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05 18:25 수정 : 2014.02.04 10:50

박상언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 모델예술학부 교수는 187cm의 큰 키 덕분에 젊은 시절 패션모델로 활약했다.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 굵은 얼굴선을 가진 그는 한때 ‘동양인 최초의 제임스 본드’를 꿈꾸기도 했다.나도원
서울 이태원 삼거리 건너편에는 해밀턴호텔의 외벽을 장식한 전구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예쁜 카페와 흥겨운 클럽을 찾아나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태원 뒷골목으로 흘러들어갔다. 몇 년 전에 잠시 인사를 나눈 사이이긴 하지만, 그동안 피차 외모가 완전히 변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 두 남자는 작은 카페의 창문을 통해 사람들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누가 보아도 직업이 모델처럼 보일 박상언씨는 실제 모델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 모델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2007) 등에 출연한 바도 있다. 공수창이 감독하고 천호진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병영-호러영화에 가까웠다. 평론가 식으로 말하면, 분단 상황이 만든 병영국가의 비극을 제한된 공간과 특이한 소재로 압축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같은 복장을 한 병사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박상언씨를 알아보기란 훈련소 입소식에서 자식을 구별해내는 가족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선 쉽지 않아 보인다.

제임스 본드 꿈꾼 감귤농장의 어린 일꾼

상언씨는 1980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현지인에게나 외지인에게나 제주도는 아름다운 곳이다. 해마다 제주를 찾는 내게 인상 깊었던 풍경은 무와 양파 수확이 한창인 밭의 모습이었다. 그냥 반찬거리로 생각돼선지 무꽃이 얼마나 예쁜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고 나면 놀랄 수밖에 없다. 외지인에게 독특하게 보인 또 다른 풍경은 밭 중간중간에 있는 무덤들이었다. 자녀들은 부모의 묘 주위에서 농사를 짓고, 그런 모습을 죽은 이들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상언씨는 작지 않은 규모로 감귤 농사를 짓던 부모와 함께 농장에서 자라다시피 했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일 잘하는 일꾼이었던 그는 비닐하우스 골조를 나뭇가지 위의 다람쥐처럼 타고 다닌 모양이다.

역시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가 기억하기로도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밭에서 마늘종을 뽑고 고춧잎을 땄다. 아이들이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과후에 볕을 쐬며 바다에서 난 김을 발에 떠서 말리며, 밭에서 김을 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또래 친구들 중에는 경운기를 잘 모는 녀석들까지 있었다. 아주 오래전이어서도 아니고 무척 가난해서도 아니며 아동노동 착취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보다 지금 아이들이 더 안전해진 것도 아니고, 놀이터를 텅 비워놓고 학원들을 쏘다닌 덕분에 더 똑똑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커진 덩치만큼 어른스러워지기는커녕 더 나이가 들어 상급학교를 졸업해서도 그때 초등학생들이 보살피던 더 어린 동생들로 남아버린다. 부모들은 고가의 탑승권을 사서 안전하고 표백된 컨베이어벨트 위에 자식을 올려 태워주는 것이 좀 아니다 싶으면서도 하던 대로 충직하게 밀어붙인다. 세상이 이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시골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상언씨, 그리고 그를 연결시켜준 누군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면 가치 있는 경험을 선물받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떤 기질이 성장한 뒤에도 몸에 남게 된다. 상언씨도 그랬을 것이다. 대신 최신 대중문화와의 접촉면은 넓지 않기 마련이다. 큰형과 함께 제주 시내에 있는 아카데미극장에서 <구니스>를 본 것이 첫 영화 관람이었다고 회고하는 상언씨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 상언씨는 잡지를 들추다가 남자 모델들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1990년대 후반 당시 가장 주목받은 모델인 차승원·구필우·이기웅·채태석의 사진과 프로필이 기사를 채우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모델‘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물론 이런 기억이란 대개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로부터 정작 자신은 기억 못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탤런트가 되려고 하더니 정말 그쪽으로 갔구나”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기도 했던 것처럼. 어쨌든 키가 187cm인 상언씨는 졸업을 앞두고 패션모델을 꿈꾸었고, 이렇게 ‘동양인 최초의 제임스 본드’가 되겠다는 야망도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울엔 나보다 키 큰 사람이 많더라

“서울에 너 정도 생기고 너만큼 키 큰 사람들이 널렸다.”

10살 터울인 큰형은 응원해주기는커녕 냉엄한 현실을 제주도 고등학생에게 직언해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모와 큰형은 상언씨에게 대학 진학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권 대학의 모델과에 지원하고 면접을 본 날, 상언씨는 난생처음으로 자신보다 키 큰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다행히 ‘15 대 1’의 경쟁을 뚫고 진학에 성공한 상언씨는 유학을 시작한 서울 동교동과 학교가 있는 경기도 평택의 송탄을 오갔다. 미군부대가 있는 그곳에는 정작 부대찌개집이 별로 없었는데, 훗날 미군부대가 있는 이태원에 거주하며 감자탕집을 찾아다니게 된 것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때 다닌 학교의 모델과에 유명한 모델이던 이복영 교수가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선지 상언씨도 패션모델로 데뷔할 수 있었고, 2000년을 전후해 활동을 시작하여 S.F.A.A(Seoul Fashion Artists Association), ‘서울 컬렉션’ 등에 참가했다. 2003년에는 이창영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 <게놈 월드>(Genome World)에도 출연했다. 모델뿐만 아니라 연기자의 길에도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김재권 감독이 이끈 극단 ‘연어’에 들어가 연기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모델회사에서도 연기 등을 조금씩 배우긴 했지만, 그것이 기술에 가까웠다면 극단에서는 그 이상의 깊이로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연기력에 대한 칭찬을 받으며 2006년 연극 (김재권 연출)를 시작으로, 2007년 연극 <압구리 길다방>(김문학 연출)과 <달링>(고유미 연출) 등에 출연했다. 하지만 본격 상업 장편영화인 촬영장은 상언씨에게 자기반성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더 큰 경험이었다.

