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5:44 수정 : 2014.03.30 14:14

1. 역사의 기록

노나라 곡부를 떠나 제나라 수도 임치에 도착한 공자는 이로부터 약 7년간 망명(또는 유학) 생활을 했다. 나이로는 36살부터 43살까지, 연대로는 노소공이 출국한 이듬해(서기전 516년)부터 노소공이 사망한 이듬해(509년)까지였다. 이설도 있다. 공자의 망명 기간을 1~2년 정도로 짧게 보는 견해, 노나라와 제나라, 주나라 등을 오가며 생활했다는 설, 망명 시기를 10여 년쯤 뒤로 잡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어느 것도 정설이라고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노소공의 출국이 공자 망명의 계기였다면, 노소공의 사망을 공자의 귀국 계기로 보는 것이 당시 공자의 언행과 정치 현실 등으로 보아 사리에 맞다. 비록 불학미거(不學未擧)한 짐꾼 늙은이지만, 나, 이생 역시 이 다수설이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여긴다.

망명 기간보다 더 이설이 분분한 것은 공자의 행적이다. 공자가 유력자의 힘을 빌려 벼슬을 얻으려 했다는 설과 공자가 제나라 임금에게 정치철학을 설파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공자 같은 성인이 그럴 리 없다는 시각에서 부정당하고, 후자는 공자 같은 성인이라면 당연히 그렇다는 시각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더 나아가 공자는 과연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문장의 행간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림의 여백이 더 많은 풍경을 담고 있기도 한다. 위대한 인격으로서 공자의 이 시기도 많은 부분 역사의 빈칸 속에 있기에 문장의 행간처럼, 그림의 여백처럼 아련히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지 모른다.

아무튼 정보가 부족한 대로 공자의 행적을 어느 정도 가늠해보도록 해준 것은 한 역사가가 남긴 기록이다. 공자가 죽고 300여 년 뒤에 태어나 활동한 이 역사가는 여러 전적을 열람하고 직접 곡부를 방문해 취재한 결과를 토대로 공자의 전기를 작성했다. 그 가운데 제나라 시절을 묘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노소공이 친위 쿠데타에 실패한 뒤 계평자에게 쫓겨)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살도록 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노나라에 난이 발생했다. 공자가 제나라로 가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경공(景公)과 접촉하려고 했다. (공자가) 제나라 태사와 음악을 두고 얘기했는데, ‘소’(韶) 음악을 듣고는 그것을 배우느라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여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정녕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서 먹을 수 있겠소!”

다른 날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정치의 관건은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경공은 기뻐하며 이계(尼谿)라는 밭을 주어 공자를 봉하려고 했다.

안영이 진언하여 말했다.

“유학자는 해학으로 말재주를 부리지만 법으로 그를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거만하고 스스로 멋대로 해도 그를 아랫사람(신하)으로 삼을 수 없으며, 그는 상례(喪禮)를 숭상하고 슬픔을 다한다면 가업을 탕진하면서까지 장례를 후하게 치르니 그들의 예법을 습속으로 삼기 어렵고, 유세 다니며 관직을 구하고 녹봉을 취하니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옛날의 어진 사람이 사라진 이래 주나라가 쇠미해졌고 예악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와 복식을 추존하고 번잡스러운 예절만을 따지고 세세한 절차만을 따르고 있으나 그것은 몇 세대를 지나도 아마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 동안 그 예법을 마칠 수도 없습니다. 군주께서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 풍속을 바꾸려 하신다면 이것은 백성들을 먼저 인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뒤 경공은 공손히 공자를 만나고도 그에게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이 공자를 머물게 하고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계씨처럼 예우하는 문제는 할 수 없는 일이오.”

이에 공자에게 계씨와 맹씨 중간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공자도 이 소식을 들었다.

경공이 말했다.

“나는 늙었으니 당신을 등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공자는 드디어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사기> ‘공자세가’

2. 가공(架空)의 신화들

사마천이 쓴 이 전기에서 제나라 시절의 공자 행적을 가늠해볼 수 있는 팩트를 추려보면 이러하다.

-고소자라는 유력한 세력가의 가신으로 들어갔다.

-고소자를 통해 경공과 접촉해 벼슬을 얻고자 했다.

-음악에 푹 빠졌다.

-제나라 임금을 만나 감복시켰으나 등용되지는 못했다.

-제나라 대부들이 해치려 하자 이를 피해 귀국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절 공자에 관한 기록들은 대부분 사실 여부를 놓고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실 여부보다는 신념의 수호가 더 절실한 시대에 후학들이 공자를 존숭하기 위해 미화·가공한 것이 많았던 탓이다. 앞에 열거한 ‘사실’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세한 분석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표적인 한 가지만 거론하겠다. 공자가 제나라 임금인 경공을 만나 정치철학을 설파했다는 대목이다.

