지 듣는 묘한 성격의 군주였다.

서기전 516년 36살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제나라는 북방의 진(晉), 서방의 진(秦), 남방의 초(楚)와 국력을 경쟁하며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환공(桓公)의 전성시대와 비견되는 중흥기로서 여러 나라로부터 동방의 패자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라가 나라답고 임금이 임금다운 나라.’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환공의 패업을 기억하는 제나라 사람들은 ‘위대한 제나라’에 걸맞은 ‘위대한 임금’을 갈망했다. 그러나 정작 경공은 재위 기간 내내 이렇다 할 통치철학과 역사의식을 발휘하지 못했다. 경공은 재상 안영(晏嬰, ?~서기전 500년)에게 정치를 일임하고 자신은 축재와 사치에 골몰했다. 경공의 ‘탈정치’는 세력 없는 군주가 권신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처세술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임금을 달가워할 대부와 국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중흥기에 임금이라는 작자가 사치와 허영이나 일삼는 ‘졸부’라니….”

시골뜨기 이방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밝은 눈을 지녔던 공자의 시야에 제나라 정치의 이런 아킬레스건이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경공은 제나라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인 58년을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무려 4천 필의 말을 소유한 대부호였지만, 정작 그가 죽었을 때 슬퍼한 백성이 몇이더냐고(齊景公 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계씨’편 12장) 훗날 공자께서 탄식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그 경공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탐욕과 협잡,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악인열전 속의 군상(群像)을 보고 있노라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夫夫子子)라는 선생님의 일갈이 왜 제나라 시절에 발화(發話)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럼,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한다면 공자가 태어나기 3년 전, 즉 임치에 도착하기 38년 전으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2. 임금의 부끄러운 죽음

서기전 554년 여름 제나라 임금 영공(靈公)이 죽었다. 영공은 늘그막에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 장성한 태자를 변방으로 내쫓고 후비의 어린 아들을 후사로 세운 것이다. 영공의 죽음이 임박하자 태자의 태부(스승 겸 후견인)였던 권신 최저(崔杵)가 ‘비정상의 정상화’를 명분으로 궐기했다. 최저는 영공의 고명대신 고후(高厚) 등 후비 세력을 제거하고 폐출된 태자를 옹립했다. 그가 장공(莊公)이다.

장공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과 외교 무대를 누벼서인지 독선이 강한 젊은이였다. 군사활동을 좋아하여 무사와 용자를 총애했다. 그는 환공 시대의 패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러나 패자가 되기엔 인간적으로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후비를 직접 죽여 그 주검을 조정의 뜰에 보란 듯이 던져놓았다. 출발부터 예(禮)를 모르는 군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장공은 진나라에서 내란을 일으킨 호족 난영이 제나라로 도망쳐오자 그를 환영했다. 안영은 진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며 장공을 만류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방법은 신의뿐입니다. 신의를 잃으면 존립할 수 없습니다.” 장공은 코웃음을 쳤다. 안영이 원로인 진문자(陳文子·‘공야장’편에도 나오는 인물로, 당시 제나라 권문세가의 수장이자 명망가이다)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임금은 아무래도 오래가지 못할 듯합니다.”(弗能久矣)

장공은 진나라 내분이 격화되자 그 틈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치고자 했다.

“이제 과인이 중원의 패자가 될 차례다.”

장공은 중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위대를 선봉으로 삼아 진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조가(朝歌·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빼앗았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장공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발단은 장공을 옹립한 집정대신 최저의 재혼이었다. 당공(棠公)이란 대부가 죽어 문상을 갔던 최저가 초상집 안주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과부가 마침 가신의 누이였다. 얼마 전 상처(喪妻)하여 적적하던 최저가 가신 동곽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보게 언, 자네 누이 참 미인일세 그려. 내게 줄 수 없겠나?”(見棠姜而美之 使偃取之)

“동곽씨와 최씨는 같은 강성(姜姓) 아닙니까? 어렵지 않을까요?”(男女辨姓 不可)

이른바 ‘동성동본’이니 남들이 쑥덕대지 않겠느냐고 동곽언이 슬쩍 튕겨본 것이다. 몸이 단 최저가 직접 점을 쳤다며 점괘를 궁중의 태사(太史)들에게 보였다. 최저의 ‘희망 사항’을 미리 접수한 태사들이 눈치 없이 굴 이유가 없었다.

길(吉)!

최저는 그 길로 진문자에게 달려갔다.

‘진가만 눈감아주면 딴죽 걸 놈이 없겠지.’

