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5:08 수정 : 2014.03.02 14:24

1. 동서남북지인(東西南北之人)

태산에서 노나라 산하를 내려다보며 조국을 떠날 결심을 한 공자는 아들 리(鯉)를 데리고 방(防) 땅에 있는 부모 산소를 찾았다.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아비로서 아들과 함께 사람의 도리를 다짐하기 위해서였다. 자가 백어(伯魚)인 리는 이때 열다섯 살이었다. 젊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둔 채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 사내가 아들이 한 사람의 대장부로 자라주길 바라는 심정이야 공자도 여느 아비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공자의 그런 애틋한 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하늘에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를 합장한 무덤도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공자는 봉분을 쓰다듬으며 추운 내색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 무덤가를 정돈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홀로 된 어머니가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나를 둘러업고 도시(곡부)로 떠나온 뒤로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자라서는 배움에 굶주려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이 불초, 구(丘)의 한이다.’

10여 년 전,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겨우 알아낸 아버지의 무덤에 두 사람을 합장하면서 4척 높이(약 80~100cm)의 봉분을 쌓았다. 장례를 거든 고향 사람들과 외가 친척 가운데 아직 생존해 있는 장로들은 그때 공자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공 선생이 사람들에게 봉분 쌓는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며 그랬지요. ‘오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기만 하고 봉분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봉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상례(喪禮)의 성의를 따지지 않습니다만, ‘지금 저, 구는 동서남북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今丘也, 東西南北之人也)인지라 무덤 표지를 제대로 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다른 장로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례를 마치고 나서 얼마 후 비가 많이 왔습니다. 갓 쌓은 탓인지 그만 봉분이 허물어졌어요. 역부들이 다시 봉분을 고쳐 쌓은 뒤 공 선생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습니다. 공 선생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혼자 펑펑 울더군요.”

당시 24살이던 공자는 가난하여 격식을 갖춘 봉분을 만들지 못했던 듯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장한 무덤이 때마침 내린 폭우를 견디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공자는 이를 자신의 불효로 여기고 크게 상심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묘의 흙을 단단히 다져 비바람 정도에 봉분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고 하던데….”(이상 <예기> ‘단궁’ 상편)

2. 아버지와 아들

공자 부자는 그렇게 산소의 눈을 쓸며 겨울 눈보라를 견뎌내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상주다.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

“네, 아버지.”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

“네, 아버지.”

“어머니를 어떻게 모셔야 하겠느냐?”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며, 날이 저물면 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며, 부모님이 아실 정도로 벗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부르시면 빨리 대답하고 느리게 대답하지 말며, 손에 일감을 잡고 있으면 일감을 던지고, 음식이 입에 있으면 음식을 뱉고서 명을 따르되 달려가고 종종걸음을 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늙으시면 외출할 때 정해진 장소를 바꾸지 않으며 돌아올 날짜를 넘기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병이 나시면 얼굴 모양을 펴지 않으며, 근심하는 기색이 있어야 합니다.”(<예기> ‘곡례’, ‘옥조’편)

“그래, 항상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대하여라. 어머니와 뜻이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나중에 기회를 보아 잘 말씀드려라. 어머니가 너의 말을 따르지 않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거스르지 마라. 아무리 힘들어도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위정’편 8장, ‘이인’편 18장)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마땅히 효가 만례(萬禮)의 근본이다. 세상에 죄가 3천 가지가 넘어도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으니, 제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자기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자는 남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는 법이다.”(<효경>)

“네, 아버지. 이웃과 친구들도 예로써 대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벗이 되려면 인격이 높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 그들로부터 많이 배워야 한다. 책으로 하는 공부는 사람에게 배우고 나서도 늦지 않은 것이다. 부디 잊지 말거라, 예절을 모르면 남 앞에 설 수 없고 학문이 부족하면 남들과 수준 높은 대화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학이’편 6장, ‘계씨’편 13장)

어느새 눈발이 잦아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네 어머니가 많이 기다리겠다.”

산을 내려가는 두 부자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 같은 온기가 피어올랐다.

“리야, 어머니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느냐?” “네.”

“어머니의 나이를 잊어선 안 된다. 한편으론 오래 사시는 것이 기쁘고, 한편으론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져 슬프니….”(‘이인’편 21장)

3. 주전파와 주화파

공자가 붕우들과 함께 곡부를 떠난 것은 소공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이듬해인 서기전 516년 초였다. 공자도 막 36살이 되었다.

공자 일행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향해 가고 있을 무렵, 노소공이 제나라의 ‘시험적인’ 지원 아래 맹손씨의 본거지인 성읍을 공격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그러자 제나라 임금 경공(景公)이 직접 노나라 영내로 군대를 보내 운읍을 점령했다. 제경공은 3월 노소공을 운읍으로 옮겨 그곳에 망명정부를 세우도록 했다.

