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2 14:13 수정 : 2014.05.02 15:40

“본성이 우리에게 준 가장 훌륭한 선물은 삶으로부터 도망치게 내버려둔다는 점이다.”

-몽테뉴

공감할 수 없는 공감

자살은 어느 사회, 시대에나 흔한 일이지만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인간 행동이다. 그런데 최근 경제적 어려움이나 경쟁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자살이 ‘사회적 타살’로 인식되면서 유례없는 공감을 얻고 있다. 자살한 이를 비난하기보다 사회적 대책이 마련되고 낙인이 개선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녀의 동반 자살이 아니라 ‘먹고살 만한 개인이 사소한 이유’로 자살한 경우에도 이만큼 이해받을 수 있을까? 지금 여론대로라면 ‘생계형 자살’만이 자살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일상생활에서 우울한 기분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우울증으로 진단할 만한 증상이 6개월 이상 지속될 때 질병으로 다룬다.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은 별도의 현상이 아니다. 둘 다 원인은 각기 다른, 측량할 수 없는 우울 증상의 결과다. 우울증은 질병이고 자살은 그로 인한 사망, 질병사일 뿐이다. 숨길 수 없는 ‘신체적 질병’인 말기 암환자와 겉으로는 알기 어려운 ‘정신적 질병’인 중증 우울증 환자는 같은 ‘자격’의 환자가 아니다. 인간이 신체적 병에 걸리는 것은 생로병사의 원리지만 자살은 선택이라는 통념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에 대한 구별과 위계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생명보험 등 경제적 문제와도 직결된다.

자살에 대한 낙인의 본질은 약자 혐오다. 자살은 ‘온전치 못한’ 인간인 여자, 아픈 사람, 장애인, 노인의 존재와 함께 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최악의 범죄로 인식돼왔다. 자살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고대와 다를 바 없다. 의학 교육용 주검이 부족해도 기독교 계열의 대학에서는 자살자의 주검 기증은 거부한다. 자살자에게도 장례를 치러주는 것, 이것이 역사의 발전이라면 발전일까. 한국처럼 정신적 질병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고 사회 전반에 걸쳐 ‘비정상성’에 대한 터부가 완강한 사회에서 최근의 ‘자살론’은 거의 혁명에 가깝게 느껴진다. 여론은 동정에 가득 차 있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전적으로 시대에 책임을 묻는다. 다음 인용문은 현재 여론의 동향을 기술한 좋은 예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이 중요한가?

“자살 도미노라도 벌어지듯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줄을 놓고 있다. 장애가 있는 4살 아이와 함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엄마, 기초생활보장비만으로는 살길이 없다며 함께 숨을 끊은 노부부, 11살 아들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 제 몸도 날린 실직 가장, 내가 죽어야 장애아들이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다며 목을 맨 아버지, 신문에 한 줄 나지도 않은 수많은 노인들의 자살…. 이건 명백한 붕괴의 조짐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 중 처음부터 아프고 가난하고 우울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인생의 한 시기 예기치 않은 ‘변수’와 맞닥뜨렸고, 열이면 열, 극단적 빈곤으로 내몰렸다. (중략) 이들은 ‘짝짓기’를 목표로 모였으나 ‘취업’이나 ‘일자리’ 혹은 ‘월급’, ‘정년’ 등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비상구도 탈출구도 동아줄도 없는 벼랑 끝 사회에서 제명대로 산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 아닌가.”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씨네21> 제945호)

인용문의 요지는 자살이 구조적 문제라는 것, 그 때문에 자살이기보다는 타살이며, 그 책임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호모 사케르’적 상황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는 현 정권에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고 정확한 분석이다. 이 글만 놓고 보면 이제 자살 담론은 개인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 확실히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예전의 가족 동반 자살은 생명경시론을 넘어 자녀를 소유물로 여긴다는 비난이 엄청났다. 그런데 요즘은 동반 자살이 더욱 이해받는 느낌마저 준다. 동정과 공감은 물론 “어떻게 그 상황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당연지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는 개인과 구조를 대립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은 사회적 타살과 개인적 자살을 구별하지만 이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구별의 기준은 단지 이해되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이다. 자살 탐구는 원인과 결과, 사회학과 생리학, 몸과 마음, 자유와 강제, 개인과 구조 등 근대철학의 모든 이분법에 대한 도전이다. 현재 상황을 사회적 타살로만 이해하려는 ‘의도’는 문제적이다. 사회적 타살 담론은 앞에서 말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대립쌍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지 않는 한, 현재의 자살 ‘담론 소동’은 일시적 유행이거나 삐딱하게 말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의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한 동정 혹은 박근혜 정권의 실정 근거 중 하나로 취급되고 말 것이다.

