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3 12:09 수정 : 2013.12.03 13:43

5인조 밴드 ‘장미여관’의 노래에는 젊은 세대의 우울을 노래한다는 장기하에게는 없는 에로스가 있고, ‘홍대신’들의 멀끔한 소비적 이미지 대신 삶의 질척거림에 대한 진솔한 웃음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젊은이들에 대한 가장 디테일한 재현이다.한겨레 박승화
이제는 그게 얼마나 유치한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굳이 나만 알고 있다고 착각해버리고 싶은 ‘연예인’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책받침 뒷장에서 이탈리아 출신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의 뇌쇄적인 표정을 딱 인지했을 때, 우리 반에서 그 표정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꼭 나뿐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중학교 시절, 가수 고 유재하의 헌정 음반을 우연히 사서 몇몇 친구에게 ‘유재하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 순간의 벅차오르던 기분은 아직도 강렬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연예인’이 있다. 그게 누구더라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추하더라도.

물론 그런 감정들은 ‘팬덤’의 흔하고 보편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시시하게 정의해버리면 품었던 그 마음이 괜히 너무 아까워지는 것이다. 한때, 이건 꽤 오래이건 아니면 영원이건, 누구나 마음속에 펄럭이는 깃발을 품고 살았다. 남들은 모르는 어떤 마음이 동하는 어느 순간 그 깃발은 위로였고, 기억이었으며, 또 욕망이었다. 그런 것이 연예인이다.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내는 얕은 마음을 환기해주는 그런 존재.

그렇게 지난해 5인조 밴드 ‘장미여관’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아주 오랜만에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밴드 나만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당연히 아니다. 내가 장미여관을 처음 본 건 서바이벌 프로그램 <탑밴드>(KBS)에서였다. 지상파를 통해 전국으로 쏘아지던 전파에서 그들은 <봉숙이>를 불렀다. 소름이 돋았다. 간만에 수신료가 아깝지 않단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곤 이런 밴드가 왜 지상파에 나왔는가, 무턱대고 아까워졌다. 그 무대에 서기까지 장미여관이 거쳤을 무수한 난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시간을 돌파하기 위해 너무 잔인한 그 오디션에 오른 것이겠지만, 그냥 그랬다.

오늘의 장미여관을 있게 한 노래 <봉숙이>는 언제 들어도 세속적 의미의 ‘예술’에 가장 부합하는 절창이다. 읊조리듯 나무라며 타고 넘는 리듬과 흡사 어느 날 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내가 뱉어봤던 것 같기도 한 가사는 단연 압권이다. 나만 알고 싶을 정도로 아깝던 이 밴드는 <탑밴드> 출연 이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밴드가 되었고, <무한도전>(MBC) 출연 이후에는 아예 한국에서 가장 바쁜 밴드 가운데 한 팀이 되었다. 더디게 진행되던 세상의 관심은 두 번의 지상파 방송을 거치며 가속과 곱절의 비례로 늘어가고 있다.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 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 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중략) 야 봉숙아 택시는 말라 잡을라고/ 오빠 술 다 깨면 집에다 태아줄게 (태아줄게)/ 저기서 술만 깨고 가자 딱 30분만 셔따 가/ 아줌마 저희 술만 깨고 갈게요” -<봉숙이> 중

최근 몇 년 사이 유명해진 ‘홍대신’들의 공통점은 ‘홍대 앞’이라는 영토를 다분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재현하는 아이콘이었다. 우리 세대의 우울을 노래한다는 ‘장기하와 얼굴들’은 그러나 서울대 출신의 멀끔한 외모로 ‘홍대 앞에는 저런 멋진 선택을 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어필했고, ‘10cm’ ‘옥상달빛’ 등 몇 년 사이 메이저가 된 홍대신들 역시 소비로서의 ‘홍대 앞’ 이미지에 더 부합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홍대 앞의 ‘낮’이었다. 하지만 장미여관은 거의 유일하게 삶의 질척거림에 흔들리고 개성의 경연 속에 피폐한 그 거리의 ‘밤’과 닿아 있다. 그래서 역시나 유일하게 끈적하다.

<봉숙이>는 물론이고 매일 술만 먹고 사고만 치는 백수건달 친구를 보는 짜증과 우울을 폭발시키는 <너 그러다 장가 못간다>(2011)를 시작으로 실연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는 마셔야 하고, 술 마시는 사람이 다 나 같다고 외치는 <나 같네>(2011)까지 장미여관의 노래는 우울과 그 우울의 동반자가 되는 값싼 술과 그렇게 취할수록, 그러나 더 정돈과는 멀어지는 삶의 궤적에 대한 유쾌한 한탄으로 점철돼 있다. 장미여관의 노래에는 우리 세대의 삶을 노래한다는 장기하에게는 정작 없는 에로스가 있고, 묘사력이 탁월하다고 평가되는 10cm도 잘 잡아내지 못했던 디테일이 있다.

이제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미여관의 보컬 육중완은 1980년생이다. 평균에 비해 훨씬 중후한 청년이다. 육중완이 결벽증에 관한 거의 모든 소문에 시달리는 깔끔한 동갑내기 노홍철과 앙상블을 이뤄가던 무한도전의 과정은, 그래서 같은 세대이지만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 극점들이 맹렬히 섞이는 재미를 던졌다. 홍대 앞과 강남, 옥탑방과 잘 디자인된 아파트의 이미지로 대립하던 그들이 결국 찾은 합의점이 <오빠라고 불러다오>였다는 점은 그래서 그 또래 세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졌다.

실제 노래도 그랬지만, 그건 구애라기보다 절규였다. 봉숙이에게 차이고, 어쩌면 장가도 못 갈 수 있지만 그런 복잡한 논리는 다 필요 없으니 그저 오늘도 놀아버리자는 선언이었다. 그게 <오빠라고 불러다오>의 속내였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울타리 속에서 반복되는 생활을 하다보면, 순간순간 차라리 감당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곤 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마시고, 되는 대로 말하고, 술에서 깨어나면 먹어야 할 것이 컵라면밖에 없더라도 ‘껄껄’ 웃을 수 있는 시간 속으로의 돌진. 장미여관이 내게 연예인인 이유는 그들이 <무한도전>에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진부한 에로스의 그 이름처럼 바로 그 지점에서 펄럭이는 깃발이기 때문이다.

장미여관은 당대의 젊음에 가장 근접한 밴드이고, 술과 질척거림으로 탕진되는 청춘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그리고 서울 망원동 옥탑에 사는 마포구민 육중완은 그동안 우리가 소비해왔던 홍대 앞의 이미지가 허구임을 거의 유일하게 고발하고 있는 청춘이다. 세련됨과 특이함을 동시에 갖춘, 그래서 동경하지만 정작 그런 것은 거기에 없다. 육중완은 오늘도 ‘찐내’ 나는 베개를 깔고 누워 1만원에 5마리 하는 냉동 게로 손님을 대접한다. ‘홍대 앞’으로 대변되는 소비 공간의 욕망은 장미여관이 읊조리는 것처럼 누군가를 꼬여보기 위한 욕구이고, 그게 잘 되지 않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는 청춘의 경연들일 뿐이다. 누추하지만 그리운, 천박하지만 못되지 않은 그 시절을 여전히 그가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묘한 위로가 된다.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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