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3:04 수정 : 2014.01.07 10:53

중2 때 담임선생은 우리에게 인문학적 정신을 불어넣으려 애쓰시는 분이었다. 그 일환으로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읽게 한 뒤 독서토론을 시켰다. 첫 번째 책은 H.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예상보다 진지했던 첫 토론회가 끝난 뒤 선생님은 다음달에 토론할 책 제목을 말해주셨고, 그날 저녁 난 어머니에게 받은 책값을 들고 동네 서점에 갔다.

“<개미알> 있어요?”

책방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책은 없다고 하셨다. 좀더 큰 책방에 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뒤 책 사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독서토론회 당일이었다. 어차피 토론회 때 한마디도 안 할 거라 크게 걱정은 안 했지만, 변명조로 짝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 책 사려고 책방에 갔더니 없어서 못 샀어.”

짝이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요 앞 서점에선 쌓아놓고 팔던데. 그거 무지 유명한 책이야.”

그러면서 친구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데.미.안. 말귀를 잘 못 알아먹는 내 귀가 제대로 한 건을 한 경우였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올해,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독서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내 저서에 대한 강연을 하고, 학생들 토론 지도도 하는 자리였는데, 내가 앉은 모임에서 다루는 책이 하필이면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을 읽은 학생들은 인생이 어떠니 구원이 어떠니 하면서 심도 높은 토론을 벌였고, 가끔 토론이 막힐 때마다 지도를 맡은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때면 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라든가, “사실 우리는 모두 데미안이다”- 난 데미안이 사람 이름이라는 걸 그 토론회 덕분에 알았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는데, 희한하게도 학생들은 내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줬다. <데미안>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때였다. 민음사 번역판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중2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하는. 책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급우들한테 이런저런 괴롭힘을 당한 시절도 있고, 누가 봐도 ‘타락’이라고 할 만한 어려운 시기를 겪은 적도 있는데, 그 책을 읽었더라면 왠지 그 시기를 조금은 더 잘 보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마 전, 초등학생 ‘독서왕’들과 함께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3·4학년인 그들은 1년에 300권 넘는 책을 읽는다고 했는데, 그들이 읽었다는 책의 목록이 날 놀라게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더불어 <데미안>이 목록에 들어 있었으니까. 궁금했다. 40대 중반인 내게도 충분히 난해한 그 책을, 인생의 쓴맛이라고는 본 적이 없었을 열 살배기가 얼마나 이해했을까? 게다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니, 좀 너무하지 않나? 독서왕의 부모들은 그저 자녀들이 자랑스러웠을 테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세계의 거장들이 써놓은 작품을 읽는 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작품을 이해하는 건 둘째치고, 책이 아이를 너무 조숙하게 만든다는 게 문제다. 괴테와 헤세를 읽은 아이가 또래들과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조숙한 독서가는 남들이 따돌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며, 그 시기에 배워야 할 사회성을 익히는 대신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자랄 우려가 있다.

이른 독서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 나이 또래는 제대로 된 책 대신 축약본을 읽는다는 데 있다. 국어책에 나왔다는 이유로 우리 세대 대부분이 모파상의 <목걸이>를 따로 읽지 않은 것처럼, 줄거리를 아는 책을 굳이 읽고 싶지 않은 건 읽을 책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돈키호테>를 계림사에서 나온 축약본으로 읽었던 우리는 그래서 실제의 <돈키호테>가 700쪽이 넘는,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400쪽이 넘는 분량으로도 다섯 권에 이를 만큼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리라. “어떻게 저 나이에 <베르테르>를 읽었답니까?”라는 내 질문에 제작진이 “애들용으로 나온 걸 읽은 거라더군요”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방송에 나왔던 초등학교 독서왕들 또한 축약본을 읽었을 터, 그네들 역시 나중에 제대로 된 책을 읽지 않을 것이고, 그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바도 깨닫지 못할 것 같다.

최근 몇 달 사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의 진상도 새누리당 의원들이 남북 정상회담 전문 대신 국가정보원이 만든 8쪽짜리 축약본을 읽은 탓이었다. 안 그래도 책과 담을 쌓고 살아 난독증이 심한 분들이 축약본을 읽었으니 뭘 얼마나 이해했겠는가? 그래서 주장한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세계명작을 읽지 못하게 하자고. 그리고 축약본 대신 웬만하면 제대로 된 책을 읽도록 하자고. 혹시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스마트폰 하는 대신 축약본이라도 읽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한 내 대답. “축약본을 읽게 하느니 차라리 카톡을 하는 게 더 낫습니다.”

글 서민 수줍음이 너무 많아, 같은 사람을 다시 볼 때도 매번 처음 보듯 쭈뼛거린다. 하지만 1시간 이상 대화하다보면 10년지기처럼 군다. 기생충학을 전공했고, 현재 단국대 의과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기생충의 변명>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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