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5:03 수정 : 2014.03.02 14:24

이창동의 영화 <밀양>의 주인공은 어린 아들이 피살당한 어머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헤매다 기독교에 귀의해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면회하러 가서 만난 살인범은 “하느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살인범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는 상황에 당황한다. 분노가 치밀어오르지만 도대체 어떻게 억울함을 풀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서서히 미쳐가고 자살 시도를 하기에 이른다.

이청준의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는 <밀양>과 스토리가 약간 다르다. 결말에 아들을 잃은 주인공이 살인범의 사형 집행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자살한다. 물론 사형 집행에 반대하거나, 살인범을 연민해서가 아니다. 법이 범인을 죽임으로써 최대한의 응징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과정에서 국외자로 제외된 상황에 절망해서다. 살인범을 사형시킨 법은 그에게 처벌 여부 의사를 묻지 않았고, 스스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살인범 역시 그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주인공이 자살로 말하려 했던 바는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도대체 누가 내 아들의 살인범을 나와 내 아들의 동의 없이 처벌하고 용서하고 구원할 권리를 갖는가?”

법이 처벌하고 종교가 용서한 살인범

이 질문은 종교와 법제도적 권위에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신, 법 혹은 다수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전)근대적 권력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당사자 개인이 ‘나의 존재는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지은 자는 죽음으로 뉘우쳐 용서받고 구원받아 만사가 순리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때, 그는 처벌할 자격도 용서할 권리도 박탈당한 자리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했을 터이다. 그 요란한 주목에도 세상 사람들이 전혀 보지 못하는 맹점, 태양의 흑점 같은 자리에 문득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폐허 위에 혼자 내던져진 절대적인 고독과 공포, 생사의 경계가 무의미한 깊은 허무가 복잡하게 엇갈리지 않았을까? 혹자는 “주인공이 아들의 복수를 생각했을 것이므로 법이 악역을 맡아 사형시킨 것보다 더 좋은 결말이 어떤 게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은 왜 ‘라디오를 통해 사형 소식을 듣고’ 자살을 선택했을까?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님이야 그 사연을 알겠지만 여쭤볼 수도 없는 일이니 우리가 주인공에 감정이입해보는 수밖에.

심사가 극히 격하고 복잡한 주인공의 내면으로 바로 들어가는 게 좀 부담스럽지 않은가. 준비체조 삼아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란 영화 한 편을 감상해보자. 이 영화는 어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자신의 학생으로 받은 직업학교 선생의 얘기다. 관객은 주인공이 아들의 살인범을 살해할지 말지 궁금증을 결말까지 가져가야 한다. 감독은 자주 범인을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지만 결국은 범인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게 결론이다. 그는 “당신이 내 아들을 죽였어”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으므로, 당연히 용서를 빌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가 살의를 접은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왜 그는 하나뿐인 아들을 살해하고, 그 때문에 아내와 헤어지게 만들고,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앗아간 사람을 내버려두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본다. 그는 아들과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그는 이미 너무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혼자서 삶을 지탱할 자신이 없다. 범인을 살해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살인범을 죽여 마음의 적의마저 없애버리면 당장 삶을 감당하기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는 어떤 방식이든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범인과 동행하는지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살의가 없다는 것만 분명하게 말하고 막을 내려버린다.

