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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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국의 중 일부. (왼쪽) 중 ‘본격 한자급수 따는 만화’의 일부.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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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이 만화들은 최초의 ‘병맛 만화’라는 개념을 창시했던 작품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웰메이드(?)다. 최초의 병맛 만화들은 그림판에 마우스를 이용해 그린 추상화에 가까워 보이는 작품들이거나, 심지어 공책에 낙서처럼 끄적여 대충 스캔한 것들이었다. 이해를 위해 나름 유명한 작품 하나를 보자. 얼마 전까지 수많은 패러디를 쏟아낸 엉덩국의 단편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다. 어느 날 주인공 존슨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게이바에 간다. 그런데 게이바에는 무서워 보이는 게이들이 앉아 있다. 겁먹은 존슨은 “저 그냥 나갈게요”라며 꽁무니를 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땐 안 된단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존슨의 엉덩이를 때린다. “으아아, 왜 때려요?” 이어서 돌아오는 한마디 “찰지구나!” (이하 생략) 실로 설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보처럼 느껴진다. 그럼 이번엔 다른 작품을 보자. 이번에는 다른 작가(이름이 부적절해서 소개할 수 없다)의 <본격 한자급수 따는 만화>다. 한자 시험을 보러 간 김탁봉은 커닝을 하기로 하고 마법천자문 볼 견(見)을 사용하지만, 곧 시험감독관의 ‘펀치 펀’에 제압당한다. 둘은 ‘킥 킥’과 ‘피할 피’로 합을 주고받다가 김탁봉의 ‘카운터카’를 맞고 감독관은 ‘고자될 고’가 된다. 하지만 이어 그들의 싸움을 멈추게 하며 마법영어, 마법일어, 마법불어, 마법태국어, 마법아랍어가 등장해 서로 다투다가 “그런 거 없고 위아더 월드”가 되어 손에 손잡고 벽을 넘다가 “벽을 못 넘어서 싸그리 사망”으로 끝이 난다.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피와 멘탈붕괴가 서라운드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아마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스토리와 그림을 보고 최초로 느끼는 감정은 분노일 터이다. 그런데 의외로 분노는 오래가지 않는다. 대신 이런 만화를 보며 느낀 황망함과 어이없음에 대한 고민이 몇 초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곧 정체모를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이 웃음은 어찌 보면 항복의 의미에 가까운데, 법과 상식, 이해관계와 수많은 룰, 예측 가능성과 뻔함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그것을 ‘서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떤 괴상망측한 이야기에, 심지어 평소 같으면 혐오해 마지않으며 화를 냈을 그런 이야기에 굴복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의 ‘나’는 이상하고 은밀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마 앞에 늘어놓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떻든 간에 잠시나마 ‘와장창’ 하고 박살나는 찰나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이런 이야기 부스러기들을 만들어내는 걸까? 한 가지 실마리는 이런 만화를 그리고 그것에 열광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10~20대 초반의 젊은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대충 꼽아도 입시 경쟁, 학교폭력, 교사와 부모의 압박, 놀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의 부재,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박탈감 같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굼벵이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만큼의 난이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가설에 따르면, 이 찌꺼기 같은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향한 욕망과 에너지가 최악의 환경을 만나 만들어지는 뒤틀린 결과물이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독성과 자기 비하, 그로테스크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뒤에 찾아오는 뒷맛은 쓰다. ‘병맛 만화’라는 이름 자체는 물론이고, 소수자에 대한 비하적 묘사가 걸핏하면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이들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재료가 그런 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욕설과 폭력이 아니면, 자기와 타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면 이야기를 만들 수조차 없다. 언젠가 엉덩국은 “만화와 병맛 만화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있다. 만화는 문화를 반영하는데, 세상이 병맛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글쎄, 적어도 난 아직 반박할 만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최태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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