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4 11:56 수정 : 2014.02.05 13:56

한겨레 박승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공기를 타고 반대편 귀로 들려오는 말소리가 일치한다는 걸 알아채고 주위를 살폈을 때, 불과 5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나처럼 전화기를 한쪽 귀에 대고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보이기는 했다. 눈이 마주쳤으나, 설마 했다.

“혹시….”

귀에서 전화기를 뗄 겨를도 주지 않고 상대가 말을 낚아챘다.

“예, 맞습니다.”

악수를 나누면서도 빠르게 눈앞의 얼굴을 스캔했다. 내게서 미심쩍어하는 눈빛을 읽었을까, 못 읽었을까. 그의 눈빛에서는 찰나 안타까움이 스쳤던가, 스치지 않았던가.

“반갑습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가수 태민입니다.”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지하 1층 로비에서 처음 만난 그에게서 아직 ‘또 다른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가 로비 한쪽 소파를 권하며 말을 이어갔다.

“못 알아보시겠죠? 당연합니다.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바꾸려고 무지 노력도 했고요.”

지난 1월12일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씨가 작고했다는 부음 기사가 났다. 연예매체는 물론 지상파방송과 종합일간지들도 그의 삶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토록 ‘성대한’ 이미테이션 가수의 부음 기사를 전에도 본 적이 있던가? 커튼 뒤의 ‘진짜’ 가수를 찾아내는 방송 프로그램이 제법 인기라더니,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가 대표적인 이미테이션 가수였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대표 이미테이션 가수’는 ‘대한민국 대표 짝퉁 상품’만큼이나 형용모순 아닌가? 과연 그의 부음 기사에는 애도의 진정성이 얼마나 담겨 있을까?

고 배삼룡이 ‘배철수’라 호명하자 “노! 철수”

물음표의 긴 행렬은 마침내 ‘이미테이션 가수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에 이르렀다. 신파야 차고 넘칠 터. 정보가 풍부한 인물이 필요했다. 잘 아는 연예 쪽 방송 PD에게 수소문을 부탁하자 딱 5분 뒤에 답이 왔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그는 한때 노철수였다. 그 이름으로 배철수 이미테이션 가수 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국연예인이미테이션연합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단체 이름조차 생소한 나로서는 개인사뿐 아니라 업계사까지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맞춤형 인물을 찾은 셈이니 쾌재를 부를 수밖에.

그런데 닮지 않았다. 얼굴도, 분위기도.

“그, 그러니까… 언제부터…?”

“IMF가 몇 년도였지요? 그 1년 전이었는데.”

1996년. 18년 전이다. 아이가 태어나 성인영화를 볼 수 있게 될 만큼의 시간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태민으로“만” 살았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제3의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96년’은 대화 도중 언제고 다시 소환될 거라는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왜 이미테이션 가수를 관두고 트로트 가수가 되었는지는 이미테이션 가수라는 표현에 스며 있는 근원적 쓸쓸함과 닿아 있을 테지만, 아직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이미테이션 가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가.

“그 얘기를 하려면 제 얘기부터 해야 합니다.”

태민은 자신이 ‘이미테이션 가수 1호’라고 했다. 그조차 사실관계를 완벽히 검증할 수 없으니, ‘사실상’이라는 유보의 고리를 걸고 가는 게 좋겠다. 하지만 연예인 닮은꼴이야 연예인 직업이 생겨나면서부터 함께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연예인 닮은꼴이 아니라 닮은꼴 연예인, 즉 직업으로서의 이미테이션 가수다.

음악다방에서 디스크자키(DJ)를 하다 군대에 간 이재석은 제대 뒤 스탠드바에서 사회를 봤다. 언변과 임기응변에 능했던 이재석은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구 엠시(MC)가 되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거친 장발과 듬성듬성한 콧수염, 툭 튀어나온 광대뼈, 달 표면 같은 얼굴 피부였다. 사람 보는 눈은 나이든 희극배우라고 다르지 않았다. 전북 군산의 한 업소에서 사회를 볼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배삼룡씨가 출연자로 왔다. 배씨는 이재석을 “배철수”라고 불렀다. 이재석은 손사래를 치며 “노! 철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 얼마 뒤 이재석은 사회를 보던 자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철수라는 이름으로.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시절에 들었노라/ 만수산을 떠나간 그 내 님을/ 오늘날 만날 수 있다면/…”(배철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노철수도 이재석처럼 전국의 업소를 돌았다. 무대가 끝나고 이미테이션이라는 걸 밝히는 순간 주객들은 환호하기도 했지만, 더러 술병이나 안주접시를 날리기도 했다. 시내 곳곳에 붙은 홍보 포스터에는 분명 ‘노철수’라고 돼 있는데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심지어 대기실까지 찾아와 멱살을 잡는 이도 있었다. 몇 해가 지났을까.