그러나 진문자는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글쎄요…. 점괘 중에 ‘집에 들어가도 아내를 보지 못하니 흉하다’(入于其宮, 不見其妻. 凶)는 효사(爻辭)가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미녀 과부를 얻고 싶은 욕심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최저는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올시다! 여자가 과부가 되었으니 흉사란 바로 남편의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남편이 액운을 다 지고 갔으니 내게 더 무슨 흉이 있으리오!”(嫠也 何害 先夫當之矣)

이리하여 최저가 과부 당강(棠姜)을 후처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한창 깨가 쏟아지고 있을 때, 의외의 곳에서 복병이 나타났다. 장공이 최저의 집에 놀러왔다가 새 안주인을 본 것이다.

‘저런 미녀가 늙은이의 짝이라니!’

장공은 임금의 위세로 밀어붙였다. 아무리 집정대신이라 해도 막가파식으로 나오는 임금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딱 한 번.”

그러나 처음이 어렵지 일단 정을 통하는 데 성공하자 장공은 아예 최저의 내실을 제 집 드나들듯 하기 시작했다. 최저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어느 날인가는 장공이 당강의 방에 걸린 최저의 모자를 들고 나와 아무에게나 던져주는 호기를 부렸다. 시종이 걱정되어 장공을 말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不可)

“안 되긴 뭐가 안 돼. 최무자(崔武子)인들 과인이 준 벼슬이 없다면 한갓 볼품없는 늙은이일 뿐.”(不爲崔子 其無冠乎)

마침내 최저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누구 덕에 임금이 되었는데, 금수만도 못한 놈.”

어느 날 최저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궁전에 전해졌다. 냉큼 최저의 집을 방문해 문병을 마친 장공은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고 당강의 방으로 갔다. 최저가 매수한 시종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것도 모른 채 장공은 침실의 기둥을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강이여, 어서 빨리 오시게나.

최저가 매복해둔 무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쳐라.

장공은 칼을 빼든 무사들을 보고 놀라 누대 위로 올라가 애걸했다.

“돈이고 벼슬이고 뭐든지 달라는 대로 주마.”

“저희들은 주군의 무사. 간음하려는 자를 잡으면 주살하라는 명은 있었으나 다른 명은 없었습니다.”(陪臣干掫有淫者 不知二命)

장공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화살이 허벅지를 꿰뚫었다. 담장 밑으로 떨어진 장공의 몸통에 창칼이 무수히 쏟아졌다. 제나라 어느 임금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최후였다.

3. 권신의 어이없는 몰락

장공을 시해한 최저는 영공의 서자들 중에 세력이 미미한 자를 골라 임금으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바로 경공이다. 23~26살로 추정되는 나이에 외가가 노나라 망명객 집안인 경공은 갑자기 불려나와 벌벌 떨며 임금 자리에 올랐다. 제나라 권력은 최저의 한 손에 들어갔다. 이듬해 당강이 아들을 낳았다. 늦둥이의 기쁨이 영공의 교훈을 잊게 할 만큼 컸을까? 이번엔 최저 자신이 멀쩡한 장자를 물먹이고 갓난아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큰아들이 낙향을 자청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최저의 총신이 된 당강의 오빠 동곽언과 당씨 세력은 이참에 아예 결판을 내겠다고 덤볐다.

“본읍은 최씨의 선산이 있는 곳. 새 종주(당강의 아들)가 섰는데, 어떻게 전실 자식이 본읍을 차지합니까?”

이 소식을 들은 최저의 두 아들이 격분했다.

‘늙은 아버지가 사랑하기에 참고 있건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혁명 동지’로서 정권의 2인자인 경봉(慶封)을 찾아가 뒷감당을 부탁했다.

“아버지를 위해 집안을 정비하고자 합니다.”

사태 판단이 서지 않은 경봉은 일단 그들을 돌려보낸 뒤 가신 노포별을 불렀다.

“어찌하면 좋을까?”

노포별이 말했다.

“최씨는 본래 임금(장공)의 원수인데, 드디어 하늘이 그를 버리려나봅니다. 지들 가족 간의 내란이니 주군께서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경봉이 망설이자 노포별이 바짝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최씨의 화는 경씨의 복입니다.”(崔之薄 慶之厚也)

며칠 뒤, 최저의 두 아들을 다시 부른 경봉이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최무자(崔武子)를 위하는 길이라니 그리 하시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도 돕겠네.”

두 아들은 그 길로 가병을 이끌고 아버지 집으로 가 동곽언과 당무구 일파를 척살했다. 경악한 최저는 신발도 못 신은 채 ‘혁명 동지’ 경봉에게 달려갔다.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네. 나는 죽어도 좋지만 가문이 망해서는 안 되네.”

