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5:52 수정 : 2014.03.30 14:15

전지현은 누가 뭐래도 아름답지만, 배우로서의 역량은 미완성에 가깝다. 10여 년 전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구축된 이미지와 캐릭터가 <도둑들>과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여전히 소비되는 건 그 때문이다.씨네21 오계옥
제자 하나가 부처에게 물었다. 세상에 진리는 하나일진대 웬 부처가 그리도 많으냐. 부처, 물끄러미 제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대답한다. 세상 사람들 생겨먹은 게 제각각이라 부처도 그리 많다. 진리는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모든 게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각각의 생각들을 모아 하나로 모양을 만들 때 자기를 중심으로 헤쳐모여 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다투고 격을 둔다. 그러므로 세상이 편해지는 길은 모든 사람이 생각의 중심에서 자기를 지우는 것이다. 자기를 지우고 나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이고, 하나가 모든 것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종종 매직아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 역시 그렇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들여다볼수록 부아만 돋는다. 몇 차례 진지하게 시도해봤지만 안 된다. 눈에 힘이 많아 초점이 허공에 머물지 못한다. 내 눈은 자기주장이 강한 탓으로 늘 어떤 시선으로 사물을 대하는 모양이다. 부처가 세상을 보고 진리를 꿰뚫는 눈은 초점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봄(示)에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저 내 머리로 보려고만(見) 한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부처일 텐데, 난 내 눈에 맞는 부처만 찾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중심이 확고할 것처럼 믿고 있는 내 눈이 믿음직스럽게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촐싹거린다는 데 있다. 당연하다. 깜박하지 않고 한곳만 쳐다보고 있자면 눈물나게 아프고 따가운 게 눈이다. 그런데도 난 한곳만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다. 자기에게는 분명한 신념과 기준이 있어, 그 생각은 일관되고 투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그곳밖엔 생각지 못한다.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산사의 공안처럼, 자기가 흔들리고 있음에도 눈에 드는 것은 흔들리는 세상이다.

전지현은 아름답다. 무수하게 많은 여배우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미인 소리를 듣지만, 전지현의 아름다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적어도 우리 문화의 어떤 국면에서 대명사의 지위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에 대한 기억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정의가 되었으며, 어느 컬러 프린터 광고에서의 몸짓은 우리 대중문화에 ‘몸’이라는 어휘를 새로 쓰게 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아름답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내겐 흔들림으로 보인다. 아마 내가 흔들리는 탓이겠거니 생각하지만, 어쨌든 내 눈에 그녀는 외곽이 뚜렷한 쨍하고 날카로운 이미지가 아니라, 흔들린 사진처럼 겹쳐진 이미지, 그로 인해 애매해진 그림으로만 보인다. 가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상찬하고 숭배하는 주변의 시선을 좇아 그 미학적 매혹을 즐길 수 없음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지현이라는 매직아이는 내게 제대로 된 그림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못된 고집, 일부가 그렇듯 나 또한 ‘배우’라는 이름에 집착해 그녀의 연기를 평가하느라 그 아름다움을 애써 무시하는 탓이리라. 하지만 그 집착과 고집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혹시 타인의 기준과 상충되거나 격이 질 수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 또한 하나의 시선이며 시각일 수 있음을 허락받고 싶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재능이며 힘이라는 점을 100%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연기하는’ 배우의 역량 전부라고 할 수 없고, 배우를 보는 즐거움은 오직 그 몸과 얼굴의 ‘아름다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영화 <도둑들>에서의 그녀는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SBS)의 천송이는 즐겁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도둑들>과 <별에서 온 그대>의 성공이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역량이 완성됐음을 입증할 수 없음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도둑들>이나 <별에서 온 그대> 모두 <엽기적인 그녀>의 연장선상에서 이미 구축된 이미지와 캐릭터를 소비하고 있으며, 그 이미지를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는 여전히 세기에서 거칠고 모자라기 때문이다.

1609년 8월25일 강원도 강릉에 내린 도민준은 천송이에게 ‘세상이 정지된 순간들’ 속에서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은 400년을 지나 천송이라는 ‘배우’로 인연의 끈을 잇는다. 전지현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것 또한 ‘세상이 정지된 순간’이었다. 아마 <엽기적인 그녀>를 영화관에서 소비한 세대라면 그 컬러 프린터 광고에서 그녀가 휘두르던 긴 팔과 순간 정지된 화면에서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던 땀방울을 기억할 것이다.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KBS)에서 준호는 순신에게 ‘노출’에 대해 언급하며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고려하라고 말했다. 전지현에게 이 정지된 짧은 순간은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얻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깨달음은 찰나의 일이지만 그것을 지키는 일은 지속된 시간 속에서 이뤄지는 지난한 노력과 수행의 과정이다. 예전에 이라는 단편드라마에 ‘삼푸의 요정’이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빛과 소금’이 같은 제목의 노래를 드라마에 삽입해 인기를 끌었다. 내용은 저녁 8시30분이면 어김없이 방송하는 샴푸광고 모델을 사랑하게 된 청년이 실제 그녀와 연을 맺게 되는 이야기다. ‘빛과 소금’의 노래는 이렇다. “네모난 화면 헤치며 살며시 다가와 은빛의 환상 심어준 그녀는 나만의 작은 요정 (중략) 멀리서 나 홀로 바라보던 그녀는 언제나 나의 꿈”. 전지현의 이미지는 15초 짧은 상업적 영상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이름을 주었지만, 한편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족쇄이기도 했다. 그녀는 광고 속 샴푸의 요정처럼 ‘꿈’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라는 꿈은 소통하고 공감을 얻는 희망이나 바람이 아니라, “이른 아침 안개처럼 내게로 다가와 너울거리는 긴 머리 부드러운 미소로 속삭이는” 그야말로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꾸는 덧없음이다. 어차피 배우의 이미지란 관객과의 계약으로 나눠가진 공감된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연기’라는 구체적인 표현과 소통의 실천에서 그것은 ‘실재성’ 혹은 ‘진정성’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고 그 감수성을 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전지현의 위치는 ‘아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고, 지금의 성공은 완성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에게 지금은 어쩌면 선물과 같은 또 다른 순간이다.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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