1990년 2월, 당시 최고 인기 토크 프로그램인 <자니윤쇼>(KBS)에서 출연 제의가 왔다. 배철수가 소속된 그룹 ‘송골매’는 <자니윤쇼> 밴드를 맡고 있었다. 평소처럼 녹화가 진행됐다. 그런데 녹화 도중 무대 뒤에서 또 한 사람의 배철수가 나타나 기타를 멘 배철수 옆으로 다가갔다. 방청객들은 자지러졌다. 배철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등장한 줄 알았다. 그러다 또 한 번 자지러졌다. 녹화 시작 때부터 무대 위에 서 있던 이는 배철수가 아니라 노철수였다. 노철수는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고 너훈아씨 발굴… 철저히 가짜로 산 가수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이미테이션이 대접받을 거라고 봤거든요. 오리지날이 있는데 어떻게 이미테이션이 사라지겠어요. 어쩌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견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세요. 지금 대중문화 대세가 모방 아닙니까. 오디션 프로들끼리 서로 모방하고, ‘시즌2’ ‘시즌3’ 하는 것도 결국 다 자기 모방이잖아요. 심지어 <히든싱어>까지. 어쩌면 이미테이션 연예인들이 씨를 뿌린 것 아닐까요.”

한국연예인이미테이션협의회 설립 동기와 배경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듣기에 따라 개인사보다는 미학에 가까웠다. 하기야 고대 그리스시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을 미메시스(Mimesis·모방)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대예술에서도 앤디 워홀 같은 거장들에 의해 패스티시(Pastishe·혼성모방)는 가장 포스트모던한 표현 기법으로 쓰이고 있다. 미메시스와 패스티시가 무작정 베끼기만 하는 게 아니듯이 모창 영역이라고 해서 싱크로율 100% 복제가 지상 목표는 아닐지 모른다. 거기에도 미학적 긴장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같은 걸 생각했어요. 그땐 직업적으로 활동하는 이미테이션 가수가 저 말고는 없었습니다. 방송 출연은 고사하고 이미테이션으로 밤무대에 서는 사람도 없었어요. 사람들을 발굴하고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서둘러 연합회를 만들었다. 이미테이션 가수들의 권익 신장을 도모하는 이익단체보다는 기획사 성격이 강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카데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모창 대회를 열었다. 대성황이었다. 행사 뒤 사람들이 사무실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몇 대 일 경쟁률의 오디션까지 거쳐 발굴한 사람들이 1990년 12월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에 매주 출연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12월에는 SBS가 개국하면서 ‘나훈아 모창 대회’가 열렸다. 그동안 키워온 ‘4대 나훈아과’를 모두 출전시켰다.

“뭐라고요?”

“4대 나훈아과요. 너훈아, 나운하, 노훈아, 라훈아. 그중에서 너훈아와 나운하가 최종 결선까지 갔습니다.”

“이번에 작고한 너훈아씨가 거기 출신이에요?”

“예, 이름도 제가 지어줬는걸요. ‘나’가 아니니까 ‘너’! 처음엔 너훈아가 되게 싫어했어요. 그런 성이 어디 있느냐면서 괴상하다는 거예요. 자꾸 불러보면 좋게 들릴 거라고 설득했죠. 조영필, 패튀김, 임이자 모두 제가 지어준 겁니다.”

“이미테이션 가수가 되려고 찾아오는 이들은 원래 가수를 하거나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누구 닮았다는 얘기를 듣고 비로소 가수가 되려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거의 대부분 후자입니다. 세탁소 하던 사람, 시장에서 장사하던 사람, 회사 다니던 사람…. 김갑순(너훈아 본명)도 이미테이션 하기 전에 음반을 한 장 내기는 했지만 직업가수는 아니었어요. 나훈아씨와 닮은 건 얼굴 하나밖에 없었어요. 대부분은 노래 실력도 안 됩니다. 원석도 아니고 완전 자연석이에요. 노래 실력, 창법, 제스처, 심지어 멘트와 무대 매너까지 갈고닦는 세공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훈아의 걷는 모습부터 마이크 드는 자세, 등 돌리고 있다가 얼굴을 돌려 관객을 바라보는 표정, 꺾는 대목에서 엉덩이를 씰룩대는 동작 등을 실감나게 시전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디까지 말했죠? 아! 그러다보면 어느 단계에선가 목소리까지 닮는 ‘휠’(Feel)이 와요. 그렇게 1년씩 혹독하게 가르쳐서 ‘데뷔’를 시켰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안 돼서 6개월쯤 하다가 집으로 돌려보낸 조용필과 지망자, 이미자과 지망자도 많았어요.”

이쯤에서 그의 이미테이션 미학이 다시 궁금해졌다. 싱크로율 100%가 목표인가.

