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7:33 수정 : 2014.03.02 14:26

<높고 푸른 사다리>의 앞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요한이라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젊은 수사’였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을 향해 정진해야 하는 수도원의 삶은 속세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재미가 없을 테니까. 완두콩의 형태를 관찰해 유전 법칙을 발견한 멘델(Gregor Mendel)이 수도사였던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 7년간 완두콩을 들여다보는 게 엄청나게 심심한 사람이 아니면 가능했겠는가? 그러니 수도사의 삶을 소설로 만들었다고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였다. 책장을 넘긴 지 얼마 안 돼 소희라는 미녀가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왔으니까. 수도사의 삶과 더불어 한국전쟁에 관한 감동적인 실화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이 사랑 얘기로만 읽힌 건 순전히 소희의 미모 때문이었다.

요한은 소희를 처음 봤을 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자신에게 쏠리는 선망의 눈길을 충분히 아는 자의 오만함을 보여주고 있었다.”(50쪽) 다시 말해서 소희는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남들이 넋을 놓고 자기를 바라보는 걸 즐긴다는 말이다. 살면서 이런 여자를 몇 번 만났다. 그런 유의 여자를 볼 때 드는 느낌은 재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건 그녀들이 내게 별로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뿐, 어쩌다 그녀가 나한테 웃어주기라도 하면 마음이 180도 바뀌어 그녀를 위해 모든 걸 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예컨대 여신으로 추앙받던 우리 반 여자애가 내가 갖고 있던 일제 연필을 탐냈을 때, 내 연필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집에 있는 누나 연필까지 훔쳐다 준 적이 있다. 강신주 박사는 <감정수업>에서 “상대방을 붙잡아두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가급적 해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라고 한 바 있는데, 자신이 미녀라는 걸 잘 아는 여자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주위 남자로 하여금 범죄까지도 불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요한이 불쌍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자와 격리된 채 살아온 수도사가 어떻게 미녀에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첫 대면에서 소희는 춥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옷을 사달라거나 껴안아달라는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니 긴장하실 거 없어요.”(73쪽) 이런 말, 미모에 자신이 없으면 못한다. 미녀가 아닌 이가 저랬다면 요한이 얼마나 어이없어했을까? 첫 대면부터 가슴이 뛰었음에도 요한은 소희에게 냉정하게 대한다. 자기 마음을 들킬까봐 방어막을 친 것. 수도사라는 신분도 족쇄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요한은 그녀에게 넘어가 있었다. “어두운 성당 안이었지만 그녀가 앉은 자리는 눈부신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83쪽)는 유치한 말을 하는 것도 사랑에 빠진 이의 특권이잖은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희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한 요한에게 이런 말을 한다. “화가 났었어요. 그런데 용서해드리고 싶었어요.”(91쪽) 소희가 금녀의 장소인 수도원에 온 목적은 종교인의 스트레스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함이었다.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용서 운운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희는 점점 마각을 드러낸다. 난데없이 친구가 되자고 하고, 요한은 계속 존댓말을 하는데 일방적으로 말을 놓는 것도 그렇지만, 산책 중에 넘어졌다고 요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는 건 수도사에게 해도 너무했다 싶다. 어서 수도원으로 가자는 요한의 말에 소희가 한 말, “그냥 조금만 있어줄래?”(100쪽) 소희에게는 어려서부터 정해놓은 약혼자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일련의 행동은 너무도 잔인해 보인다.

그다음 스토리야 능히 짐작이 가능하다. 요한은 “사랑할 거야, 영원히”라고 맹세하며 그간 걷던 길도 포기하기로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신부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게 저의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155쪽) 하지만 요한은 결국 신부가 되는데, 이건 없던 자격이 다시 생긴 게 아니라 순전히 소희가 자신을 떠났기 때문이다. 소희는 왜 요한을 떠났을까? 요한을 가지고 논 것일까? 다음 대화에 힌트가 있다.

요한: 내가 수도원을 나간다면… (할머니의) 냉면집을 이어받을 수도 있어. 그러면 넌 매일 냉면을 먹을 수도 있을 거야.

소희: (경직된 표정으로) 나보고, 냉면집 사모님이 되라고? 냉면집?(194쪽)

이만하면 충분히 대답이 됐을 텐데, 소희는 아예 대못을 박는다. “재밌다, 그런 상상.”(같은 쪽)

요한의 생각처럼 그건 냉면으로 일가를 이룬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모독이었다. 삶이라는 게 현실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더구나 예쁘다는 게 얼마나 큰 권력인지를 알기에 여기에 대해 소희한테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다. 다만 소희의 빈약한 판단력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요한이 물려받는다는 그 냉면집이 그냥 냉면집이 아니라 전국에 스무 개의 지점을 가진, 거대 냉면 체인이었으니까. 요한이 그 얘기를 했어도 소희가 그렇게 도망갔을까?

우리나라 인구 1천 명당 성형수술 건수는 13.5명으로, 전세계 1위다. 이게 미모가 주는 권력에 눈이 먼 여성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남성들이 여성의 외모를 유독 밝히는 게 더 큰 원인이리라. 잘나가던 검사가 남을 협박해 돈을 뜯는 ‘해결사’ 역할을 하다 수감된 것도 알고 보니 미녀 때문이었단다. 성형외과가 미어터지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글 서민 수줍음이 너무 많아, 같은 사람을 다시 볼 때도 매번 처음 보듯 쭈뼛거린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대화하다보면 10년지기처럼 군다. 기생충학을 전공했고, 현재 단국대 의과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기생충의 변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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