공자를 존숭코자 하는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믿기 어려운 만남이다. 당시 제나라 경공은 50대 중·후반의 나이에 재위한 지 이미 31년째인 임금으로 동방의 패자를 자임하던 터였다. 게다가 60대의 노련한 정치가로서 당대 제일의 현상(賢相) 소리를 듣던 안영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대부도 아닌 무명의 노나라 사인(士人)을 초청해 정치철학 강의를 들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물론 만남의 설정이 가공이라고 해서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공자의 말까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옳은 접근 방법이 아니다. 당시 제나라의 정치 상황은 충분히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았”다. 이상적인 정치에 대한 신념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정명론(正名論)은 당연한 귀결이며 당당한 웅변이었다. 우리가 당시 상황을 사려 깊게 살피고 판단할 진정한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지점이야말로 공자 행적을 좇는 자의 올바른 출발점이다.

3. 망명객의 일상

공자라는 위대한 인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공마저 불사하는 존경심도 중요하지만, 공자 역시 성인이기에 앞서 사람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낯설고 물선 이국 땅에 가면 인간이면 누구나 어려움을 느낀다. 만약 당신이 미국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면 무엇이 가장 절실했을까? 더욱이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자신을 돌봐줄 기관이나 단체도 별반 없다면? 아마도 가장 효력이 좋은 것은 현지에서 바로 통할 수 있는 추천장이나 소개장일 것이다. 노나라에서 신진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공자가 소개장을 들고 명망가를 찾아가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다. 유세객이 유력한 경대부에 의탁해 자신의 경륜을 세상에 내보이려는 것 자체는 결코 흉이 아닌 시대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유력자의 식량이나 땔감을 축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자로를 비롯한 붕우들은 공자가 벼슬자리를 얻는 데 부담이 되지 않도록 더욱 구직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임치의 중심가인 장가(莊街)의 학부 근처에 학당을 열었을 수도 있다. 수준 높은 예교 전문가가 임치에 왔음을 알리는 간판을 옥가(獄街)의 객잔(客棧)에 내걸었을 수도 있다. 뛰어난 육예(六藝) 교사이자, 오례(五禮)에 해박한 유자(儒者)가 학당이나 의례상담소를 운영하는 것은 품위를 유지하며 생계도 유지하는 훌륭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생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 허랑방탕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애초의 목적에 집중할 것이다. 공자가 임치에 온 계기가 무엇인가? 소공의 망명에 대한 공분(公憤)이었다. 따라서 소공의 환국복위(還國復位)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는 활동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활동이 비밀스러워야 한다면 겉으로 드러난 공자의 모습은 유학생 겸 유세객으로서 견문과 식견을 넓히는 일에 비상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남는 시간을 공자는 자신을 위해 썼다. 공자는 문화인이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관심 분야를 하나씩 섭렵해갔을 것이다. 음악 애호는 아주 유명했으니 차치하고, 장옥지간(莊獄之間)의 유수한 서점가에서 키가 큰 노나라 유자를 발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중국 여러 나라의 시문을 읽고, 사록을 뒤지고, 예론을 수집했다. 훗날 이뤄진 시서예경(詩書禮經)의 편찬도 어쩌면 이때 싹텄는지 모른다. 공자는 그렇게 목간죽편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가 지면 비슷한 처지의 유세객들과 주루(酒樓)에 마주 앉아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역사와 철학, 문학을 논했을 것이다. 후세의 유자들이 바라는 바든 아니든, 이것이 임치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던 젊은 날의 공자가 아니었을까?

4. 가려진 행적들

이 시기 공자는 여행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나라에 있을 때는 임치 일대와 석문(石門) 등 여러 지방을 돌아봤다. 진(晉)나라에서도 꽤 머물렀던 듯하며, 주나라 도읍지 낙양과 정나라 등지도 여행했던 것 같다. 훗날 자로가 초나라 접경지대에서 장저와 걸닉이라는 은자를 만나 나루터를 물었을 때, “나루터야 (벼슬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당신 선생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미자’편 6장)라는 비아냥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로 미뤄보면 멀리 남방의 초나라까지 내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주나라 서왕 집단이 동왕에게 패해 대거 초나라로 이동한 때가 공자가 제나라에 온 서기전 516년인 것도 공자의 행로와 관련해 특기해둘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공자의 행적과 관련해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노소공의 움직임이다. 망명정부의 방침이나 노선이 망명객들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소공의 동선 속에서 공자의 그림자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7년간의 공자 행적을 소공의 움직임과 연관지어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전 516~515년(망명생활 1~2년차)

노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한 뒤 공자도 제나라에 머물다 진나라로 떠나기 전까지이다. 사마천의 전기 속에 나타난 제나라 시절의 행적은 대체로 이 기간에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514~513년(망명생활 3~4년차)

