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4.01 14:37 수정 : 2014.04.03 15:23

세트 일은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세트를 지은 이들은 촬영이 끝나면 제 손으로 그 세트를 철거한다. 허탈감은 사치다. 다른 스태프들이 버리고 간 오물과 쓰레기를 보면 분통이 터진다. 2012년 제주 묘산봉 관광지구에서 MBC 〈태왕사신기〉 세트장을 철거하는 모습.한겨레 자료
“영화를 만드는 건 영화제에 나가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혹독한 추위와 눈·비·진흙탕 속에서 무거운 장비를 운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계의 거장, 고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남긴 말이다. ‘꿈의 공장’에도 하드웨어는 있다. 이를테면 영화 세트 같은 것이다. 영화 세트 제작자에게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 세트 제작자 이대호(39·가명)씨는 말한다. “일하다 녹초가 되거나 일하다 다치는 것”이라고.

한국 영화에 새 황금기가 도래해 잔치가 한창이다. 한국 영화는 지난해 말 최초 2억 관객을 돌파했다. 세계적으로도 인도·미국·중국·프랑스에 이은 5번째 기록이다. 개봉 편수, 상영 편수, 총매출액까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극장 관람료도 올랐다. 유명 배우들의 출연료는 듣도 보도 못한 액수로 치솟고 있다. 그러나 조명은 영화계 곳곳을 비추지 않는다. 빛이 밝으면 어둠도 짙다.

제보가 들어왔다. 영화 촬영장에서 세트 벽면이 스태프 K를 덮쳐 허리가 부러졌다고. 알아보니 K는 허리 협착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아 치료 중이었다. 산재 처리에 안도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등산객이 산에서 다쳐도 기사가 나오는데, 우리는 세트를 만들다가 다치거나 죽어도 아무도 몰라요.” 제보 확인 과정에서 알게 된 이대호씨가 말을 이어갔다. 통화 상대를 붙들려는 가쁜 호흡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했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그가 또 말을 낚아챘다. “영화 세트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어요.” ‘영화 세트 제작자 옆 대나무숲’이 필요해 보였다. 대호씨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지난 3월11일 오후. 서울시청 인근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낡은 카고 바지에 점퍼를 입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손톱은 여기저기 갈라지거나 깨져 있었다. 손은 두꺼운 군살이 박혀 투박했다. 중저음의 강단 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붙잡던 패기 넘치는 사내는 없었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내가 쭈뼛거리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수다로 말문을 텄다. 대호씨의 이력은 ‘화려’했다. 유수의 흥행 영화들 세트가 그의 손끝에서 제작됐다. 그가 세트 제작자로 참여한 영화는 기자도 다 봤다. 하지만 영화 속 세트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호강시켜줬던 배우의 표정과 몸만이 생생히 재현될 뿐이었다. 이번엔 기자가 쭈뼛거렸다. 대호씨는 “영화를 볼 때 세트를 보는 관객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영화 호황 속 그늘, 죽거나 해고되거나

그는 한 대형 세트 제작사에서 세트팀장을 맡고 있다. 세트 제작 경력은 이미 15년을 넘었다. “K의 사고는 어쩌다 발생한 게 아니라, 그냥 오랫동안 되풀이되고 있는 일상이에요. 인권이나 노동을 소재로 하는 영화 현장도 다르지 않아요. 연출가 한 사람은 진보적일지 몰라도, 여러 감독들과 배우 등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하는 영화판의 특성상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관습은 변하지 않았어요. ‘꿈의 공장’은 개소리예요.” 대호씨가 씁쓸히 웃었다.

영화 스태프에게도 이른바 ‘등급’이 있다. 세트를 만드는 사람은 갑-을-병-정 중 ‘정’에 위치한다. 세트 제작자 700여 명이 방송·영화·광고를 오가며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절반가량은 프리랜서로 뛴다. 인맥과 평판이 일자리를 좌우한다. 그가 인터뷰를 가명으로 요청한 이유다.

대호씨는 고등학교 졸업 뒤 애초 꿈꾸던 일이 좌절되자 군대에 갔다. 제대 뒤 생활정보지를 뒤적이다 한 줄짜리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CF 촬영 함께 일할 사람 구함.” 특별한 기술과 자본도 필요하지 않았다. 연예인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촬영장을 찾았던 출근 첫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휴, 정말 놀랐어요! 세트를 짓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몸 전체가 하얀 먼지에 둘러싸여 검은 눈동자들만 동동 떠다녔어요.”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러오는 아내 배를 보며, 3년만 참자고 다짐했다.

