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4 14:20 수정 : 2014.03.04 17:31

디즈니 제공
외화와 애니메이션을 볼 때 ‘더빙판’ 챙겨보시는 분? 십중팔구 자막판을 선택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더빙이 원작을 훼손하거나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부정적 인식이 대중의 뇌리에 박혔다. 지난해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TV에서 해주는 외국영화란?”이라는 물음에 “입과 말이 따로 노는 것”이라고 우스꽝스럽게 정의(?)했던 장면에 공감한 이들이라면 특히 그렇다. 방송사에서 외화 비중을 줄이고, 케이블과 인터넷을 통해 자막으로 외화를 소비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성우의 더빙 연기는 찾기 어렵게 됐다.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라디오 드라마마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970~90년대 <맥가이버> <전격 Z작전> <소머즈> <600만불의 사나이> <레밍턴 스틸> 등을 보며 성장한 세대조차 자막에 길든 지 오래다. 이제 대중은 성우와 더빙보다 자막에 익숙하다.

성우. 말 그대로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배우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인물과 성격을 재창조하고, 관객과 교감하는 역할을 한다. 등장인물의 외형적·내면적 특성을 찾아내 목소리만으로 인물을 표현하기 때문에 ‘연기력’이 관건이다. <600만불의 사나이>와 <맥가이버>의 인기는 베테랑 성우 양지운과 배한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개봉 뒤 지난 2월까지 관객 900만 명을 돌파했다. ‘애니메이션=어린이용’ 등식을 깨고 성인 관객이 대거 극장을 찾은 것이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거기에 ‘수준 높은 더빙’ 입소문이 보태지면서 일부러 더빙판을 찾거나, 자막-더빙 순으로 관람하는 사람도 있다. 그 주역은 박지윤(안나), 소연(엘사), 장민혁(크리스토프), 최원형(한스), 이장원(올라프) 등 쟁쟁한 성우들이다. 지난 2월24일엔 정식으로 더빙판 OST가 출시됐다. 안나와 올라프의 노래만 빼고, 나머지는 뮤지컬 배우들이 따로 불렀다.

“피부에 양보하세요~” 그 목소리 안나역 박지윤

“지금의 모든 상황이 어리둥절해요. 얼굴 드러내는 직업이 아닌데, 인터뷰 요청도 들어오고.”

지난 2월14일 서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박지윤(36)씨를 만났다. 그의 첫 반응은 “얼떨떨하다”였다. <겨울왕국> 출연 이후 ‘갓지윤’이라 불릴 정도로 요즘 가장 ‘핫’한 주인공이다. 다른 배역들과 달리 목소리 연기 외에 <같이 눈사람 만들래?>(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태어나서 처음으로>(For The First Time In Forever), <사랑은 열린 문>(Love Is An Open Door)의 노래까지 직접 소화해 놀라움을 안겼다. 사족을 붙이자면, TV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안나를 연기한 박지윤씨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는 점에서 극중 안나와 빼닮았다. 목소리뿐 아니라 노래까지 직접 소화한 그는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성우다. 박지윤씨의 아버지는 탤런트 고 박용식씨로 지난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겨울왕국>은 아버지가 하늘에서 준 선물 같아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이라고 말했다.한겨레 박승화
<클로이의 요술옷장>의 클로이, 화장품 광고 속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도 박지윤의 목소리다. 귀엽고 맑은 음색이 장점이자 매력이다.

인기를 실감할까. 그는 “10년을 성우로 살면서 이렇게 주목받은 경험이 처음이라 신기하다”며 까르르 웃었다. 이내 쑥스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 모습이 엘사 여왕 즉위식 날, 한스와 우연히 만났을 때 설렌 듯 수줍게 웃는 ‘안나’와 닮았다. 가녀린 체구이지만, 강단과 신념으로 가득 찬 외유내강형이라고 할까. 영화 속 안나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마법이 두려워 왕국을 떠난 언니 엘사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현실의 박지윤은 어떨까?

“글쎄요. 이 작품을 하기 전까지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라 지난해 가을 이후엔 작품을 쉬었어요. 지금은 의욕 충만이에요. 일할 때, 행복해요!”

