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28 04:12 수정 : 2012.12.28 04:13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사진 왼쪽)와 그의 저서 (왼쪽부터).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그의 저서 (왼쪽부터). 한겨레 강재훈
1980년대 후반에 20대의 진중권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고, 10대의 박노자는 사회주의 국가에 살았다. 당시 남한의 운동권들은 이 사회가 북한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NL)과 소련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PD)로 나뉘었고, 진중권은 학생 사회의 주요한 PD 이론가 중 하나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외국어 재능으로 서양 언어로 된 좌파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소련의 청소년들은 극도의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에 빠져 동양의 선불교 같은 사상에 심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한 명인 박노자는 대학에 가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희망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졌을 때, 29살 진중권은 혁명의 꿈도 함께 무너진다. 그때 19살 박노자는 대한민국 땅을 밟는다. 우연히 ‘한국사’를 전공으로 택한 그는, 교환학생이 되는 순간 또 한번 우연히 ‘북한’이 아닌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서 소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운동권 학생들을 만난다. 평생 민중을 위해 살아가겠노라 말하는 엘리트 대학생들을 만났을 때,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온 허무주의 청년은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한국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소련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박노자는 다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한편 소련이 무너진 후 사회주의의 꿈을 버린 진중권은 독일에 가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1993년, 진중권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10살 터울인 두 지식인의 삶의 궤적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에서 만난다. 사민주의자가 된 진중권은 1998년 이인화를 비판하는 글을 문예지에 보냈다가 <조선일보>를 조롱한 부분만 삭제당하는 경험을 한다. 이 희귀한 경험은 그에게 ‘일개 신문이 어찌하여 이렇게 권력집단이 되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조선일보>를 겁내지 않는 매체를 찾았다. 강준만의 ‘저널 북’ <인물과 사상>이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진중권은 ‘극우 파시스트 연구’를 연재하기 시작했고, 이 글은 1999년 유시민이 “세기말의 명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로 엮어 나온다. 이미 <미학 오딧세이>라는 인문교양서의 대중적 성공을 통해 유학자금을 마련한 진중권이지만, 5만 부가량 팔린 이 책의 성공은 그를 단숨에 사회참여 지식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불시에 애 아빠가 되면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진중권은, 강준만과 함께 ‘안티조선’ 운동의 초창기를 열어나갔다. 2000년 그는 김규항, 김정란, 홍세화 등의 안티조선 내 좌파 지식인들과 함께 <아웃사이더>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vs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편 러시아와 한국을 오가며 박사 학위를 받은 박노자는 한국 여성과 결혼한 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 한국학 교수로 건너간다. 그가 1991년 건너와 아직은 강고했던 남한의 운동권 학생을 만난 것이 하나의 우연이었다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외국으로 건너가야 했던 사정 또한 하나의 우연이었다. 박노자는 귀화했고, 한국 사회를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비평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귀화 백인이 연재하는 칼럼은 남한 사회의 담론지형에서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한겨레>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그의 연재 칼럼은 2001년 20만 부 가까운 판매량을 기록한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묶여 나온다.

외부 사회의 시선으로 한국 바라보기

지난해 7월 20일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에서 첫 주자로 나선 박노자 교수(왼쪽)가 서울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8일째 단식 중인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상임고문(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1990년대 들어 한국인들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를 점하며,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마 그 이전에는 외부적으론 서로 멸망을 바라는 북한 체제와의 극한 갈등, 내부적으로는 독재 정권과 민주화 세력의 투쟁 정도밖에 시선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한국 사회는 민주화와 경제 발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세계 속의 한국’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나타나게 되었을 게다. 타임머신을 타고 1995년으로 가서 출판시장을 살핀다면,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에리카 김의 <나는 언제나 한국인>과 함께 비소설 분야의 상위권에 내내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훗날 <한겨레> 기획위원을 거쳐 진보신당 대표까지 지낸 홍세화와 ‘BBK 진실 공방’의 주역이 되는 에리카 김은 물론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다. 하지만 당시 그들의 에세이는 한 개인이 다른 사회에 나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대로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진중권의 2002년 작 <폭력과 상스러움>은 외부 사회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구 세계에서 유학한 진중권이 서양 인문학 텍스트를 끌어와 한국 사회를 비평했다면, 서구 세계에서 태어나 한국사를 공부한 박노자는 동양의 한문 고전을 끌어와 한국 사회를 품평했다. 한 사람의 문체는 레닌의 공격성을 닮았고, 다른 사람의 문체는 동양의 문사를 닮았다.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비슷한 두 사람의 사회 평론은 한국 사회의 시민들, 특히 청소년과 대학생들에게 민감하게 소비되었다.