애초에 노소공이 제나라를 망명지로 택한 것은 경황 없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이었기 때문이지만, 두 나라 공실이 사돈 관계였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공실은 강대국 진(晉)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상호 간에 ‘보험’ 성격의 혼인동맹을 자주 맺어왔는데 이때 노소공은 제나라 공실의 사위 입장이었다. 아무리 제나라가 노나라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손 치더라도, 노나라 종주국을 자처하며 삼환과도 밀접한 관계인 진나라로 가는 것보다는 제나라가 상대적으로 낫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리를 밝히는 제경공은 수염을 쓸며 주판알을 튕겼다.

‘잘만 하면 노나라쯤은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겠구나.’

제경공은 부리나케 소공에게 달려가 영접하면서 슬쩍 달콤한 말을 끼워넣었다.

“전하의 근심이 곧 과인의 근심 아니겠습니까? 이국의 망명 생활이 불편할 터이니 제가 땅 1천사(社, 2만5천 가구에 해당한다)를 드리겠습니다. 그 소출로 편히 지내십시오. 임금께서 허락만 하시면 즉각 군대를 보내 저 무도한 의여(계평자) 놈을 요절내드리겠습니다!”

욕심만 앞서지 순진하기만 한 성격의 소공은 마음이 혹했다. 총신 자가자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전하! 하늘은 같은 사람에게 복록을 두 번 주지 않습니다. 임금께 노나라 주인이 되는 복을 주었는데 또 무엇을 주겠습니까? 임금께서는 노나라를 되찾는 것이 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나라를 잃고 다른 나라가 주는 땅을 받으면 이는 곧 그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격인데, 장차 누가 전하의 복위를 도우려 하겠습니까?”

제경공은 노소공이 우유부단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노나라 민심도 소공 편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자 노나라 영지인 운읍을 빼앗아 노소공을 머물게 했던 것이다.

노나라 정변 뒤 제나라 수도 임치는 소공파와 계씨파 간의 치열한 외교전장이 되었다. 노소공 쪽은 제나라로 하여금 제후연합군을 구성해 계씨를 타도케 하려 했고, 계씨 정권은 제나라 대부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뇌물 공세를 펼치며 필사적으로 제후 연합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양쪽 사이에서 골치 아픈 건 제나라 공실이었다. 지역 패자(覇者)를 자처해온 입장에서 내놓고 실리를 취하기도 어렵고, 명분을 팽개치기도 애매했다. 제경공은 이런 계륵 같은 소공 일파가 임치에 죽치고 앉아 귀찮게 구는 것이 싫었다.

‘저 꼬리 빠진 노나라 촌닭을 자기 나라로 보내버리자.’

임치에서 밀려나 노나라 변방의 운읍에 자리잡은 노소공의 망명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이 격렬했다. 주전파의 수장은 장소백이었다. 장소백은 시종일관 일전불사를 외쳤다.

“공자든 대부·중신이든 그 어느 누구도 계씨 쪽과 접촉해선 안 됩니다. 어떤 타협도 반역이요, 매국 행위입니다!”

주전파의 목표는 제후연합군 결성이었다. ‘군주를 참월한 자를 토벌한다’는 반대하기 어려운 명분으로 제후들을 엮어서 계씨 정권을 정벌한다는 전략이었다.

주화파의 중심은 자가자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현 사태를 삼환과 공실 간의 사적인 권력투쟁으로 보고 외세의 개입을 극력 반대했다. 주화파는 공실과 삼환의 직접 협상을 통해 군주 체제를 회복시켜놓는 것이 외세를 막고 노나라 정치를 정상화하는 선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노나라 대부라면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서로 타협하여 임금을 복위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비현실적이고 기약 없는 대결론은 신하의 도리가 아닙니다. 내홍이 길어지면 외세가 개입하게 되고 결국 조상이 물려준 강토를 강대국의 아가리에 던져주는 결과만 낳을 것입니다!”

소공은 정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저 편하게 세월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렇다고 계평자와 타협하는 것도 죽기보다 싫었다. 소공은 달이 뜨면 주화파, 해가 뜨면 주전파로 변하는 박쥐 임금이었다. 어느 쪽이 진짜 자기인지 소공 자신도 헷갈릴 때가 많았다.

4.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이런 정세를 모른 채 공자와 붕우들은 임치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때 곡부에서부터 공자를 따라나선 사람들 중에는 나이 어린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노나라 정치 현실에 비분강개한 이들은 기개 하나로 공자 일행을 따라나섰다. 학인이 되든 무사가 되든 무엇으로든 애국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엄동설한. 당장 추위와 배고픔부터 물리쳐야 했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이들을 타일렀다.

“얘들아, 우리는 지금 소풍 가는 게 아니다. 이쯤에서 돌아가더라도 너희를 비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난세는 너희 탓이 아니니 돌아가 너희의 시대를 준비하거라. 우리도 곧 돌아와 너희와 새로운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

공자 일행이 태산을 넘을 때에 이르자 여러 사람들이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 이생이 들은 바로는 이때 공자 일행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간 사람이 10여 명이었다.