경봉이 시치미를 뚝 떼고 놀란 듯이 최저를 위로하며 말했다.

“최씨와 경씨는 한배를 타고 있습니다. 내가 수습해드리리다.”(崔慶一也, 爲子討之)

경봉은 노포별에게 최씨 집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최저의 두 아들은 자기편인 줄 알았던 경봉에게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난전이 벌어지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당강은 그만 내실의 기둥에 목을 맸다.

상황이 종료되자 노포별이 최저를 수레에 태워 집 앞에 내려주며 말했다.

“분부대로 거행했습니다.”(復命)

적당히 손만 봐줄 줄 알았던 최저는 쑥대밭이 된 집안에서 두 아들과 당강의 주검을 발견했다. 망연자실.

최저는 넋이 나간 채 당강이 목맨 기둥에 자기 목을 맸다.

‘집에 돌아가도 아내를 보지 못한다.’

점괘는 적중했고 최씨는 멸문했다.

자신을 옹립한 최저가 이상한 방식으로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지자 경공은 공포에 질려 오줌을 쌀 지경이었다.

‘불똥이 나한테 튀는 게 아닌가?’

안영과 진문자는 오금이 저려 덜덜 떨고 있는 경공의 소매를 조용히 끌어다가 용상에 앉히고는 다독였다.

“전하, 가만히. 그냥 가만히만 계십시오.”

4. 쥐에게도 가죽이 있건만

공자가 네 살 때 장공이 죽고, 2년 뒤에는 장공을 시해한 최저가 노욕에 빠져 자멸했다. 최저의 집안싸움을 교묘히 이용해 제나라 권력을 독차지한 사람은 최저와 쿠데타를 같이한 경봉이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골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던가. 2인자도 없는 1인자가 된 경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유일한 약점은 그가 일자무식이란 것뿐이었다.

장공을 시해하고 경공을 세운 그해, 수상 최저는 좌상 경봉을 노나라에 사절로 보냈다. 임금이 바뀐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정점에 선 경봉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수레를 타고 곡부에 나타났다. 엄청난 부자이기도 한 제나라 귀족들은 수레 꾸미기를 좋아했는데, 가난하지만 적통의 문화국가를 자부하는 노나라 지식인의 눈에는 무식한 졸부의 허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짓은 반드시 화를 부르니 수레가 아무리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랴.

(服美不稱 必以惡終 美車何爲)

노나라 수상 숙손목자가 경봉을 초대해 연회를 베푸는데 경봉이 의전을 알지 못해 무례하게 굴었다. 숙손이 좌중의 사람들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묘한 시 한 수를 읊었다.

상서유피 인이무의(相鼠有皮 人而無儀)

인이무의 불사하위(人而無儀 不死何爲)

경봉은 숙손목자가 읊은 시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다가 좌중의 인사가 박수를 치며 웃자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쥐에도 가죽이 있거늘 사람이라면 체통이 있어야지

사람으로 체통을 지킬 줄 모르면 죽은 거나 진배없지 -<시경> 용풍 ‘상서’편

5. 분노의 오리 국물

까막눈으로 매일같이 조정 대사를 결재하는 일에 신물이 난 경봉은 아들 경사(慶舍)에게 정사를 일임하고 자신은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로 했다. 총신 노포별과 첩을 바꿔 끼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자 아예 조당을 노포별의 집으로 옮겼다. 문고리 권력을 쥐게 된 노포별이 어느 날 경봉과 대작하면서 사면령을 건의했다. 장공의 호위무사였다가 망명한 동생 노포계를 사면 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과거를 뉘우치는 자들을 특별히 용서해주시면 목숨 바쳐 충성할 것입니다.”

노포별은 귀국한 노포계를 경사의 가신으로 밀어넣었다. 노포계는 문무를 겸비한데다 미남자였는지, 경사의 딸이 그를 좋아해 남편으로 삼았다. 경사의 신임을 얻어 사위까지 된 노포계는 ‘망명 동지’ 왕하를 불러들여 나란히 경사의 좌우를 호위했다.

어느 날 조정에 출근한 공자(公子)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데 늘 나오던 닭고기 두 마리가 나오지 않고 오리가 나왔다. 그것도 국물만 멀건 채로. 모두들 젓가락을 내려놓고 요리사를 불러 호통을 쳤다.

“우린 그저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꾸민 일이 분명했다. 공자들은 분격했다.

‘경봉, 이놈이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는구나.’(계속)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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