이후 주인공과 살인범은 어떤 관계를 유지했을까? 그는 범인에 대한 적의를 유지하며 단지 아들과 아내를 현재로 불러오려는 에너지로 쓸 수도 있고, 거기에 지쳐 범인을 용서하고 아들의 부재를 채우는 대리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찌됐건 그의 입장에서 범인은 아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매개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이 일견 낯설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한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심리로 보인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 범인을 살해해 아들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려는 자가 아들과 영원히 단절되는 두려움보다 자신의 분신을 훼손한 상대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자,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 보호의 권력의지가 더 강한 자로 보일 뿐이다.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자만이 범인을 죽여 아들과 영원한 작별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는 아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건 자기 자신의 원한을 푼 것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벌레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살한 심경에 감정이입해보자. 유일한 가족인 아들이 살해당해 미칠 지경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생각하고 찾아갔다. 살인범은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한다. 용서할 권리를 무시당해 화가 났지만 범인이 살아 있다면 아마 지속적으로 찾아가 사죄받고 용서할 기회는 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녀는 아들의 상실을 스스로 극복하는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갈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법은 그를 사형시켜 그녀로부터 빼앗아가버린다. 그 사실조차 그는 ‘얼굴 없는’ 라디오란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 가운데 한 명의 자격으로 통보받을 뿐이다. 세상은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당신이 이 상황에 던져진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삶을 지속할 어떤 끈을 세상과 이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종종 사형 폐지를 둘러싼 지금의 논의 속에서도 <벌레 이야기>의 주인공이 서야 했던, 실질적인 인간 권리의 사각지대를 본다. 이런 양상은 사형 찬성론자든 사형 폐지론자든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오원춘의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세간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유족은 사형이 아니어서 실망했고, 많은 누리꾼들이 유족에 공감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다. 선고도 드물지만, 집행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정서가 사형 폐지 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흉악범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마다 사형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한다. 언론의 논조를 보면, 진보매체는 분명하게 사형 폐지를 주장하고, 보수매체는 존치론에 미온적으로 동조하는 정도다. 나는 사형 폐지의 세계적 추세를 거스를 의사는 없다. 하지만 현재 사형 폐지론의 논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몫인가, 피해자·유족의 몫인가

피살자의 입장에서 시작해보자. 한 젊은 여성이 길에서 납치당해 사지가 절단되는 죽임을 당했다. 억울하다. 피살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대리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족이 피살자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피살자가 살인범에 대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더 잔인한 보복을 바랄 수도 있고, 용서를 원할 수도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우리는 관성적으로, 구경꾼의 감정을 유족에 투사한다. 유족의 입장을 피살자의 입장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대개의 분노한 구경꾼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유족은 살인범이 피살자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형벌제도를 통해서는 그렇게 할 방법이 마땅찮다. 최고형인 사형을 집행해도 살인범의 목숨과 피해자의 목숨을 등가로 전제해야 최소한의 응보가 된다. 그래도 살인 피해자 가족들은 사형에 집착한다. 그것만이 사라진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형을 바라지 않는 유족도 있다. 이게 가능하려면, 용서가 피살자의 의사이거나, 용서 행위 자체가 피살자의 의사와 무관한 유족의 문제라고 확신해야 한다. 만약 복수가 피살자의 의사라고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의 진정성은 복수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근대 형벌제도 이전에는 문화권에 따라 피해자 가족의 복수할 권리, 살인자를 ‘죽일 권리’를 인정하는 관습이 흔했다. 피살자의 의사를 잔인한 보복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충실한 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적 폭력을 금하는 근대 형법 질서 속에서 살인자에 대한 복수는 또 다른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피해자 가족의 죽일 권리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상상된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사월>은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한 이슬람 부족을 그리는데, 그들은 복수를 위한 살인을 정의의 실현이자 명예 회복으로 생각한다. 살인 행위가 정의가 되는 것은 부당한 살인에 대한 응징이기 때문이고, 명예가 되는 것은 종족을 공격한 적과의 싸움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인자에 대한 가장 좋은 판결은 피해자 가족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피해자 가족에게 정의와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생각 같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발상에 익숙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이런 상황이 등장한다. 피해자 가족들은 초등학교 교실에 가해자를 감금한 채 잔인하게 고문한다. 박 감독의 다른 작품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도 복수는 ‘법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설정된다. 무협영화와 서부영화 같은 장르영화에서 복수 코드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단골 메뉴다. 우리가 그만큼 복수하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고 열광한다는 얘기다. 그건 역설적으로 법제도적 질서를 통한 응보가 뭔가 정서적으로 2% 부족하다는 걸 이미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오원춘 사건의 판결을 둘러싼 논란을 재구성해보자. 혈육을 살해하고 난도질한 오원춘에 대해 유족은 ‘죽일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그 권리를 현대 형벌제도에서는 법이 가져간다. 사형제 폐지는 ‘죽일 권리’를 가져가서 집행하지 않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피해자 가족은 죽일 권리를 박탈당한다. 과연 법은 가해자를 죽이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가해자를 죽음으로부터 면책할 법의 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보편적 인권’을 말할 수 있는 자