세트는 목재나 석고 등으로 기본 틀을 만든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와 비슷하다. 기본 틀 제작이 끝나면 작화팀이 그림을 그려 세트를 완성한다. 현장에서는 이를 ‘간지낸다’고 말한다. 대호씨는 오야지(현장 용어로 ‘반장’을 뜻한다)의 어깨너머로 설계도 보는 법을 배웠다. 일이 몸에 익자 “손이 여물다”고 소문이 났고, 영화 쪽에 스카우트됐다. 대호씨가 경력을 쌓은 지 7년차 되는 해였다. 그사이 이직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잦은 부상과 막일꾼이라는 시선에 몸도 마음도 성할 날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꿈이 생겼다. 동네 인테리어 가게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것이었다. 돈과 경력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또 버텼다.

영화판 ‘정서’는 방송 쪽과 사뭇 달랐다. 세트 제작팀은 미술부에 속한다. 설계도면을 받아 세트 제작이 완성되면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세트 제작자들은 진행요원 한 명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진행요원은 ‘댄깡’을 해야 한다. 현장 용어인 댄깡은 연출자의 요구에 따라 세트를 변형시키는 일을 가리킨다.

“‘영화 스태프’라는 표현이 묘한 위안을 줬어요.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방송 쪽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때는 홀로 떠도는 것이 외로웠는데, 영화판은 ‘우리’라는 돈독한 동료애가 있었죠. 진행요원으로 현장에 남아 그 안에서 어울리다보면 마치 저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보람을 느꼈어요.”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스쳤다. 여리고 희미했다.

표준근로계약서, 그 처음 들어보는 이름

대호씨에게 자존감을 줬던 ‘우리’라는 단어는 서서히 변질됐다. “우리 다음에도 같이 일해야지” “우리가 남도 아닌데 깐깐하네” “우리가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미술감독·조명감독·촬영감독·영화감독 등 켜켜이 쌓인 ‘갑들’에 맞서 ‘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프리랜서로 뛰는 세트 제작자들은 일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졌다. 회사인 세트 제작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업체도 저가입찰인 출혈경쟁으로 내몰렸다.

적자생존 구조는 체념을 강요했다. 제작사들은 손해 보는 불공정 계약일지라도 ‘갑’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다. ‘제작비 쥐어짜기’로 제작사들은 직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외면한다. 악순환이다. 대호씨는 “갑의 눈밖에 나는 순간 끝장”이라며 답답해했다.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세트 제작사 정규직으로 일해도 그의 불안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영화업계 속 대호씨의 삶은 특별한 개인사가 아니다. 영화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을’들의 전형이다. 영화업계는 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3년 전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는 “(표준근로계약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대개의 일이 ‘구두’로 진행된다.

영화판 세트 제작자의 평균 일당은 ‘14개’다(현장에서는 14만원을 이렇게 부른다). 지난해 기준 건설노동자 평균 일당(14만7천원)보다 적다. 전국을 돌며 세트를 짓느라 자가용을 타고 이동할 때가 많은데 기름값은 개인 부담이다. 야외 세트 제작이 많아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폭설 등 천재지변으로 공들여 만든 세트가 무너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세트 제작자들의 옷은 더럽고 남루해요. 페인트와 각종 먼지 등으로 범벅돼 있죠. 그래서 그런지 다른 영화 스태프들이 우리를 더 쉽게 무시하는 것 같아요. 환갑이 넘은 사수가 세트장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는데,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젊은 스태프들이 담배를 버려요. 사수는 말없이 담배꽁초를 줍고, 스태프들은 또 담배를 버리고….”

대호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을 잘 못 마신다. 어쩌다 가끔 술을 마시면 벌건 눈으로 형들에게 대들었다. “형들이 만든 대로 우리가 대접받는 겁니다. 우리가 ‘쌍놈의 직업’ ‘날품팔이’가 된 것은 다 형들 때문이에요!” 그렇게 참아왔던 속울음을 토해내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 형들은 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30년 넘게 일한 형이나 그나 처우는 같다. 영화판에는 세트 제작 ‘숙련공’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이들의 또 다른 이름은 ‘5분 대기조’다. 영화판은 연출자 마음에 들 때까지 세트 제작을 비롯한 모든 행위가 반복된다. 촬영 중 진행요원이 못하는, 고난도의 세트 개·보수 요구가 들어올 때가 있다. 연출자가 부르면 새벽이든 심야든 달려가야 한다. 추가 작업에 따른 비용은 없다. 영화가 무산되면 원래 받아야 할 계약금마저 떼이는 경우도 있다. 해고 이유는 필요 없다.