“나훈아씨가 약간 덧니가 있어요. 오죽하면 그것까지 닮게 하려고 너훈아에게 혀로 이를 계속 밀어내는 것까지 시켰겠어요. 그런다고 그게 나오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아주 세밀한 것까지 따라 하려는 거였죠. 하지만 또 완전히 똑같아서는 안 돼요. 모창은 가사를 정확히 전달하면 안 됩니다. 핵심만 툭툭 치고 가면서 비슷하게 해줘야지 정확히 하나하나 씹고 가면 오히려 ‘탄로’가 나거든요.”

그의 시전이 다시 펼쳐졌다.

“히미 화~ (버린) 이벼린(데) 슬퍼~(도) 후울지 마~(라요).”

요컨대 ‘닮았다’보다 한 단계 수준을 높여 ‘똑같다’고 느끼게 하면서도 ‘오리지날이 아니다’라는 것까지 동시에 느끼게 해줘야 이미테이션을 보는 즐거움이 생긴다는 거였다. 그런 미학적 쾌락의 지대는 아슬한 외줄 위에 겨우 자리를 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가 밤에 자주 출몰하면 가짜는 죽어

“일반 가수야 자기 스타일대로 부르게 하면 되니까 가르치기가 이미테이션 가수보다 더 쉽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테이션 가수도 트로트 가수나 발라드 가수, 록 가수처럼 하나의 장르를 담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근데 요즘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신인’들을 보면 한눈에 봐도 아니에요. 조금 닮았다 싶으면 후다닥 연습시켜서 내보내죠. 그런 걸 기업형으로 하는 데가 있다던데, 이미테이션 가수의 자질, 권익 모두 떨어뜨리고 이 분야를 망치는 일이에요. 안타깝습니다.”

1996년이라고 했었다. 노철수는 왜 10년 남짓의 정체성을 지우고 태민으로 존재이행을 감행했을까. 그는 자기 얘기를 하지 않고 이미테이션 업계의 속성으로 말을 돌렸다.

“지금 트로트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 현철씨에게도 이미테이션 가수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훈아나 조용필, 이미자, 패티김 쪽 정상급 이미테이션 가수들만큼 잘나가질 못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오리지날이 좀처럼 직접 보기 힘든 가수냐, 아니면 밤무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가수냐의 차이입니다. 오리지날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데 누가 이미테이션을 찾겠습니까. 겨우 일회성 코믹물 소재로 쓰이는 정도죠. 물론 오리지날이 현역 활동이 뜸하다고 해서 무조건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전설이어야지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슈퍼스타!”

배철수씨는 어떤가.

“기자님이 잘 아시잖습니까. 아무튼 너훈아, 조영필, 패튀김, 임이자 같은 가수들이 뜨고 나니까 노철수를 찾는 데가 빠르게 줄어들더군요.”

그래서 결국 ‘전업’을 택한 거란 말인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테이션 가수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훈아 같은 경우입니다. 나훈아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는 없고, 살아도 가짜 죽어도 가짜가 되기로 마음먹고 활동하는 경우입니다. 가짜로 산다는 거, 말이 쉽지 대단한 집념입니다. 사람인지라 술자리 같은 데서 울컥하기도 하고 힘들어도 하죠. 다른 하나는 이미테이션을 하나의 자기계발 과정으로 여기고 모방 속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창조하려는 경우입니다. 저는 후자였던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미테이션을 옹호하는 이유는 둘 다입니다.”

태민이 되기 위해 이재석은, 아니 노철수는 지독한 결심과 피나는 노력을 했다. 너훈아·조영필·패튀김·임이자의 전화번호부터 지웠다. 자기만의 창법을 만들기 위해 이미테이션 가수들을 훈련시킬 때보다 더 혹독하게 자신을 닦아세웠다. 태민이 머리를 닭 볏처럼 높게 세우는 것도 장발과 정반대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저는 이미테이션 가수를 하면서 자기계발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본 것 같아요. 오리지날의 장르가 트로트가 아니어서. 하하.”

오리지날의 가창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건 나만의 편견일까. 내 귀에는 태민의 말이 어쩐지 중의적으로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하시기에 MBC에서 보자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신곡 홍보하려고 방송사마다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무슨 곡인데요?”

“<청춘사수>라고 나온 지 3년쯤 됐는데…. 아, 놀라지 마세요. 신곡 맞습니다. 원래 트로트는 한 곡을 몇 년씩 오래 밀어야 합니다. 요즘 전국의 노래교실에서 대세입니다.”

이제 싱크로율 0%… 모방 아닌 창조합니다

신문사로 돌아와 1990년 기사를 검색했다.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닮은, 장발과 콧수염과 광대뼈와 분화구로 구성된 두 장의 얼굴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청춘사수>를 검색해봤다.

“청춘아 니 아무리 잘난 척하여도/ 장사 없다 세월 앞에 돌도 씹던 청춘도/ 한때다 청춘도 겁내지 마라/ 놓쳐버린 고기가 정말 크더라/ …”

아, 이 노래를 부른 가수였구나! 가락이 구절구절 차지게 넘어가고 있었다.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

손은민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eunmin.s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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