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14 수정 : 2014.01.07 10:51

‘장미여관’은 지금은 사라진 ‘만요’(漫謠)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이 ‘유치한’ 밴드의 거칠고 조야한 날것의 감수성, 문화를 입지 못해 자연에 머물러 야만을 드러내는 닦임 모자란 감수성이야말로 세련됨의 질료이자 원천이다.뉴시스
산발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기름과 땀으로 범벅된 듯 번지르르한 얼굴, 다소 과하게 살집이 붙은 듯 보이는 몸과 커다란 덩치. 5인조 클럽 밴드 ‘장미여관’ 육중완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덥고 느끼하다. 덥고 느끼하기로야 설경구도 그렇고 원빈도 그렇지만, 이들 모두의 느끼함은 그 느낌이 제각각이다. 육중완의 느끼함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느끼함이다. 이미 잘 알려졌다시피 육중완은 장미여관에서 노래하고 기타 치는 아티스트다. 모든 아티스트가 봉만대 감독과 같지는 않지만, 육중완은 어딘가 그와 비슷하다. B급 에로를 지향한다는 점, 대략 이름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하는 일 혹은 이미지가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생김새까지 둘은 많이 닮았다. 더구나 스스로 그들이 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게만 머무르기 힘든 마니악한 작업에 대단한 자부심과 단단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장미여관은 부산에서 상경한 서울 홍익대 앞 클럽 밴드다. 실제의 나이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중년 밴드로 알려져 있지만 평균나이 서른넷의 젊은(?) 뮤지션들이다. 스스로를 ‘더티 섹시 비주얼 밴드’로 소개하는 이들이 지향하는 음악은 솔직하고 즐겁고 야하고 음탕하다. 이들이 알려진 건 먼저 <탑밴드>(KBS)를 통해서지만, 지금 같은 인기를 얻은 계기는 MBC <무한도전> ‘자유로가요제’에 출연한 일이다. <탑밴드>에서 노래한 <봉숙이>는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는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웃게 만드는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무한도전>에서 보여준 솔직한 모습은 이들과 이들의 음악에서 진정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행사 때문에 가요제 공연 파트너를 선택할 수 없었던 장미여관에 남겨진 캐릭터는 (음악적) 스킬 레벨 0의 고집 센 노홍철이었다. 노홍철과 장미여관은 ‘장미하관’을 결성하고 <오빠라고 불러다오>를 불러 대단한 반응을 끌어냈다. 이 노래로 노홍철은 심지어 “노래 잘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웃기고 재미있는 우리 노래를 ‘만요’(漫謠)라고 부른다. 원래는 만담의 중간에 끼워 불렀던 노래를 의미했지만 독립적인 가요 장르로 해학적인 노래들을 일컫는다. 한복남의 <왕서방연서>(1936),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1938), 김정구의 <빈대떡신사>(1943), 김용만의 <회전의자>(1965) 등이 그 고전이다. 현재는 그 명맥이 흐릿하기 때문에 단언하기 힘들지만,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1993·김정구의 노래와 비슷해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이나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 막혀>(1995) 등이 이들의 뒤를 이을 만한 곡으로 언급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김흥국은 코믹한 퍼포먼스로 만요와는 다른 차원에서 대중가요의 또 다른 즐거움을 보여주었다. 만요가 지금까지 우리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장미여관은 이 장르의 간판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만요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할 만한 노래를 그에 걸맞은 퍼포먼스와 함께 공연함으로써(<무한도전> ‘자유로가요제’ 장미하관의 <오빠라고 불러다오>를 보시라) 이 장르를 완성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유치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치할 수 있다. 아니 유치해도 된다. 어떤 대중문화는 세련됨의 극점을 향하고, 어떤 대중문화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유치한 게 좋다는 말이 아니라, 유치함이 우리 삶의 한 모습이고 유치한 대중문화 또한 그런 삶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유치하다는 것은 높고 낮음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로가요제의 병살(김C·정준하)이 부른 <사라질 것들>과 <오빠라고 불러다오>는 서로 다른 노래일 뿐, 더 좋거나 나쁘지 않다. 유치한 것에 대한 공격 혹은 유치함에 대한 거리낌은 일종의 ‘시칠리아의 암소’와 같은 근대의 기획이며 권력의 비뚤어진 미학이다. ‘시칠리아의 암소’는 고대 아테네의 조각가 페릴레스가 만들어 시칠리아의 폭군 팔라리스에게 바친 고문도구였다. 지극히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련된 예술품이던 시칠리아의 암소는 폭력과 미학이라는 권력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시칠리아의 암소에 희생된 어떤 권력이든 그림을 그리고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공장을 짓는다. 권력은 그것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이미지를 통해 권위와 존경 그리고 힘을 획득하고자 한다. 거대한 토목적 기념비, 스펙터클한 이벤트, 도시와 공간의 재개발과 고급을 지향하는 문화예술 정책은 권력과 함께하는 작용점이자 그 결과들이다.

정말 오랜만에 튀어나온 ‘장미여관’이라는 이름(1980년대 서울 신촌에서 대학을 다닌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386 문화의 성지,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었다)의 이 밴드는 용감하게도 권력의 미학을 거슬러 대중의 일상적 삶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한편으로 지난 시간을 흔들어온 토목권력과 개발권력, 그리고 엄숙함과 진지함을 강요하는 위선적 감수성에 대한 염증을 드러낸다. 장미여관은 다만 현실의 한 그림을 노래로 연주할 뿐이다.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나랑 하룻밤 자자고 테킬라까지 사줬는데, 그냥 들어가겠다니 너 정말 치사하구나”라고 말하는 속 검은 남자 이야기를 ‘그저 그랬다고’라는 어투로 들려주는 게 그들의 노래다. 사람들은 이들의 노래 속 화자나 봉숙이에게 이입하지 않는다. 이들의 노래는 속 검은 남자의 노래도 혹은 그 검은 속을 폭로하는 봉숙이의 노래도 아니다. 어떠한 의미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그림을 보여주는 이들의 노래는, 그러므로 주의와 주장으로 어지럽혀진 우리의 귓속을 청소한다.

권력이 그리는 의미의 궤적, 그것을 흔히 규범이라 부른다. 규범을 따라 잘 그려진 그림에 대해 우리는 ‘세련되다’는 형용사를 부여한다. 잘 그린 그림에서 느끼는 즐거움,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세련됨의 한 귀퉁이에는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타자의 손길이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세련됨은 그러므로 잘 닦인 소외의 한 형식일지 모른다. 거칠고 조야한 날것의 감수성은 그러므로 타자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을 수는 없지만 세련됨으로부터 희생되기 쉬운 삶과 생명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드러낸다. 유치한 것은 문화를 입지 못해 자연에 머물러 야만을 드러내는 닦임 모자란 감수성이다. 그러나 이 닦임 모자란 감수성이야말로 세련됨의 질료이며 원천이다. 장미여관이 드러내는 감수성, 그리고 그것이 보태는 즐거움의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 박근서 대구가톨릭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나름 학생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 ‘텔레비전 코미디’로 학위를 받았고, 요즘 주된 관심사는 비디오게임이다. 닌텐도에 우리를 구원할 영성이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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