“차라리 우리 앞에서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낼 수 있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감독이 뒤로 에둘러 제작사에게 민원을 넣어요. 그러면 제작사는 다음 계약을 위해 우리를 자르죠. 해고 사유요? 그런 건 없어요. 대형 제작사인 저희가 이 정도면 영세한 곳은 말도 못하게 심할 겁니다.”

영화 작업이 없을 때는 행사용 세트 제작 등 다른 현장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번다. 세트 제작 중 손에 못이 박히는 건 예삿일이다.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흔하다. 화재도 자주 발생한다. 대호씨는 왼쪽 종아리에 화상을 입었다. “정신없이 쫓기며 일하느라 옷에 불이 붙는지도 몰랐어요. 다리 밑이 뜨거워서 보니 바지가 타고 있었죠.” 대호씨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들이 만든 대로… 영화판 쌍놈이 됐다”

현장에서는 1970년대 간지를 내기 위해 석면도 사용한다.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는 석면은 사용이 금지된 발암물질이다. 마스크와 보호안경 등을 착용하고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0년 정도 일하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 된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치료받을 형편도 못 된다. 시간도 돈도 부족하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영화도 못 볼 때가 많다. 쉬는 날이 생기면 곯아떨어지기 바쁘다.

“전국을 돌며 타지에서 세트를 만들다 문득 아이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집에 전화를 걸면 아내가 깜짝 놀라요. ‘어디 또 다친 거 아니냐?’고 물어요. 그게 우리의 일상적인 인사예요.” 대호씨는 시력 저하, 허리·목 디스크 등 근골격계 질환,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다. 세트 제작자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평범한 질환이다.

영화 촬영이 끝나면 세트를 철거한다. 이를 현장용어로 ‘바라시’라고 표현한다. “처음 바라시 할 때는 허탈했는데 이젠 덤덤해요. 대신 다른 스태프들이 버리고 간 온갖 오물과 쓰레기를 보면 분통이 터져요! 어찌나 더럽고 지저분한지. 극장에서 포장된 화면만 보는 관객은 그 뒷모습을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대호씨에겐 중학교 1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있다. 세트 제작으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그의 보람이다. 요즘 그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세트 제작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 바닥이 워낙 좁고 열악해 퇴출에 대한 두려움도 크고요.”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지는 건 없지만, 그조차 하지 않으면 대호씨와 가족의 인생이 무너진다. 그가 얘기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다. 모두 잘못된 관행의 문제는 알지만, 차마 입 밖으로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하지만 처우를 개선하려면 ‘스스로’ 문제를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영화판 내 다른 업종의 경우 대부분 그들을 대변하는 협의체가 있다. 영화 세트 제작자들은 그 흔한 친목모임 하나 없다. 스스로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 일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하는 것도 목소리를 내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대호씨는 분석했다. 그는 “처우를 개선해 평생 일터로 만들기보다는 같은 액수의 돈을 벌 수 있다면 현장에서 탈출하고 싶어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가명이지만, 해고 위험을 감수하고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대호씨가 답했다. “영화 속 세트를 짓는 건 영화의 처음과 끝입니다. 우리를 일하다 다치거나 죽어도 되는 사람, 다른 영화 스태프들이 막 하대해도 되는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게 답답했습니다.”

스크린 속에는 ‘그런 사람’의 속울음이 숨어 있다. 한국 영화가 전례 없는 호황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 열매가 ‘등급’에 따라 내려오고 있다. 대호씨의 삶이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다.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비전은 무기력을 낳는다. 영화산업이 발전할수록 숙련공이 필요하지만, 많은 이들이 숙련공이 되기 전에 떠나려 하거나 이미 떠났다. 대호씨가 물었다. “한국 영화의 성공은 마치 모래 위에 성을 쌓아올린 속 빈 강정 같아요. 우리 같은 스태프들의 합리적인 처우 개선이 없다면 한국 영화산업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는 가장 영화인다운 물음으로 말을 마쳤다.

글 김은성 객원기자 frame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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