에이즈로 인한 사망과 자살 중 어느 쪽에 편견이 더 심할까. 자살에 대한 낙인과 가족이 받을 상처가 두려워 에이즈에 걸리려고 노력하는 우울증 환자의 사례를 보면 자살에 대한 낙인은 호모 포비아도 ‘제칠 수 있는’ 듯하다(<한낮의 우울>의 작가 앤드루 솔로몬의 직접 경험담이다). 지인 중에 자살한 이들이 있는데, 모두 “교통사고” “심장마비” “실족사” “미국 갔다”로 처리됐다. 요즘은 ‘자살 생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자살하려다 생존한 사람이 아니라 자살한 가족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남은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다. 이 용어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살하기까지 투병 당사자가 겪었을 고통보다 남은 사람을 희생자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질병의 희생자(자살자)를 ‘가해자’로 전제하는 언설이다.

‘왜’라는 질문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다”라는 문장은 이상하다. 원래 자살(Suicide)의 반대는 타살이 아니라 살인, 살해(Murder, be killed)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나 ‘사회적 살해’라는 표현은 거의 없다. 이는 이들의 죽음이 ‘사회적’이라고는 하지만, 타인에 의한 살해(Homicide)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세 모녀 자살이 사회구조의 결과임은 분명하지만, 개인의 ‘선택’이 반영됐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그 선택의 범위가 정해지는지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혼재’, 즉 경합의 조건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왜 자살하는가? 이는 자살을 적극적 선택 행위로 볼 때만 가능한 질문이다. 다른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왜 죽는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자살은 폐암 환자가, 루게릭 환자가, 교통사고 상해 환자가 죽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살은 고문당하는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는 원리와 같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간단하다. 죽을 만큼 아프면 죽는다.

충동적? 의외로 유서를 남기는 자살자는 많지 않다. 자살자들은 비장한 각오와 고뇌 속에서 인생을 정리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또한 그런 사람도 있지만, 통념과 달리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이유 역시 단순하다. 유서를 쓸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틀 동안 사경(死境)을 왔다갔다 하다 돌아가신 지인 옆에서 간병을 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기력이 없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글자 그대로, 숨이 들락날락했다. 그런 상태에서 유서를 쓰란 말인가. 안 쓰면 충동적 선택인가. 자살 직전의 환자 상태도 숨을 거두기 직전의 다른 병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물론, 이는 우울증의 증상 정도에 따라 다르다. 우울증 치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개인별 증상의 다양성이다).

이기적? 대개 자살을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 죄의식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그래서 차라리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타성’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누구나 오래 아프면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와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심정을 갖게 된다. 평소 성실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혐오에 시달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신이 죽어야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에게 자살은 포기나 패배가 아니라 치유다.

신체적 고통으로서 우울증, 질병사로서 자살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의 임종을 경험한 사람은 주검이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경직이 진행되기 전까지 내가 알던 그 사람이다. 흔히 말하듯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몸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아는가.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의식(Consciousness)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몸의 일부인 의식이 영원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의식은 몸의 일부지만 중요한 ‘기관’이라서 그것이 사라지면 생명은 멈춘다. 살아 있는 몸과 죽은 몸(시체)의 영어 표현이 같은 ‘Body’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원래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서 몸은 정신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의 산물이지만, 의식이 없는 몸이 시체라는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동맥경화가 혈관이 좁아지는 병이듯, 에이즈가 몸의 면역력과 관련이 있듯, 정신질환(Mental Disease)은 의식이 오작동된 몸이다. 의식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몸인 의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분(Mood), 인식, 지각, 판단을 담당하는 몸(뇌)의 일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자살에 이르게 하는 우울증은 뇌에서 의지의 영역을 관장하는 부분이 고장난 신체적 질병이다. 정신질환의 증상은 철저히 신체적이다. 일시적인 실명, 탈골, 두통, 탈진, 이명 등이 동반된다. 같은 내용의 악몽이 반복·지속되는 경우가 있는데 잠에서 깨도 일상으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만일 구타를 당한 악몽이었다면 실제 몸이 멍이 들거나 욱신거리고, 꿈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면 출혈하는 경우도 있다.