지난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4월에 둘째를 낳았어요. 몸 회복이 더뎠고, 정신적으로도 우울했어요. 아이 둘을 키우느라 정신없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아버지의 죽음 여파가 컸어요. 둘째 백일 즈음인 8월에 갑작스레 돌아가셨고, 얼마 안 가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셨죠.”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그의 아버지는 1980년대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한참 동안 연기 활동을 접어야 했던 ‘불운의 탤런트’ 고 박용식씨다.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촬영하다 유비저균에 감염됐다. 7월 말 응급실에 실려갔고, 10여 일 만에 사망했다. 뒤늦게 연기 활동에 한창이던 터였다. 그에게 아버지는 ‘지독한 효자’ ‘성실 가장’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오랜 기간 활동을 못해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때도 내색한 적이 없으세요. 참기름을 팔아 가족을 부양할 정도로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분이셨어요. 가정적이셨고, 저를 참 예뻐하셨어요. 저,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오빠, 남동생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던 즈음에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몰랐어요. 딱 5년만 더 사셨으면 좋았을걸….”

그는 아버지의 외모와 재능,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웃음) 아버지는 제가 성우를 하겠다고 할 때 반대하셨어요. 이 바닥이 얼마나 힘든데, 굳이 들어와 맘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얌전히 있다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기 바라는 마음이 크셨던 거죠. 그렇지만 제가 성우 활동을 시작한 뒤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해요.”

그토록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어떻게 <겨울왕국>에 참여하게 됐을까.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 인정상 했다고 해야 할까…. 신인 때부터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에드원 박원빈 감독님이 <겨울왕국> 한국판 총연출이었는데, 오디션을 제안하셨어요. <공주와 개구리>의 샬롯, <라푼젤>의 라푼젤 때도 챙겨줬던 분이어서 나 몰라라 할 수 없었어요. 참 고마운 분이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오디션을 안 봤으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어요.”

노래는 어떻게 부르게 되었을까.

“별도 오디션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박 감독님이 지원해보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지윤씨가 됐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열심히 할게요’라는 말부터 튀어나오더라고요. <겨울왕국>은 노래 비중이 많아요. 노래 녹음에만 이틀이 걸렸어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이전부터 노래와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었거든요. <라푼젤> 때 플린 라이더 역의 위훈 선배가 노래도 함께 하는 걸 보고 부러웠어요. <겨울왕국>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선물 같아요. ‘진짜 연기를 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일에 대한 재미와 보람도 이전보다 더 커졌고요.”

그의 목소리는 요즘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넛잡: 땅콩 도둑들>의 앤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셀레스틴 목소리 주인공도 박지윤이다. 성우가 되는 게 꿈이었는지 물었다. 손사래를 쳤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음악학원을 차리려고 학원 강사부터 시작했는데, 제 적성에 맞지 않더라고요. 뒤늦게 성우 공부를 시작했고, 힘들게 성우가 되었죠.”

‘2년 계약직’ KBS 성우 공채… 250 대 1 경쟁률 뚫어

성우가 되려면 우선 방송사 공채라는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매년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지만, 방송사를 통틀어 선발 인원은 평균 15~16명(KBS 12명, 투니버스·대원방송·EBS·대교방송 등 약간 명)에 불과하다. MBC의 경우 수년째 공채를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부심 하나는 대단하다. 위계질서도 엄격하다. 연령 제한이 없어 10년 이상 준비하는 이들도 있고, 몇 해 전엔 40대 중반의 여성이 지원한 적도 있다.

4전5기. 박지윤씨는 2005년 KBS 정기 공채 31기 성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여성 6명 모집에 150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앞서 KBS 한 번에 MBC·투니버스·EBS 성우 시험에서 낙방한 적이 있는데다 지원자들이 워낙 쟁쟁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뽑힌 것도 신기했는데, 일할수록 저랑 잘 맞는 직업이어서 후회 없어요. 재미있고 지루할 틈이 없어요.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해요.”

성우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목소리 톤보다는 연기력이 우선이란다. “지금은 옛날처럼 미성 혹은 호탕한 음색을 선호하지 않아요. 불쾌감만 안 주면 되죠. 배우와 달리 옷이나 표정이 아니라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희로애락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력이 점점 중시되고 있어요.” 이근욱 한국성우협회 회장의 설명이다.

