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8:57 수정 : 2014.01.07 10:42

소녀가 어른이 되는 건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지만 아이돌이 뮤지션이 되는 건 극히 예외적이고 비범한 변화다. 데뷔 때부터 여느 걸그룹들과 다른 리얼리티를 보여줬던 아이유는 이제 확연한 자기 색깔을 가진 가수, 뮤지션이 되었다.한겨레 자료
사람은 누구나 제 나이를 산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혹은 넘어서보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래서 절반에 채 못 미치는 진실이다. 대개 제 나이를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해 그 자체를 잊는 것으로 진군하는 정신승리일 뿐이다. 어쩌다가 늙는 것을 늦출 순 있을지 모르지만, 제 나이를 극복하는 해법은 사실상 없다.

이제, 21살이다. 아이유의 3집 <모던 타임즈>(Modern Times)를 듣다 말고 그녀의 나이를 검색해봤다. 틀리지 않았다. 여전한 나이, 이제 1993년생이다. 그래서 더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언젠가 소설가 장정일은 박노자의 책을 읽으며, 자꾸 그 해박함에 놀라 책의 앞날개로 돌아가 그의 생물학적 연령을 확인하고 경탄하고 또 경탄했노라고 했다. 그건 그럴 수도 있다. 지적 능력은 도약과 때론 비약도 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아니다. 노래는 논리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 공감의 반응으로 구축되는 영역이다. 까다롭고 또 확고하다. 이성과 감성의 차이를 비교한다는 건 양자물리학과 김현식의 노래를 비교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웃긴 것만큼 엄청나게 다른 계열적 차이를 갖는다.

그런데 이럴 수 있는가. 아이유의 3집은 자꾸 그녀의 프로필을 검색하게 만든다. 21살에 기꺼이 세상을 관조하는 듯도 하고 나무라는 듯도 하는 목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런 도약과 비약은 정말 가능한 일인가. 물론 아이유는 이전에도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다. 아이유는 진즉부터 그 앞선 세대의 감수성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최대한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프로모션을 해왔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등에서 그녀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여고생이 아버지 세대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는 기특함을 넘어서는 어떤 성취를 분명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빠가 좋다’고 부르짖으며 당대 가장 발랄한 아이콘으로 떠다니던 소녀였다. ‘3단 고음’이란 명명 속에는 ‘나이에 비해 출중한 테크닉’에 대한 어른들의 흐뭇함과 열에 여덟이 가수를 꿈꾼다는 오늘날 10대들이 그녀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올해의 가수’에 뽑힌들 그건 그녀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란 의미지 그녀가 당대 가장 유의미한 가수라는 맥락은 될 수 없었다. 유명한 연예인과 재능 있는 뮤지션은 다른 것이고, 아이유의 존재감은 원본이 딱히 떠오르지 않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한둘은 존재할 법한 유명한 연예인의 복제물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매체인격(Media Personality)이 ‘국민 여동생’이었단 사실은 단적이다. 그녀의 보컬은 탁월했지만, 오늘날 아이유를 만든 것은 그 보컬의 힘은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훨씬 더 수수한(!) 그녀의 이목구비는 언뜻 대세에 반하는 촌스러움까지 묻어 있었다. 아이유의 행보는 그 다름 자체로 호소하는 전략이었다. 예컨대, 그녀보다 1살 많은 현아(1992년생)의 행보와 견줘 생각해보면 쉽다. 대부분의 여성 아이돌들이 섹시함을 근거지로 삼아 영역을 구축할 때, 아이유는 거의 유일하게 거기서 비켜서 있던 명사였다. ‘소녀시대’ 이후 모든 여자 아이돌들은 집단적 섹시함의 아우라에서 본인들의 존재를 세우고 섹시함에 의한 섹시함을 위한 섹시함의 경주를 벌이며 연예산업 안에서 ‘걸 파워’를 획득했다. 그러다보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괴이한 의상을 입고 치골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로 화제가 되는 소모적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유는 ‘잔소리’로 오빠들의 마음을 나른하게 하고 ‘오빠가 좋다’고 외쳐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다가 곧장 ‘너랑 나랑은 지금은 안 되지’를 말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그리고 모두가 한 번쯤 보았거나 경험했을 어떤 연애의 촉촉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간질이던 동생이었다.

강수지나 하수빈에게 연정을 품어본 이들에게 그래서 아이유는 추억이었고, 이미연이나 심은하를 추종한 이들에게 아이유는 잊고 있던 감정의 현재성이었다. 모든 아이돌이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과잉된 감정의 판타지 속에서 연기하며 기능할 때, 아이유는 말하자면 유일하게 합의 가능한 리얼리티를 갖춘 모두의 연인이자 연애 대상이었다. 아이유가 대세가 됐던 시절에 영화 <건축학개론>이 유행하며 ‘국민 첫사랑’이란 담백한 정서가 대중문화의 전위를 구성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난 수년간 그 노골적인 성애, 섹시함의 과잉 속에 지쳐 있었지만 그게 ‘한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대중문화의 어떤 규범적 질서로 자리잡아 그걸 속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태도로 여겨지는 어쩔 수 없는 풍토 속에서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유의 귀환은 그런 의미에서 극적이다. 일련의 스캔들을 겪으며 아이유 역시 어떤 환상이 거세되면 그동안 누려온 지위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리란 점이 확인된 상황이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모두의 ‘여동생’이어야지 누군가의 ‘애인’이어선 안 되는 포지션이었다. 이 한계와 속박에서 아이유는 또래와 비할 수 없는 원숙함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소속사의 의도와 기획의 능숙함에 아이유가 적절히 잘 반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얘기다. 앞서 말한 대로 아이유의 목소리는 예전부터 제 나이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서늘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아이유를 그것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뚝 떨어뜨리는 힘은 기획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을의 연애>를 읊조리는 아이유의 톤과 양희은과의 호흡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공력은 제 나이를 넘어서 어떤 지평에 도달해 있는 뮤지션의 흔적을 보여준다. 소녀가 어른이 되는 건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지만, 아이돌이 뮤지션이 되는 건 극히 예외적이고 비범한 변화다. 일찍이 이상은과 박지윤은 10년도 넘게 걸린 듯싶고, 이효리 역시 서른을 넘고 인기의 바닥을 만져본 다음에야 본인의 음악을 말할 수 있었다.

한대수가 <행복의 나라로>를 작곡한 것은 1968년이었다. 그의 나이 19살 때 일이었다. <행복의 나라로>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목가적이면서 철학적인 가사와 인상적인 리듬 전개를 보여주는 탁월한 명곡이다.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이 노래의 성취와 오늘 아이유의 그것을 견주기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대중의 필요에 따라 흔한 소비 기호로 여겨지던 한 소녀가 이처럼 빨리 자기 색깔을 찾아가는 예를 아이유의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뭘 해도 귀엽고 패기 있어 보이기만 하던 한 소녀에게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21살의 목소리에 이렇게 마음이 뚝 떨어져도 되는 것인지. 오랜만이다. 그리고 묘하다, 이 소녀, 아니 가수 그리고 뮤지션.

글 김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나 청량리에서 자랐다. 충무로영상센터 ‘활력연구소’를 학교 삼아 다녔고, 이후 문화연대에서 ‘변두리’를 메인 이슈 삼아 활동했다. 현재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기자.

광고

광고