뇌의 건강 상태는 사회적, 정치적, 생리적, 개인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이 모든 것의 복합이다. 하지만 이성(理性)이 몸을 통제한다는, 즉 뇌가 신체를 조종한다(“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이성 중심 사회에서 정신의 고장(Disorder)에 대한 편견은 심할 수밖에 없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것은 아픈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아프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Personality Disorder)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신질환자만 통제 불능, 혼란, 광기에 대한 공포로 연결된다. 난폭하고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 가장 흔한 경우는 과음한 남성이다.

자살의 이해

최근 자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염려는 이들의 죽음이 강력한 사회적 성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자살이 이토록 쉽게 수용되는 현실은, 이유가 명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들의 죽음은 현 정권이나 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나는 자살을 생명의 진화 혹은 적응이라고 생각하지만 대개 자살은 생물의 본능을 역행하는, 자연의 질서에 반(反)하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불가능에 가까운 인간 승리를 목도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어떤 일이든지 한다. 이 명제는 판단의 시차 없이 반사적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자살을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냐”라는 일상적인 표현이 있는데, 이 상황이 실제인 사람이 있다. 정말 죽고 싶은, 죽음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의 의욕이 생기는, 간절한 욕망이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방어기제, 회피, 진정한 원함(real want)에 대한 위선이나 우회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죽고 싶은 마음은 비정상이 아니다. 병의 증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증은 대단히 특이한 질병이다.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살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로 직행하지는 않더라도, 증상 중에는 자해라는 과정이 있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줄 알면서 하는 행동, 이를테면 폭식, 중독, 포기, 많은 사람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자초한다. 이 모두가 자해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죽음과 삶의 중간 상태에 있는 병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질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많이 아프고 병세가 심각하다고 해서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는 사경의 근처에서 계속 서성거린다. 경중은 그 서성거림이 하루 몇 시간인가, 얼마나 지속되는가, 자주 반복되는가에 달려 있다. 의지가 몸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불규칙적으로 반복(빈발)하고, 뇌는 이를 통제할 수 없다. 당연히 약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울증 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우울함이 아니다. 의지의 영역이 작동을 안 하기 때문에 몸은 가사(假死) 상태가 된다. 기운이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 소변을 보려고 해도 힘이 필요한데 그 기운조차 없어 배설에 어려움을 느낀다. 누워 있는데 자세를 바꿀 힘이 없어 욕창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앉아 있을 힘도 없어 유사 죽음 상태인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살아 있는 죽음(a living death)이다. 이에 비하면, 병원에 갈 수 있는 우울증 환자는 ‘축복’받은 편이다.

사회적 자살과 개인적 자살의 구분은 자살에 대한 몰이해의 첫 단계다. 관건은 증상의 심각성, 즉 예측할 수 없는 ‘의지의 출입 횟수’다. 우울증 환자는 몸을 이탈한 의지의 희롱에 시달린다. 내 몸을 내 몸의 일부가 전쟁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의 자살은 필연일 수도, 우연일 수도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우울증 환자가 아니더라도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나 일반인들도 바쁘고 힘들게 살다보면 “이렇게 살 바에야…”라는, 삶의 질과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 만한 삶’의 기준은 각자 다르다는 것을. 이것은 우울증과 우울증 아님의 차이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차이다. 삶에 대한 기대치는 천차만별이다. 환자가 생각하는 삶의 기준과 몸 상태(뇌의 기능)가 수시로 저울대에 오르고, 그 기울기가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실연, 실업, 신병(身病) 비관부터 세수하기가 귀찮아서, 고양이가 죽어서, 포스트잇이 떨어져서, 설거지가 밀려서, 온라인에서 성희롱을 당해서, 파트너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조국이 망해서, 성적이 떨어져서, 빚 때문에, 외로워서, 내 문제를 도저히 고칠 수 없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어서…. 모든 것이 실제요, 진정한 이유다. 사람들은 이유의 ‘경중’에 따라 설득하려 하거나 비난한다. “겨우 이깟 일로 죽느냐”는 힐난. 환자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좌절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해하는 이가 있다면, 자살은 멈추거나 지연될 수 있다. 전문의들은 “우울증 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기 어려운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치료는 약물과 상담, 주변의 도움과 사랑으로 신체의 대처력을 높이는 것이다.

