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02 10:58 수정 : 2013.12.03 13:45

서명혜 미술감독은 1997년 영화 <접속>으로 입봉한 뒤 <미술관 옆 동물원> <몽정기 1> <여자, 정혜> <사랑니> <비스티 보이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싸움> 등을 거치며 실력을 쌓았다. “이 일은 마약 같은 데가 있어요.” 그는 <응답하라 1994> 제작이 시작된 지난 6월 이후 세 번밖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일이 힘들지만 만족감은 크다”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서명혜1입니다. 제 소개부터 할게요. 요즘 tvN에서 방영되는 금·토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 아시죠? 지난 11월23일 방송된 11회에서 평균 시청률 9.3%(순간시청률 10.6%)를 기록했잖아요. 케이블 채널에서는 3%만 넘겨도 ‘대박’으로 분류되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거죠. 요즘 다들 ‘응사앓이’ 중이라고요? 심지어 ‘불금’ 포기하고 ‘응금’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던데…. 제가 바로 그 화제의 드라마 미술감독이랍니다. 이 지면을 빌려 <응사> 소품에 대한 뒷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풀어놓으려고 해요.

미술감독, 낯선가요? 쉽게 말해 화면 구성에 관한 일이 미술팀의 역할이고, 제가 책임자인 거예요. 제 밑에 강동훈 미술팀장 외에 4명이 팀을 이뤄 <응사>의 화면 구성을 책임지고 있지요. 대개 소품팀이 미술팀 안에 배속돼 있어요. 자잘한 소품 외에도 기본 인테리어와 리모델링까지 우리 소관이죠. 작품에 따라 미술·소품팀을 분리하기도 하는데, 제 경우 팀을 함께 꾸리는 게 더 효율적이더라고요.

요즘 언론에서 <응사>를 많이 다루더군요. 인기 비결로 1994년에 대한 사실적 고증·재현을 꼽는 기사들도 있고요. 저로서는 당연히 땡큐 베리 감사죠. ‘밥벌이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촬영 중반부로 넘어오면서 저를 비롯해 팀원들의 피로도가 급격히 쌓이고 있는데, 이런 반응이 오면 영양제 맞은 것처럼 힘이 불끈 솟는다니까요. 졸지에 저는 효녀 노릇 톡톡히 하고 있어요. “나이 마흔 다 되도록 결혼은 고사하고 월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니,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던 어머니의 태도가 확 달라졌어요. 제 일이 뭔지 확실히 아셨고, 이제는 저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신다니까요. “<응사> 알지? 우리 딸이 그거 세트하고 소품 만들었잖아.” 당분간 결혼하라고 독촉받을 일은 없겠어요. 하하하.

저도 PD도 ‘94년 스무 살’ 실감나시죠?

‘도대체 어떻게 1994년을 그토록 깨알같이 재현했느냐?’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더군요. 1990년대 하숙집 분위기뿐 아니라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스페이스 록카페 같은 추억의 공간을 다시 봐서 신기했나봐요. 쓰레기(정우)가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던 서주우유, 삼천포(김성균)와 해태(손호준)가 하숙방에서 자주 하던 베네치아게임, 하숙생들이 마셨던 OB맥주와 마하세븐 음료수, 각종 과자, 캡틴 컵라면, 각종 책과 잡지, 카세트 플레이어와 테이프, 플로피디스크, 겜보이 게임기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비결, 알려드릴까요? 실은 제가 1994년에 스무 살이었어요. 당연히 제 기억부터 먼저 더듬었죠. 신원호 PD가 저와 동갑이라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고요. 하숙집 거실에 놓인 피아노전화기 기억하시죠? 신 PD가 거기엔 꼭 그 전화기를 놓아야 한다고 해서 4만원 주고 해외에서 공수해온 거예요. NEX맥주도 대본에 있던 거라 꼭 필요했던 소품이고.

추억의 소품을 찾는 데 가장 유용한 자료는 옛 신문과 잡지, 인터넷이었어요. 블로거를 수소문해 수집품을 얻기도 했고, 전국의 헌책방과 레코드점을 찾아다녔죠. <스크린> <키노> <로드쇼> <아이큐점프> <슬램덩크> 같은 잡지와 만화책, 당시 유행한 카세트테이프를 이렇게 구했죠. 제가 <응사>에 결합한 시점이 6월이니까, 그때부터 눈팅을 하고 발품 팔아 소품들을 찾아다녔어요. 1994년 김일성 주석 서거 당일 대학생들이 호외판 <한겨레>를 읽는 장면이 잡힌 거 아시죠? 대본에는 <한겨레>만 명시돼 있는데, 우리는 <조선일보> 호외도 같이 준비했어요. 옛날 느낌이 더 나고, <한겨레>가 한 면만 인쇄된 것과 달리 양면 인쇄가 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교정에서 호외가 뿌려지는 장면에는 <조선일보>를 쓸 수밖에 없었죠.