힘들게 성우가 된 뒤에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성우의 수련은 방송사 전속기간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이뤄진다. ‘진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반면, 성우 개개인의 장점을 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제가 데뷔한 1970년대만 해도 10년 전속이었고, 점점 기간이 줄었습니다. 지금은 2년 전속인데, 비정규직법 때문이라더군요.1 전속기간이 끝나면 좋든 싫든 프리랜서가 됩니다.” 이근욱 회장은 “협회가 회원들을 위한 보컬 트레이닝 과정 등을 개설·운영하는 건 이런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성우의 출연료는 천차만별이다. 공채 뒤 전속기간 때는 방송사 규정에 따라 일정 급여를 받지만, 그 뒤로는 경력과 인지도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 한 편 출연에 대개 300만~500만원 수준이고, 인기 성우의 경우 1천만~2천만원을 받는다. 러닝개런티는 없다. 방송용 외화와 달리 극장판은 개인별로 4~5시간 남짓 따로 목소리를 녹음해서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TV용 외화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20~30분 만에 1회 녹음이 끝나는데, 출연료는 방송사 규정에 따른다. 임금노동자가 보기에는 녹음 시간에 비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빠르게 활동 영역이 축소되면서 출연 기회 자체가 절대 부족하다는 것이다. 성우 대신 개그맨, 탤런트, 아이돌 가수 등 유명 스타가 TV 예능이나 내레이션, 더빙, 게임, 광고 등에 참여하는 경우가 잦아진 탓이다. 이들은 출연료로 영화 한 편당 수천만~1억원까지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상파 외화 시리즈 편성도 KBS를 제외하고 전무하다. 지난해 한국성우협회 조사를 보면, 750명 회원의 총수입은 60여억원으로 1인당 800여만원이다. 이근욱 회장은 “회원 700여 명 중 밥벌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30% 안팎에 불과해 성우를 계속하려고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말했다. 그는 “2년마다 실업자를 양산하는 방송사의 전속기간을 늘리고, TV에서 방영하는 외화는 자국어를 보호하고 노약자의 시청을 돕기 위해 자막과 더빙 서비스를 병행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지윤씨에게도 무명 시절이 있었을까. “운 좋게도 저는 꾸준히 일을 했어요. 반면 남편(그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광고 등을 주로 하는 KBS 성우 32기 정형석씨와 2009년 12월 결혼했다)은 결혼한 뒤에도 일이 없었어요. 오죽하면 연애 시절에 선배들이 반대했을 정도니까요. 다행히 2010년 한 자동차 회사의 ‘기프트-카’(Gift-Car) 광고 내레이션을 계기로 남편의 목소리가 알려지면서 바빠지기 시작했죠.”

“내가 잘 살릴 수 있는 캐릭터 목소리 연기하고 싶어”

성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연기력이라는 건 유명한 성우 출신 배우들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한석규, 변희봉, 고 김무생, 김기현, 나문희, 김영옥, 전원주, 장광 등이 대표적인 성우 출신 배우다. 반대로 배우를 하다 성우가 되는 경우도 있다. <겨울왕국>에서 엘사 목소리를 연기한 소연씨는 뮤지컬 배우 출신이고, 박지윤씨의 남편도 한때 뮤지컬 배우로 활약했다. 지윤씨는 “끼와 개성이 넘치는 성우가 많아지고 있고 가수·배우·예능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셜록 시즌3> 왓슨 역의 박영재씨는 tvN <푸른거탑>에서 중대장 역으로 출연했다. 지윤씨가 성우 출신 배우로 활약할 날이 올까. 그는 “연기에 관심이 있지만 마이크와 달리 무대 울렁증이 있어서 힘들 것 같다”고 귀띔했다.

“뮤지컬은요?”

“글쎄요….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이기는 한데, 아이들이 어려서 당장은….”

인터뷰 당시 커피 대신 수시로 허브차로 목을 축이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목소리 관리 차원일까. “커피 좋아해요. 일부러 커피를 피한 건 아니고요. (웃음) 특별한 목소리 관리법은 없어요. 무리한 날은 말을 아끼거나,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녹음 일정이 잡혔는데, 감기에 걸리면?”

“민폐죠. 너무 죄송한 일이죠. 그런데 사람 일은 알 수 없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목에 수건을 싸매고 있어도 감기에 걸릴 때가 있긴 해요. 다행히 아직 최악의 상황은 없었어요.”

성우 생활 10년 만에 ‘갓지윤’이란 애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나보다. 지난 10년 동안 그는 뼈를 깎는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다. 앞으로의 포부를 물었다. “주인공 욕심보다 제가 잘 살릴 수 있는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를 하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는 ‘안나’만큼 멋진 여성이었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1.비정규직법은 한 사람을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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