우울증은 정신의 몰락, 정신의 부식(腐蝕)이다. 우울증은 인지와 감각의 면역력이 현저히 저하돼 몸의 적응력에 문제를 일으킨다. 옆집 휴대전화 진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예민하거나 반대로 극도로 둔감해져서 자동차 소리를 듣지 못해 교통사고를 당한다. 5월의 나른한 봄바람이 삭풍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추워서 견딜 수 없거나, 눈밭 위를 맨발로 오래 걸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빗소리, 택배기사의 벨소리, 타인의 통화소리가 굉음으로 다가온다. 칫솔질을 하는데 입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하루 6시간을 걸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며칠을 굶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다. 그래서 장애인이나 죄수가 되어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이를 시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행복, 만족, 기쁨을 느끼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비참함, 수치심, 죄의식이 24시간을 지배하고 단 한 사람도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을까? 자살의 이유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요약하면 미래가 불행하다는 확신이다. 불행에 대한 확신. 이 확신을 교정하는 인지행동 치료 등의 상담(Talking Cure)은 1시간에 최소 8만~15만원 정도 하는데, 이 비용을 1년 내내 혹은 그 이상 매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유능한 치료자’ 자체가 많지 않다는 현실이다.

원인 대신 맥락- 구조와 개인의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질병을 분자(分子)의 문제로 환원한다고 가정하면, 우울증의 열쇠는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화학물질이 쥐고 있다. 세로토닌은 분자로서 호르몬이 아님에도 ‘행복 호르몬’(Happiness Hormone)이라 불린다. 인간과 동물의 위장관과 혈소판, 중추신경계에 주로 존재하며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세로토닌은 기분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식욕, 수면, 근수축과 관련한 많은 기능에 관여한다. 사고 기능에도 관련돼 있어서 기억력, 학습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울한 사회에 대한 개인의 반응(re/action )- 투쟁, 포기, 갈팡질팡 등 다양한 행위- 이 세로토닌 생산에 얼마나 관여하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구조와 개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우울증을 만들어내는데 그 비율이 1 대 99인지 51 대 49, 37 대 63…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개발한(?) 방아쇠(Trigger) 원리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방아쇠를 당기다’는 계기, 폭파, 도화선, 촉발, 야기, 자극, 초래, 시작, 출발, 제시, 생산하다 등을 뜻한다. 반대말은 ‘막다, 예방하다’(Prevent), 그러니까 안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일어남과 안 일어남. 우리는 사랑, 질병, 사고, 죽음, 행운, 비극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리 사회구조 속의 인간이라 해도, 모든 사건은 어떤 맥락 속에서 오비이락(烏飛梨落)과 같은 이치로 등장한다. 배는 떨어질 수도 있고 안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했다면, 원인이 아니라 조건 위주로 사고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학과 생물학을 대립적으로 생각하지만 둘은 상호작용하는 하나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생물학은 사회적 환경에 적응된 생물학(Cultured Nature)이며, 몸은 사회적(Social Body)이다. 투명한 채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질병이 그러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보고와 사례, 연구 역시 모두 부분적 진실이다. 관건은 그 ‘부분’이 어느 정도인지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구조가 몇%이고, 개인의 특성·면역력·조건이 몇%인지 계량할 수 있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자살은 비정상’이 아니라 영육 간의 관계다. 인간이 할 일은 자살에 대한 발상의 전환(‘질병사일 뿐이다’)이거나, 우울증을 이해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사는 수용과 이해에 달려 있다. ‘그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다. 완치는 어렵지만 좋은 인간관계(사회구조)에 따라 자기 역량의 범위는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다.

글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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