신 PD는 세트 촬영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요. 가급적 현장에서 촬영하는데, 주 무대인 ‘신촌하숙’, 실은 신촌이 아니라 평창동에 있는 낡은 주택이랍니다. 장소가 결정된 7월께부터 도배와 페인트칠, 소품 장식 등을 본격적으로 했죠. 벽을 어떤 색으로 칠할지, 어떤 가구와 소품을 놓을지 구상·배치하는 일도 우리 몫이에요.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폐가 흔적 없애기였어요.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 가구와 벽지 등에서 손때가 묻은 느낌을 내는 거요. 아쉬운 건 첫 하숙집을 꾸미고 1회 촬영을 하기까지 기간이 충분하지 않아 소품을 완벽하게 채우지 못한 점이에요. 당시 쓰던 그릇, 가구, 패브릭 등을 더 채웠으면 좋았을걸 내내 마음에 걸려요. 이미 방영된 화면에 새롭게 다시 소품을 채워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본격적으로 촬영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20년 전 물건 구하기쯤이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오판이었죠. 오래된 물건이 아닌데다 골동품이라고 하기도 뭐해서 구하기 더 힘들었어요. 대부분 가정에서는 이미 버려진 경우가 많았고, 골동품 상점에서는 취급하지 않았으니까요. 1960~70년대 물건이면 더 쉬웠을지 모르겠어요.

밀키스·NEX맥주는 종이로 붙여, 티 안 났죠?

가장 구하기 힘들었던 물건은 486 컴퓨터였어요. 하숙생들의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라 반드시 필요했는데, 시중에서 안 쓰는 물건이니까요. 수소문 끝에 지방의 한 양말 공장에서 사용하던 제품을 겨우 설득해 25만원에 구입했죠. 아 참, 한글타자 연습용 베네치아게임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낸 효과랍니다. 대본엔 없었는데 미술팀에서 만약을 대비해 구입한 물건도 있어요. PC통신 하이텔 단말기죠. 애초에 수집가가 150만원을 불렀는데, 결국 깎고 깎아 새 제품을 30만원도 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했죠. 휴~, 미술팀에 있으려면 가끔은 협상의 달인(?)이 되어야 한답니다. 그 밖에 옛 화장품은 소장한 분을 블로그에서 찾아 빌렸고, 에스페로 차량과 플로피디스크 같은 건 기존 소품창고에서 대여했어요. 서태지 2집 테이프와 농구선수 이상민 브로마이드는 각각 팬한테서 빌린 것이랍니다.

저는 일할 때만큼은 완벽주의를 추구해요. 인상도 그렇죠? ‘서깐깐’이라고 해둘게요. 요즘 <응사> 촬영 일정은 일주일에 나흘이에요. 뭐, 우리 팀이야 일주일 내내 비상근무 상황이죠. 촬영 때는 소품 챙기고, 소품 거둬들이고, 촬영이 없는 사흘 동안엔 다음 촬영을 준비하고. 팀원 모두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지 꽤 됩니다. 저도 지난 6월 이후 집에 딱 세 번 들어갔어요. 팀원과 함께 여기 상암동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지요.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부터 촬영 현장에 나가는 횟수도 줄었어요. 옛 물건을 컴퓨터 일러스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재현하는 일을 제가 맡고 있기 때문이지요. ‘잠과의 전쟁’이 따로 없어요.

미술팀에서 직접 만든 물건은 대부분 먹을 것,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광고 포스터 같은 거예요. 캔음료는 녹슬거나 라벨이 벗겨졌고, 과자 케이스는 디자인이 바뀌거나 제품 자체가 없어진 경우도 있거든요. 직접 만든 소품 비중이 절반쯤 되는 것 같아요. 음료수, 술, 과자, 우유, 약, 담배, 컵라면, 브로마이드, 포스터, 카세트테이프 등이 대표적이죠. 카세트테이프는 직접 만든 것만 200여 개가 됩니다. 덕분에 그래픽 작업으로 소품을 만드는 재미를 쏠쏠히 알아가고 있어요.

빼빼로, 꼬깔콘, 지금과 디자인이 다른 밀키스, OB맥주, NEX맥주 같은 것을 일러스트로 작업해서 커다란 프린터로 출력해 기존의 캔과 유리병, 종이에 붙였죠.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화면에서는 새로 만든 티가 안 나더라고요. 노란 지하철 정액권도, 지하철 개찰구도 직접 만들었어요. 단, 정액권이 튀어나오는 장면은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린 거랍니다. 트윈엑스 화장품은 여러 통로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못 구했어요. 비슷하게 생긴 병을 구해 라벨만 따로 붙인 건데, 티 안 났죠? 고속터미널, 약국, 편의점에 붙은 포스터도 자체 제작한 것이고요.

