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35 수정 : 2012.12.29 02:21

최태섭
21세기 들어 모든 매체들은 표현력에서는 극도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작 이야기 자체는 어마어마한 기근에 시달렸다. 영화만 해도 그렇다. 아이맥스, 3D, 4D 등 눈 돌아가는 표현 기술의 발전이 이어졌고,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다크나이트> <어벤져스> 같은 거대한 영화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들은 대부분 리메이크, 리부트, 실화(Based on real story), 만화나 소설의 영화화같이 빌려온 것이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다수 매체들이 자기복제와 클리셰(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웰메이드는 차고 넘치도록 많아졌으되, 새로운 이야기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기말을 채우던 상상력은 ‘Y2K’도 ‘앙골모아 대왕’도 없는 시시한 뉴밀레니엄과 함께 사라졌고, 희망은커녕 전망조차 안 보이는 이런저런 위기의 연쇄 속에서 속절없는 첫 10년이 허망하게 지나갔다.

 이 환난의 와중에 먹고살기 위해 쭈뼛거리며 면접관 앞에 선 이들은 새로운 것을 강요당했다. 이른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야기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주인공이기는커녕 주인공과 악당의 싸움에 휘말려 도망가는 군중 무리에 섞여 있는 ‘행인 1’이거나, 그마저도 겪지 못하고 집에서 TV로 그 뉴스를 지켜볼 화면에 안 나오는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돈도 시간도 없는 이들의 일상은 뻔하고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구멍이라는 포도청의 지엄한 명령 아래 많은 이들은 오글거림을 애써 참아내며 표절과 싸구려 감동과 억지로 쥐어짜낸 의미로 가득한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를 자기소개서라는 형식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 맨숭맨숭한 이야기를 면접관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뱉어버리기 일쑤였다.

 웹툰이 만화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많은 말이 있다. 그중 가장 서글픈 것은 웹툰이 ‘만화=공짜’라는 인식을 만들어버린 탓에 다른 모든 종류의 유료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기성 작가들도 하나둘씩 웹툰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리고, 결국에는 한국 만화의 운명이 포털사이트 손에 맡겨지는 된 형국이 됐다.

 그러나 웹툰이 가진 순기능도 있다. 무엇보다 웹툰은 기존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했을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리는 역할을했다. 가령 ‘일상툰’은 웹툰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인기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했을 대표적인 장르다. 그뿐만 아니라 극만화에서도 기존 출판 만화에 비해 부담이 없는 작화와 연출 방식으로 인해 이야기만으로도 독자를 휘어잡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무엇보다 많은 웹툰 작가들은 기존 만화시스템 아래에서는 작가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직접 그린 만화를 올리던 이들이,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웹툰에 진출하고 인기 작가가 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따지고보면 웹툰계의 형성 자체가 작가와 독자의 직접적이고 빈번한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이 솟아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웹툰은 이야기의 대기근 와중에, 그동안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은 하나의 통로다. 면접관에게도, 출판사에게도 무시당했을 것이 자명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당당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구천을 떠도는 이야기들이 있다. 사실 이것을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것들이다. 이른바 ‘병맛 웹툰’이라고 불리는 이 웹툰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우리가 포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이야기들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황당하고, 허망한 것들이 넘친다.

 사실 병맛 웹툰의 일부는 메이저 세계에서 활약 중이다. 심지어 이 메이저 병맛들은 오늘날 웹툰계에서 핵심 장르 중 하나다. <이말년시리즈> <정열맨> <불암콩콩코믹스> <미숙한 내친구는 G구인> 등 연재 수로도, 인기로도 다른 만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런 만화 역시 황당한 전개와 고약한 연출을 특징으로 삼는다. 또 초창기에는 ‘발로 그렸냐’는 비아냥을 들었을 만큼 그림체 역시 기묘하다.

엉덩국의 중 일부. (왼쪽) 중 ‘본격 한자급수 따는 만화’의 일부. (오른쪽)

 그러나 막상 이 만화들은 최초의 ‘병맛 만화’라는 개념을 창시했던 작품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웰메이드(?)다. 최초의 병맛 만화들은 그림판에 마우스를 이용해 그린 추상화에 가까워 보이는 작품들이거나, 심지어 공책에 낙서처럼 끄적여 대충 스캔한 것들이었다. 이해를 위해 나름 유명한 작품 하나를 보자. 얼마 전까지 수많은 패러디를 쏟아낸 엉덩국의 단편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다. 어느 날 주인공 존슨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게이바에 간다. 그런데 게이바에는 무서워 보이는 게이들이 앉아 있다. 겁먹은 존슨은 “저 그냥 나갈게요”라며 꽁무니를 뺀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땐 안 된단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존슨의 엉덩이를 때린다. “으아아, 왜 때려요?” 이어서 돌아오는 한마디 “찰지구나!” (이하 생략)

 실로 설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보처럼 느껴진다. 그럼 이번엔 다른 작품을 보자. 이번에는 다른 작가(이름이 부적절해서 소개할 수 없다)의 <본격 한자급수 따는 만화>다. 한자 시험을 보러 간 김탁봉은 커닝을 하기로 하고 마법천자문 볼 견(見)을 사용하지만, 곧 시험감독관의 ‘펀치 펀’에 제압당한다. 둘은 ‘킥 킥’과 ‘피할 피’로 합을 주고받다가 김탁봉의 ‘카운터카’를 맞고 감독관은 ‘고자될 고’가 된다. 하지만 이어 그들의 싸움을 멈추게 하며 마법영어, 마법일어, 마법불어, 마법태국어, 마법아랍어가 등장해 서로 다투다가 “그런 거 없고 위아더 월드”가 되어 손에 손잡고 벽을 넘다가 “벽을 못 넘어서 싸그리 사망”으로 끝이 난다.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피와 멘탈붕괴가 서라운드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아마 일반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스토리와 그림을 보고 최초로 느끼는 감정은 분노일 터이다. 그런데 의외로 분노는 오래가지 않는다. 대신 이런 만화를 보며 느낀 황망함과 어이없음에 대한 고민이 몇 초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곧 정체모를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이 웃음은 어찌 보면 항복의 의미에 가까운데, 법과 상식, 이해관계와 수많은 룰, 예측 가능성과 뻔함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그것을 ‘서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떤 괴상망측한 이야기에, 심지어 평소 같으면 혐오해 마지않으며 화를 냈을 그런 이야기에 굴복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의 ‘나’는 이상하고 은밀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마 앞에 늘어놓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떻든 간에 잠시나마 ‘와장창’ 하고 박살나는 찰나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왜 이런 이야기 부스러기들을 만들어내는 걸까? 한 가지 실마리는 이런 만화를 그리고 그것에 열광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10~20대 초반의 젊은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대충 꼽아도 입시 경쟁, 학교폭력, 교사와 부모의 압박, 놀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의 부재,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박탈감 같은 것이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굼벵이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만큼의 난이도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가설에 따르면, 이 찌꺼기 같은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향한 욕망과 에너지가 최악의 환경을 만나 만들어지는 뒤틀린 결과물이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독성과 자기 비하, 그로테스크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뒤에 찾아오는 뒷맛은 쓰다. ‘병맛 만화’라는 이름 자체는 물론이고, 소수자에 대한 비하적 묘사가 걸핏하면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는 애초에 이들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재료가 그런 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욕설과 폭력이 아니면, 자기와 타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면 이야기를 만들 수조차 없다. 언젠가 엉덩국은 “만화와 병맛 만화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있다. 만화는 문화를 반영하는데, 세상이 병맛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글쎄, 적어도 난 아직 반박할 만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최태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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