 이제 막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업을 성취하고 눈을 돌려 ‘우리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고민한 한국 사회의 시민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짧은 기간 전개된 출판시장의 진보·좌파 담론의 전성기는 이와 관련이 있다. 민주화의 진전은 ‘전체적인 사회의 급속한 우경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성된 조그만 진보·좌파의 필드’를 만들어냈다. 가령 1970년대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라고 불린 고 리영희 선생을 생각해보자. 1970년대 리영희의 저술은 투박하게 말하면 중국 공산주의를 한국 자본주의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리영희는 중국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조류를 보면서,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대항마로 존속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바깥을 성찰하면서, 리영희의 사회평론은 ‘현실성’을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소련의 민중들이 레닌 동상을 무너뜨렸고,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리영희가 그 후에 내세운 말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였다. 따라서 1980년대 학생이 ‘좌파’를 자칭했을 때와 1990년대 학생이 ‘진보’나 ‘좌파’를 말했을 때, 두 사람은 비슷한 단어를 말했지만 의미의 영역에선 현격한 차이가 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를 꿈꿨던 것이고, 후자는 진보·좌파들이 담론 시장에서 일정한 몫을 가지고 있는, 우리보다 정치적으로 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를 원했다. 사회 구성원들 의식의 자본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생겨난 새로운 꿈은, ‘체제의 극복’이 아니라 일종의 ‘체제의 정상화’(!)를 요구했다. 진중권과 박노자는 서구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평가했다는 점에서 그런 작업을 수행한 대표적인 좌파 비평가들이었다. 박노자가 2001년 잡지 <아웃사이더>에 편집 위원으로 합류하면서 마침내 그들의 삶의 궤적은 포개진다.

 

포개졌다 벌어진 간극

지난해 6월 6일 서울 광화문 해치광장 계단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한 커피 파티에서 진중권 교수(앞줄 오른쪽)와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왼쪽)가 대화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물론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새는 한쪽 날개로 고공비행을 지속했다. 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박노자 등이 만들어가던 출판시장 진보 담론 전성기의 문은 닫혔고 ‘파이’ 크기는 수십 배 차이지만, 기존 유명 작가의 소설만 계속해서 팔리는 문단 상황과 비슷하게, 그들 이후로 다른 좌파 논객은 등장하지 않고 오직 그들만이 그럭저럭 책을 팔고 있다. 소련을 향해 가다가 유럽으로 꺾인 진중권과, 소련에서 한국을 향해 오다가 유럽으로 꺾인 박노자 삶의 궤적은 2001~2008년까지 그럭저럭 겹쳤다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이념’이었다. 진중권은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박노자는 노르웨이에 남았지만, 그와 별개로 남한 사회에서 진중권의 정치적 포지션은 점점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박노자의 그것은 점점 왼쪽으로 이동했다.

 2002~2003년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오히려 진중권이 박노자보다 왼쪽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진중권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이미 강준만과 불화했고, 참여정부 출범 후 정권 초기에 이미 그 보수적 한계를 질타하는 쪽에 서있었다. 하지만 당시 박노자는 동지들끼리 잘해보자는 쪽에 가까웠고,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극단적 대척점에 서 있지 않았다.

 그랬던 진중권이 어찌해서 오늘날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예찬을 받는 대중적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랬던 박노자가 어째서 지금은 가장 편협한 좌파 지식인의 대명사가 된 것일까. 나는 다른 위치에서 출발한 두 사람의 궤적이 포개졌다 다시 어긋난 것은, ‘멸망’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위치에서 2개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중 하나는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 역시 한국 사회의 맥락에선 큰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전자는 소비에트연방이요, 후자는 민주노동당이다. 소련의 붕괴 앞에서 진중권이 사회주의를 버리고 사민주의자가 되었고, 소련의 붕괴 이후 한국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박노자가 허무주의자에서 진보주의자가 되었음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소비에트연방과 민주노동당

 남한 사회에서 민주노동당이란, 노동조합 조직에 기반을 둔 대중적 진보 정당 운동의 모델이었다. 60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배타적 지지를 받던 이 정당 안엔 과거 NL과 PD로 활동했던 1980~90년대 학생운동권들과, 출판시장의 진보 담론을 통해 정치화된 그 이후 세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PD는 더 이상 소련을 모델로 삼을 수 없었고 NL은 더 이상 북한이 모델이라 주장할 수 없었지만, 전자가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후자가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식의 차이는 여전했다.