<응사>가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그나마 미술팀도 한숨 돌릴 여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어요. 신원호 PD도 “그동안 화면에서 1994년을 많이 보여줬으니, 이제는 스토리 위주로 가도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어디 손 놓고 있을 수 있나요? 20회 마지막 대본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야죠. 지금도 컴퓨터와 신문, 잡지를 뒤져가며 1990년대 물건이면 무조건 확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여하튼 대본이 100% 구현되는 화면을 만드는 게 우리 일이니까요. 지금도 더 만들어야 하는, 만들고 싶은 과자와 음료수 종류가 많은데 시간 때문에 화면에 등장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에요.

그리고 비밀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3회에서 삼천포가 불렀던 ‘우~ 샤랄랄라 대형 잡채~ 우~ 제육볶음’ 아시죠? 그 음식을 만든 주인공이 사실은 저랍니다. 원래 작품마다 푸드코디네이터를 두는데, <응사>에서는 특별히(?) 제가 담당하고 있어요. 예산도 그렇고, 촬영 일정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화면에 등장했던 잡채, 아구찜, 낚지볶음 등의 요리와 밑반찬 모두가 제 솜씨랍니다. 요리 잘하냐고요?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대충 만들었어요. 맛이 어떠냐고요? 출연자들마다 “맛있다”고 감탄을 연발하던데요? 성동일 선배님은 심지어 “왜 이렇게 힘든 일 해? 식당 차려”라고까지 하셨다니까요. 이래저래 <응사>를 하면서 인터넷 검색 능력이 일취월장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이 바닥 17년… 만족감은 큰데 너무 짜요

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어요. 애초부터 이쪽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다 우연히 <접속>(1997) 소품팀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고, 그 뒤부터 계속 이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요. 다 아시죠? 영화 스태프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열악한 거요. 밤샘 촬영, 열악한 처우, 불규칙한 수입…. <접속>을 끝내고 나서 다시는 이따위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무엇보다 너무 힘들었거든요. 한때 일러스트 아르바이트도 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포장하는 일도 했어요. 더 늦기 전에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해볼 요량이었죠. 그런데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네요. 이 일은 마약 같은 뭔가가 있어요. 일할 때는 정말 힘든데 하고 나면 만족감이 크고, 무엇보다 다른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지루하고 무료하고 따분할 수가 없어요. 웃기죠? 지금껏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여자, 정혜> <사랑니> <비스티 보이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싸움> 등을 거쳤고, <몽정기 1>로 미술감독에 입봉했죠.

영화 스태프 일은 대표적인 3D 업종 중 하나예요. 밤낮 없는 촬영에다 몸을 써야 하는 미술팀의 특성상 여성이 하기엔 체력적으로 달릴 때가 많지요. 그렇다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화 쪽 일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요. 20대 중에서 이쪽 일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처우도 근무 환경도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방송은 올해 초 tvN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어요. <우와한 녀>를 거쳐 <응사>에 이르기까지 세 작품을 연이어 하게 됐네요. 프리랜서인 저로서는 작품 의뢰가 오면 무조건 고마울 수밖에 없죠. 드라마를 해보니, 그 나름의 매력이 있더군요. 화면 표현의 한계가 있고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 대신 매회 새로운 일을 하는 새로움이 있어요. 돈을 떼일 염려 없이 오로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매력이고요. 영화처럼 촬영 기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가능성도 적고요. 무엇보다 <응사>처럼 작업에 대한 반응이 바로 피드백되니까, 그것도 좋던데요? 이렇게 촬영 중간에 인터뷰할 영예(?)를 누리기도 하고요.

미술·소품팀의 처우가 궁금하다고요? 대체로 영화 한 편당 일정액의 보수를 받아요. 프리랜서니까. 예를 들어 제작비 20억~30억원 규모의 영화를 만들 경우 경력과 제작 여건 등에 따라 1인당 2천만~7천만원을 받지요. 영화 한 편의 제작 기간을 감안하면 1년에 한 작품 이상 작업하기가 쉽지 않아 사실상 이게 곧 연봉인 셈이에요. 물론 제작사와 감독과의 친분 등에 따라 보수가 천차만별이어서 미술감독의 급여를 일반화할 수 없긴 해요. 또 영화가 중간에 엎어지는 경우 일하고도 아예 보수를 받을 수 없는 점도 감안해야 하겠죠?

저처럼 경력을 쌓은 미술·소품 감독들은 자체 작업실과 소품창고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만 해도 소품 컨테이너 3동을 갖고 있어요. 힘들게 구한 소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게 당연지사니까요. 일종의 직업정신 때문이라고 해두죠. 그 비용은 전적으로 개인 부담이에요. 이 직업은 인풋 대비 아웃풋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꺼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제 이야기를 듣고 미술감독이라는 직업과 <응사>의 소품 준비 과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됐나요? 마지막까지 <응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릴게요. 꾸~벅!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1 이 기사는 지난 11월13일 진행된 <응답하라 1994> 서명혜(39) 미술감독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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