법제도의 관점에서 답해보자. 먼저 피살자 가족의 ‘죽일 권리’를 법이 가져가는 것은 적어도 ‘직접 죽일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 복수는 복수의 연쇄로 이어져 폭력의 악순환을 낳기 쉽다. 법의 개입 자체는 불가피하다. 법제도적 절차 속에서 가해자를 사형시키면 폭력의 악순환은 막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도의 개입 범위다. 그런데 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경우든 사형을 형벌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이른바 사형 폐지다. 사형 폐지론의 핵심 논거는 국가가 범죄인 살인을 형벌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으며, 그 어떤 인간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천부적인 인권의 범위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피해자의 인권을 내세워 가해자를 사형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의 살인범죄가 된다. 이 때문에 살인 피해자 가족이 피해자를 대신해 ‘죽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월권이다.

나는 ‘국가조차 살인의 자격을 갖출 수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살인 피살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전쟁 피살자다. 전쟁 속의 살인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돼왔다. 범죄 살인 피해자나 전쟁 살인 피해자나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살인은 가해자를 처벌하지만 전쟁은 실질적인 가해자 처벌이 없다. 전범 재판은 전쟁 살인의 가해 당사자에 대한 처벌이 아니다. 해당 전쟁에서 발생한 전체 전쟁 살인의 가해 책임을 패전국에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승전국의 전쟁 살인은 처벌은 고사하고 영웅시되는 경향까지 있다. 전장은 살인 피해자만 존재하고 가해자가 없는 윤리적 진공 상태다. 여기서 질문해보자. 국가조차 살인의 자격을 갖출 수 없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전쟁 살인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살인자를 사형에 처할 수 없는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의 집단적 탐욕의 이름에 다름 아닌 국익을 명분으로 이웃 나라의 국민을 살육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논거에는 여기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다. 존치론자든 폐지론자든 국가의 ‘살인할 자격’을 범죄 가해자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존치론자는 사형을 피해자의 억울함을 푸는 방법으로 설정하고, 그 대리인으로 국가를 지정한다. 하지만 사형은 가해자의 목숨을 빼앗을 뿐, 피해자와 가족의 억울함을 온전히 해결해주지 못한다. 가해자를 사형시켜도 피해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에 생명은 등가로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형제를 옹호하는 것은 피해자의 억울함보다 구경꾼들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닐까? 사형은 ‘내가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구경꾼의 불안을 ‘나를 죽인 자는 국가가 죽인다’는 안도감으로 돌려놓는다. 사형제는 구경꾼의 심리적 불안을 가해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로 전치시킴으로써 잊고자 하는 일종의 의례인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는 범죄 예방 효과도 미미하고 살인 예방을 위한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진정 피해자를 위한 대리인의 정당한 역할인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피해자의 의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영혼이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가해자를 죽여도 어차피 자신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인데 굳이 보복을 염원할까?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복을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은 절대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의 의지로 가득한 산 사람들이다. 나는 죽은 피해자보다 살아 있는 피해자 가족이 더 사형을 절실히 원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 운동을 벌이는 피해자 가족의 모임이 있다. 아마 그들은 피해자의 의사를 용서로 해석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형 폐지론이 놓친 피해자의 의사