모델 활동에 이어 연기를 시작할 무렵, “서울에 너 정도 생기고 너만큼 키 큰 사람들은 널렸다”고 직언한 큰형1과 당분간만 같이 살기로 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태원에 머물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상당 부분의 활동이 이태원 거주 시절에 벌어졌다.

연극과 음악까지… 만능 엔터테이너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태원은 꽤 변모했다. 그때만 해도 미군 병사와 백인계가 많았다면 지금은 중동계 이주자들을 더 자주 볼 수 있는 동네다. 대로변의 상권 규모가 달라졌고, 어딘가에는 재미있는 가게와 공간이 나타난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사람이자 이태원 주민이기에 문화에 대한 경험과 식견이 높아진 측면도 없지 않다. 다른 인종과 다양한 문화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들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밤(술)문화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성전환자와 성소수자가 많은 동네에 살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도 했지만 마음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다.

특이한 기회가 찾아왔다. 외부 문화에 개방적인 일본에는 하와이와 관련된 콘텐츠를 생산·유통하는 회사가 적지 않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음원 관련 일에 종사하는 지인이 일본의 기획자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하와이 음악인 훌라와 케이팝(K-Pop) 한류를 접목한 음반을 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이 오디션에 별 기대 없이 응했다가 보컬로 발탁된 상언씨는 여러 사람들이 불러 수록한 11곡 중에서 무려 5곡이나 부르며 가수로 데뷔했다. 이 옴니버스는 <가요 훌라(Kayo Hula) Vol 2>(2011)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발매됐고, 나아가 솔로음반으로 ‘인연’이라는 뜻을 지닌 (2011)까지 발표했다.

제주도에서 자란 청년이 이태원에 살며 일본을 매개로 하와이 음악을 담은 음반을 발표하게 된 것도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남태평양에서 저녁 식사 데이트의 허락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뜻이며, 아르헨티나에선 외모에 대한 농담에 관대하고, 반면 지중해 국가에선 동성 간에 손을 잡고 다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은 문화 차이는 재미있다. 제주도는 고립된 만큼 보전된 문화를 지녔다. 해류와 문화의 관계도 흥미로운 역사다. 상언씨의 활동은 해류와 무관한 시대이지만 어쩌면 더 큰 문화 교류의 시류를 보여주는 데이터일 수도 있다.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에서 모델예술과 교수를 맡게 된 이후 제자와 후배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자기관리를 강조한다. 연기와 노래에는 최소한 몇 분의 오디션 시간이 주어지지만, 모델에게 허락된 시간은 사실상 몇 초에 불과하다. 내면의 경험과 기운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모델은 옷을 입는 직업이지만 옷을 벗을 수도 있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모델만이 아니라 관련 분야로 진출하는 가능성 혹은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이상은 ‘박상언 교수의 지론’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서 ‘가화’는 ‘만사성’이라는 목적을 위한 전제가 아니다. ‘가화’ 없이 만사성이 무슨 소용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수신’은 ‘평천하’라는 목적을 위한 전제가 아니다. ‘수신’ 없이 ‘평천하’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언씨는 또 다른 경험을 준비하고 있다. 2014년 크랭크인할 계획인 장편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상태이고, 일본어 번역사 자격증 시험도 준비할 계획이다. ‘동양인 최초의 제임스 본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일본 활동을 경험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 냄새 나는 이태원이 좋다

외모나 이력과 달리 그는 지금도 ‘뒷골목 취향’이다. 서울 홍익대 앞에 살던 시절이나 모델로 일하며 강남 등지를 돌아다닐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술 많이 먹지 말라’고 한마디씩 하는 이모님들이 있는 가게를 찾아 감자탕에 소주 한잔 기울이는 걸 즐긴다. 겉으로는 휘황찬란해 보이는 이태원의 뒷골목, 즉 속살에는 사람 냄새가 남아 있다. 상언씨는 이태원이 이태원일 수 있게 해준 것, 이태원이 이태원일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의 모습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마찬가지 아닐까. 선물이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닌데, 좋은 게 비싼 경우는 많다. 그런데 꼭 좋아야 할까? 건강과 환경을 생각한다는 취미생활을 위해 고가의 자전거와 장비, 고가의 등산용품과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 입어도 될 정도의 옷, 심지어 차라리 편안한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고가의 캠핑세트를 장만하고 뿌듯해하는 유행을 보면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마저 산업이 된 시대일수록 ‘촌사람’ 마인드가 필요하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은 새롭고 세련된 걸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태원에서 감자탕에 소주 한잔 할 때, 마음이 가장 편합니다. 변해서 좋은 것이 있고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태원에 사람 냄새가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1 박상언의 큰형은 <나·들> 2호(2012년 12월) ‘이태원 연대기 2’에서 소개한 ‘록의 여행자에서 이태원 주민으로- 음악평론가 박은석’씨다.

글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이매진어워드 선정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 노동당 문화예술위원장이다. <결국, 음악> 등의 책을 썼으며, 지난해에 <시공간을 출렁이는 목소리, 노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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