515년 말이나 514년 초 무렵 소공이 자신을 홀대하는 제경공에 불만을 품고 진나라로 갔다. 이때 많은 노나라 사람들이 망명정부를 따라 진나라로 갔는데 공자 일행도 이 대열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무렵 공자가 진나라에 체류했음을 시사하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위헌자가 단행한 인사에 대한 공자의 평가와 진나라가 형법을 반포했을 때 이를 덕치에 어긋난다고 비판한 공자의 말이 후세에 전해졌는데, 진나라로 간 소공이 머문 간후라는 읍이 바로 위헌자의 영지였다. 공자가 소공 일행을 쫓아 진나라로 옮겨갔기에 진나라 사건에 대한 언급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512~511년(망명생활 5~6년차)

망명생활 5년째인 512년 노나라 운읍과 진나라 간후를 오가던 소공이 군주로서 신망을 잃고 망명정부마저 사실상 해산 상태에 들어가자 지지자들이 대거 흩어졌다. 이때 공자 일행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기로 한 듯하다. 외국을 두루 여행한 공자 일행은 오가는 길에 곡부에도 들렀을 것이다. 소공과의 줄다리기에서 사실상 승리한 계평자는 어떻게 해서든 소공을 귀국시키려 했고 거의 성사시킬 뻔하기도 했다. 따라서 망명정부 및 그 지지자들에 대한 계씨 정권의 경계심도 상당 부분 완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인 포섭정책(총신이 된 양호의 책략일 것이다)이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시기였다.

-510~509년(망명생활 7~8년차)

망명 7년째인 510년 진나라 간후에서 소공이 죽었다. 계평자는 세자 대신 소공의 동생인 정공(定公)을 옹립했다. 동시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소공의 총신인 자가자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탕평책을 실시해 자신이 공위(空位) 시대를 평화적으로 종식시켰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한 승자의 선전술이었다. 이듬해 7월 소공의 장례가 노나라 감읍에서 거행됐는데, 소공의 묘역이 역대 임금들의 묘역과 분리된 데 많은 사람들이 공분을 느꼈다. 훗날 사공(司空)이 된 공자가 처음으로 착수한 일이 이 묘역의 재정비였음을 볼 때, 공자도 장례식에서 울분을 느낀 사람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공자는 서기전 516년 망명해 소공이 사망한 510년 망명생활을 사실상 청산했으며, 이듬해 소공의 장례식을 계기로 완전히 귀국했다고 본다.

5. 행간과 여백

나, 이생이 주장하는 공자의 행적이 전부 사실이거나, 근거가 분명하다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당할 근거 또한 없다고 말하고 싶다. 위대한 인격으로서 공자를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눈 밝은 이가 나타나 선생님의 행적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고 사실을 명쾌히 드러내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공자가 이 시기에 무엇을 하고자 했고, 또 실제 무엇을 했든 이때의 견문과 체험은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임치는 당시 전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였다. 통찰력과 감수성이 강한 젊은 지식인이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에서 아무런 지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걸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술이’편 13장

공자가 남긴 이 감탄사에서 그가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망명이란 중대한 결단이다. 공자는 그 결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로서 출사의 정당성을 찾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자는 인격을 닦고, 행동규범을 정비하고, 학문적·정치적 사유를 심화해나갔을 것이다. 이 시기가 공자 인생의 결정적 시기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공자가 더욱 크고 넓은 시야로 자신을 연마하는 기회였던 것만큼은 틀림없을 것이다.

훗날 노년의 공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불혹’(不惑)이라는 말로 이 시기를 회고했다. 망명이란 결단은 중대한 삶의 전환점이었고, 7년의 망명생활은 그 삶의 좌표를 확정하는 단련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도 한 사람의 인간. ‘더 이상 흔들림이 없다’는, 불혹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숱한 불안과 마주쳐야 했을 것이다. 북방의 흙먼지, 남방의 빗줄기 속을 정처없이 걸을 때는 출사에 실패한 선비의 비애를 느꼈을지 모른다.

“사십 오십이 되어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하였거늘….” -‘자한’편 22장

그럼에도 공자는 출사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말한들 무슨 상관이랴.) 출사를 희망했던 망명 시절뿐 아니라 귀국한 뒤에도 공자는 정치 참여를 거부했다. 오히려 정치와는 더욱 거리를 두며 혼신을 다해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공자가 교사로서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바로 망명을 마치고 돌아온 ‘그 후 10년’이며, 그 시기가 또한 ‘불혹의 시대’와 겹친다는 사실이야말로 행간과 여백으로 가득 찬 공자의 잠룡(潛龍) 시대를 여는 문이라고 생각한다.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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