 진중권과 박노자가 민주노동당의 당원이거나 지지자였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당내에서 당연히 PD 정파를 지지하는 쪽이었는데, 진중권은 사민주의자들을 선호했고 박노자는 ‘다함께’ 같은 국제사회주의자 그룹과 교류하게 되었다. 아마 남한 사회에서 진보 정당이 착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모델이던 이 정당은 민주노총이 ‘정규직-대공장-남성-중년-노동자’ 틀 안에 갇혀버리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활주로만 요란하게 달릴 뿐 끝내 비행하지 못했다. 비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으려는 NL과 PD의 투쟁, 그리고 NL의 종국적 승리는 결국 분당이라는 파탄으로 귀결된다. 진중권과 박노자는 이때 분당을 지지하고 새로 만드는 진보신당으로 건너왔는데 이것 역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민주노동당의 ‘멸망’은 분당으로 완료되지 않았다. 이 당은 공식적으로는 2012년 총선 직전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탈당파들과 통합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모델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 당의 역사는 상징적으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 아주 잠깐 더 지속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경선 부정 사태로 갈라질 때, 그리고 끝내 원내 재진입에 실패한 진보신당의 상근자들이 총선 개표날 술에 취해 민주노동 당가를 불렀을 때,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남한 사회에서 가장 강력했던 진보정당 운동의 한 모델은 종언을 고했다. 

 진중권은 민주노동당에서 ‘스타’가 되었고, 진보신당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노회찬과 심상정이 탈당해 통합진보당으로 가는 순간 정신적으로 당적을 상실했다. 그의 정신 세계에서는 세상에 세 종류의 주장이 있다. (1)실현 가능하며 실현된 주장, (2)실현 가능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주장, (3)실현 불가능한 주장.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실현 가능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주장을 고수하는 합리적 진보주의자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소련이 망할 때 사회주의자에서 사민주의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웠고, ‘민주노동당 모델’이 파산했을 때 당적을 상실한 것도 자연스러웠다. 다만 안쓰러운 것은, 그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파산한 이유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민주노동당 파산의 책임은 NL에 돌렸고, 진보신당 파산의 책임은 PD에 돌렸다. 말하자면 그들이 아직도 북한이나 소련에 발목이 잡혀 사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구성원의 신념과 상관없이 사실상 남한 사회의 사민주의 정당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구성원의 이념에 파산의 책임을 돌리면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사민주의자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현실적 맥락에서 지금의 그는 정권 교체를 절대시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을 위한 비평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이명박 정권 아래서 당한 개인적 고난은 그런 선택을 이해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 박노자는 그가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 글을 쓸 때는 부정한 현실사회주의를 다시 반추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나꼼수>에 열광하는 남한 사람이 장군님 사망에 눈물 흘리는 북한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고 말하고,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나쁘지 않은 사회였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젊어서 독재자를 비판하다가 중년 즈음에 박정희 찬양자가 되는 보통의 한국 아저씨들의 심리구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소련의 노동자 처우가 남한보다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박정희는 스탈린처럼 농민들을 학살한 적은 없다. 여하튼 박노자는 진중권과 정반대로 ‘민주노동당 모델’의 종말에서 사회주의를 강하게 요구해야 사민주의라도 얻을 수 있다는 통찰(?)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파행’은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이념적 좌표도, 경험적 지반도 상실한 남한 사회의 진보 담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진중권과 박노자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글을 보고 자란 나와 그 이하 또래 청년 진보주의자들 대다수가 ‘뭐가 망하면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vs 뭐가 망하면 왼쪽으로 가는 남자’의 대립각에서 한편을 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1980년대에 운동하고 1990년대에 공부하며 2000년대에 실천한 이 선배 세대들이 퇴장한 이후의 진보 담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한윤형 <미디어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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