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5:50 수정 : 2014.03.07 15:04

전지현은 데뷔 때부터 ‘가장 강력한 광고 모델’이었지만 오랫동안 ‘인상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15년이 흐른 지금, 그녀가 순수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비련의 여주인공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생겼다.SBS 제공
“전지현은 특이하다. 공효진보다 예쁘고, 이나영보다 철없고, 수애보다 사악하고, 송혜교보다 건강해 보이며, 김태희보다 표현력이 풍부하다.” -HS애드 시니어 카피라이터 정성욱

“내 맘속에 끌리는 연예인만 나오면 귀신같이 성형 전 사진을 들이밀던 아내가 전지현에게만은 조용하다.”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그녀의 대표작은 여전히 ‘모호’하다. <엽기적인 그녀>가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지만, 그건 벌써 13년 전 일이다. 그다음 생각나는 <해피투게더>는 아예 20세기 작품이다. 최근작 <도둑들>과 <베를린>에서 그녀는 분명 의미 있는 ‘진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아직 온전히 그녀의 것은 아니다.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연기보다는 상대 배우의 ‘발전’을 더 흐뭇해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별그대>의 그녀가 400년 전에서 왔다는 도민준의 정체성보다 훨씬 낯익다고까지 말한다. 천송이는 13년 전 ‘그녀’의 현재처럼 보이기도 하고,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을 ‘예니콜’의 연예인 버전 같기도 하다. 또 어떤 때는 <시월애>의 그녀가 그냥 거기 살고 있는 듯도 하다. 그렇다. ‘그녀’는 늘 ‘그녀’ 같고, 그 ‘그녀’ 같음의 문법은 ‘그녀’의 긴 생머리가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고집스럽게 일관됐다.

하지만 이 모든 익숙함과 낯익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최고다. 단순히 최고라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그녀의 오늘은 살아서 세기를 건너온 어떤 유물처럼 보일 정도다. 한국 사회에서 ‘아우라’라는 표현은 어쩜 그녀를 위해 준비됐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전지현 이후 모든 여성은 어떤 지점에서든 그녀를 의식했고, 그녀를 좇았고, 궁극적으론 누군가에게만큼은 그녀로 존재하길 바랐다. 한때 세상 모든 남자가 그녀를 좋아했고, 그 감정이 다소 희미해진 경우에도 어떤 대상을 향해 ‘예쁘다’는 칭호를 써야 할 땐 그녀와의 비교급을 만들었다. ‘전지현이 예뻐, 내가 예뻐?’라는 질문은 고약하고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 가운데 그녀보다 더 인기를 끌었던 스타는 있었지만, 그녀만큼 지속적으로 동경됐던 대상은 감히 없었다고 말해도 좋다. 그녀가 오랫동안 딱히 ‘인상적인 배우’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광고 모델’이었고, 모든 상품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기이한 힘을 보여줬다. 그녀의 영향력은 개인적 매력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여성의 한 원형으로 군림했고, 세월의 흐름이 무색하게 여전히 그녀는 한국 사회의 ‘워너비’다.

돌이켜보면, 1999년 강렬한 테크노 춤에서 시작된 그녀의 시대는 대중문화가 더 이상 ‘텍스트’ 시대가 아닌 완전한 ‘이미지’ 우위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여전히 그녀를 따라다니는 ‘빈약한 필모그래피’와 ‘부족한 연기력’ 논란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대중문화의 독법이 어떻게 바뀌어갔는지 말해주는 것이다. 그녀의 등장 시점은 이른바 ‘뮤직비디오’ 시대의 개막과 겹친다. 대략 그녀의 등장을 기점으로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패턴도 바뀌었다. 이전의 대중문화 소비가 내용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면, 1990년 말에 이르러 그것은 보는 것으로 전환됐다. 매체적 변화와 흐름의 변곡이 급격하게 함께 이뤄졌다. 우연찮게 그 시점에 그녀는 ‘테크노’라고 하는 당대 가장 핫한 트렌드와 뮤직비디오보다도 짧은 15초짜리 영상으로 등장했다.

그 강렬한 리듬과 현란했던 동작은 여전히 그녀의 이미지에 잔상으로 남아 있다. 다소 부진했던 시기, 그녀는 그 잔상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듯 보였다. 관객의 반응과 평단의 호응 모두 실패한 몇몇 영화에서 그녀는 부단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지만, 대중은 그런 그녀를 오히려 낯설어했다. 그러곤 계속 그녀의 역동성을 1999년 그 광고로 회귀시켰다. 그 한 컷에서 그녀는 가장 완벽한 피사체였고, 그 완벽성을 굳이 다른 것으로 덧칠하지 않아도 좋다는 신호를 대중은 계속 그녀에게 쏘아보냈다.

그렇게 15년이 넘도록 대중은 그녀의 작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녀의 이미지 자체를 수용하고 있다. 이건 매우 진귀한 일이다.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들조차 여전히 그녀를 말하고, 지지하건 지지하지 않건, 모두에게 그녀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근원은 그녀가 쌓아온 세월이라기보다는 그녀가 등장했던 시점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했던 데뷔와 오래 부진했던 활동 사이에서 대중은 후자가 아닌 여전한 전자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그녀라도 세월이 예외를 주진 않는다. 신이 그녀의 시계만 멈춰두도록 해주지 않는 이상 기억은 닳아갈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오랜만에 돌아와 여전히 철이 없지만 어찌됐든 세상의 이치에 조금 닳은 ‘누나’가 되었고(<도둑들>), 아예 현실과의 수월한 타협을 갈망하는 ‘아내’가 되기도 했다(<베를린>). 하지만 여전한 천송이를 보며, 이건 그녀의 변화라기보다 그녀를 지지했던 이들의 현재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 시절의 연인 이정재와 “잘생겼다”를 외치며 앙증맞은 댄스를 선보이는 그녀에게서 아직 1999년의 그 완벽한 성적 매력과 카리스마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촌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에게서 이제 기회가 된다면 순수하지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비련의 여주인공도 할 수 있겠다는 신뢰도 갖게 된다. 그녀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보인 이정재가 <신세계>와 <관상>을 통해 ‘그’라고 표상되던 이미지와 화해하며 다시 동시대의 배우로 귀환한 것처럼, 다시 활동이 잦아지기 시작한 그녀 역시 가장 빛나던 아우라와 화해하고 또 배반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뭐래도 나는 전지현의 세계에서 살았음을 인정하고 딱 한 명 ‘마담 코리아’를 꼽아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이름을 대겠다. 우리 세대의 그녀, 전지현.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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