사형 폐지론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사형 폐지의 논리가 뿌리박아야 할 곳은 ‘가해자의 인권’이나 ‘살인할 자격이 없는 국가의 월권’이 아니다. 이런 논리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살인 피해자와 가족의 ‘죽일 권리’를 정서적으로도 용인하지 않는다. 만약 법제도 이전에 피해자와 가족의 ‘죽일 권리’를 정서적으로 인정한다면, 즉 적어도 그들이 법과 사회에 대해 가해에 대한 처벌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사회는 사형 폐지로 그들이 ‘죽일 권리’를 포기하는 데 대한 사회적 배려를 해야 한다. 사형제 폐지가 피해자 입장에서 설득력을 얻으려면 ‘죽일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법과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충분한 정서적·제도적 위무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렇지 못하다. 사형 폐지를 통해 법은 만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인자한 모습을 현시할 수 있고, 사회 구성원들은 복수의 연쇄가 야기할 폭력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즉, 살아남은 사람은 덕을 본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은 범죄 피해자 국가 보상 제도를 통해 약간의 물질적 보상을 받는 대가로 깊은 상실감은 물론 종종 관용과 용서에 대한 사회적 압박까지 느껴야 한다. <밀양>의 여주인공을 미치게 한 바로 그 상황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형 폐지론이 좀더 살인 피해자와 유족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국가에 의한 살인을 부정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게 살인 피해자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부활시키는 것, 생물학적 죽음의 자리에 사회적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려면 사형 폐지론의 논거가 살인 피해자의 ‘의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이미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살인 피해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데 자신이 기여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런 가정은 현실성이 있다. 생각해보라. 만약 당신이 미처 삶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피살당했다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할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한 번의 기회로 당신이 기억될 마지막 모습이 결정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가? 아마도 상당수는 가해자를 살해하는 복수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면, 당장의 억울함이 해소될 순 있어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지워진다. 다른 산 자들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열등한 한 인간을 살해하는 대신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기여한다면, 그는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실제 이런 상황이 현실로 주어진다면, 다수가 가해자에 대한 복수보다 산 자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길을 택하지 않을까? 그게 그의 중단된 삶이 사회적으로 연속성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살인 피해자가 살아남은 자들 중 어느 하나도 자신과 같이 피살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보편적 인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용서하거나, 적어도 죽이지 않아야 한다. 사형 폐지론의 논거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가해자의 인권’이나 ‘어떤 이유로도 국가는 사람을 죽일 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보편적 인권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관용을 전제로 성립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가해자의 인권’은 법이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자들이 부여하는 것도 아닌, 피해자가 부여한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 피해자에 대한 가장 진지한 애도는 가해자의 사형이 아니라 사형제 자체의 폐지가 될 수 있다.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의 이름으로 용서라는 진리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 논의가 피해자가 삭제된 집단적인 용서의 퍼포먼스로 그친다면, 그건 보편적 인권이란 공허한 가치를 내세워 살아남은 사람들이 벌이는 집단적인 위선의 공모에 불과할 뿐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전쟁 살인은?

어쩌면 현재의 사형제 폐지 논의가 전쟁 살인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되지 않는 것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주체들이 ‘나는 선량하고 관대하다’는 나르시시즘적 만족만을 얻으려 할 뿐 비용을 지불하려는 의사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형제 폐지를 통해 ‘죽임을 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 쉬운 게 어디 있는가. 그럴듯한 말만 나불대면 되지 않는가. 내가 살인 피해자가 아니고 유족이 아니면 도대체 잃을 게 없다. 기껏 직면하는 것이라곤 살인 피해자의 억울함에 대한 약간의 부담과 유족의 원망스런 시선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사형 폐지론자가 국가의 살인할 자격을 부정하는 논거로 ‘죽임을 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를 내세우면서 전쟁 살인에 대한 책임도 국가에 묻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인 국가와 대면해서 그 사회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불화해야 한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형 폐지론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혀서 윤리적 논의의 장으로 상정되지도 않고 있는 ‘전쟁 살인’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국가 간 전쟁은 윤리보다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준거가 되는 영역이지만, 역사가 발전하면 이 영역 역시 윤리적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사형 폐지론은 아직 거기까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형 폐지론이 단순히 사형제 폐지를 겨냥한 일회용 담론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는 철학적 담론이 되기 위해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범죄 살인의 피해자보다 훨씬 많은 전쟁 살인의 피해자다. 그 어느 쪽을 주목하든, ‘죽임을 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 주장의 출발은 산 자들의 윤리적 허위의식이 아닌, 침묵하는 피해자들의 ‘의사’여야 한다. 사형제 폐지의 주체는 역설적으로 여기 살아 있는 ‘우리’가 아닌 이미 떠나버린 ‘그들’이어야 한다. 이 차이를 느끼는 감수성만이 진정한 피해자를 외면하는 공허한 ‘인권’의 속을 채우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학 갈 때까지 학교 공부보다는 잡지 읽기에 더 열심이었다. <중앙일보> 기자로 한 10년쯤 일했는데, 대부분을 문화부에서 보냈다. 인터뷰집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 칼럼집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 역서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무한 미디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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