공자 일행이 길을 가는 도중에 어디선가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구오자라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물었다.

“상을 당하신 것 같진 않은데 어찌 그리도 곡소리가 구슬픕니까?”

“나에게 세 가지 실책이 있는데, 만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소. 그것이 후회되어 미칠 것 같소이다!”

“세 가지 실책이란 무엇이오?”

“나는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한답시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돌아와보니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없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커서는 제나라 임금을 섬겼는데, 임금이 교만하고 사치함에도 신하로서 절의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실수입니다. 나는 평소 후하게 사람을 대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모두 나를 떠나고 없더이다. 이것이 세 번째 실책입니다. 무릇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 아니하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구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 한번 가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요, 한 번 죽으면 두 번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세상을 하직하려는 이유라오.”

그러고는 물에 몸을 던져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모두들 기억해두어라. 이야말로 족히 경계로 삼을 만한 일이다.”

이때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한 자가 열세 명이었다.(<공자가어> ‘치사’편)

공자 일행 중 집으로 돌아간 문도들의 이야기는 여러 형태로 전승돼 후대에 전해졌다. 그 가운데는 공자를 야유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내용이 변형돼 실제와는 사뭇 다른 의도로 묘사된 경우도 있었다. 나, 이생이 태산 아래 어느 마을 촌로에게 들은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공자 일생을 비꼰 듯한 내용과 효(孝)·충(忠)·신(信)의 덕목을 풍자한 말투 따위로 보아 후대의 어느 양묵노장(楊墨老莊)이 솜씨를 발휘한 냄새가 물씬하다. 비록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한겨울에 고향을 떠나 태산을 넘던 공자 일행의 고단한 행로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간략히 소개한다. 내용의 진위는 각자 살펴 새기시길.

5. 가정맹호(苛政猛虎)

당시 노나라와 제나라 일대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노나라는 내란까지 벌어져 유망민들이 다수 발생했다. 공자는 제나라로 들어가면서 국경지대에서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바라보며 공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다짐했는지는 거듭하여 말하지 않으리라. 다만 그때의 일로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 한 가지를 통해 공자의 마음을 느껴보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으리라. 일군의 젊은이들이 할 말을 잃고 밤새 잠 못 이루며 정치의 본질을 고민케 한 사건이었다.

공자가 태산 기슭을 지날 때 한 부인이 매우 슬프게 울고 있었다. 자로가 물었다.

“부인은 어째서 이런 외진 산속에서 홀로 울고 계십니까?”

“옛날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셨고, 남편도 얼마 전에 또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제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공자가 사정이 안타까워 물었다.

“그런데 부인은 어째서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까?”

부인이 대답했다.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인을 남겨두고 다시 길을 떠나며 공자가 말했다.

“우리 모두 오늘의 일을 잊지 말도록 하자.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것을.”(小子識之. 苛政猛於虎也. -<예기> ‘단궁’ 하편)

6. 어서 갑시다, 소악이 시작되오

태산 기슭을 벗어나자 제나라 남쪽 땅이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벌판이었다.

‘저 너머가 임치다.’

임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최대 도시의 하나였다. 부호들이 즐비했고,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상가와 대형 극장, 축구장, 투계장 등에서 매일같이 시장이 서고 연희가 벌어졌다. 주나라 도읍 낙양을 제외하면 최고 수준의 음악을 상시적으로 연주하고 감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공자는 뛰어난 음악이론가이자 연주가였다. 곡부에 있을 때도 기회만 있으면 악사들과 음악을 듣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음악은 알 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할 적엔 오음을 합하고, 풀어놓을 때는 조화를 이뤄 분명하며, 연속되게 한 장을 끝마쳐야 한다.”(‘팔일’편 23장)

예교 전문가로서 공자는 음악을 조화로운 질서의 결정판으로, 그중에서도 순임금의 통치 이념을 담은 소악(韶樂)을 극치로 여겼다. 이런 마니아가 임치에 왔으니 그 설렘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공자는 멀리 임치의 외성인 곽문의 불빛이 보이자, 앞으로 닥쳐올 망명 생활에 대한 걱정도 잊은 채 소악의 선율이 흐르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소악이야말로 음악의 진선진미(盡善盡美)가 아닌가!’(子謂韶 盡美矣又盡善也. -‘팔일’편 25장)

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수레를 모는 마부를 재촉했다.

“여보시오, 마부. 좀더 빨리 갈 수 없겠소? 곧 소악이 시작될 것만 같구려!”(趣驅之, 趣驅之! 韶樂方作! -<설원> ‘수문’편)

함께 수레를 타고 가던 눈빛 맑고(其視精) 마음이 바르고(其心正) 행동거지가 단정한(其行端) 동자(童子)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전승은 어쩌면 그 동자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글 이인우 <한겨레 라이프> 편집장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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